서로 참고 서로 위로하고 (토마스 아 켐피스)

한 줄 묵상 2016.05.09 15:41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그 어떤 약점을 감내하는 일에 있어서 참을성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대 또한, 다른 사람들이 참아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도 자신을 원하는 바대로 만들어 나갈 수 없는 마당에,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대의 의사를 추종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지음, 구영철 옮김, 《그리스도를 본받아》(가이드포스트, 2009), 제1권, 제16장.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고, 비록 '부부의 날'이나 '형제자매의 날'은 없지만, 오월은 가족들이 서로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는 때입니다. 그런데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고, 서로의 약점과 약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가정 갈등은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또는 형제 자매가 서로를 자신의 뜻대로 바꾸려하거나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정에서는 서로에 대한 고마움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만과 분노가 차지하게 됩니다.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고 지지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에게 상처와 스트레스를 주고 받는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사실 서로에 대해서 참아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잘 안 될 뿐이지요. 이런 점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조언은 우리가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인내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가령 성격이 급한 남편과 우유부단한 성격의 아내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의 성급함을, 남편은 아내의 우유뷰단함을 서로 참아 주어야 합니다. 


또한, 토마스는 우리는 자신도 자신의 뜻에 원하는 바대로 완전히 바꿀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억지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침과 권면을 일절 금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부모가 자녀의 나쁜 습관을 바로 잡기 위해 훈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부모가 자신의 나쁜 습관을 성찰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본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자녀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습니다. 


요약하면 토마스의 조언의 핵심은 '자기 성찰'에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약점이 많은 존재인지, 잘 변하지 않는 존재인지를 마음에 새긴다면 상대방의 약점과 변하지 않음을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점이 많고 고집 센 자신과 함께 살아주는 배우자에 대한, 또는 아껴주고 인내해 주는 부모와 자녀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불평과 분노를 이기게 될것입니다. 토마스는 이것이 곧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 '서로 짐을 지는 것'(갈6:2)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타인의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서로 배워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잘못이 없거나 짐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 

오히려 우리는 서로 참고 서로 위로하는 동시에 돕고 가르치고 권면해야 합니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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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수 없는 십자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6.02.13 14:33

그러므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다. 모든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 우리가 짊어지기 때문에 십자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십자가는 우리와 함께 한다. 어디로 향하든지, 위든, 아래이든, 안에서든, 밖에서든, 당신은 십자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12장. 십자가의 왕도.


어김없이 사순절이 돌아왔다. 
종교적 절기로 지나치기엔
삶의 주변에 흩어져있는 고통들이 다시금 
십자가를 가리킨다. 

 

신학공부 입문을 함께 한 동료 목사님의 사모님이,  
아직 험한 세상을 경험하지도 못한 세 아들을
남겨두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난 3여 년의 투병 생활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시간이었으리라.
그 과정을 먼발치에서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서 바라보기엔 두려웠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십자가를 바라보기가 부담스럽다. 
내 삶이 편안해졌다는 신호일 터,
편안한 순간 또한 잠시라는 사실을
영성가는 다시 확인시켜준다. 

십자가를 직시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두려움으로 남게 된다.
십자가를 직면하여 끌어안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진실한 면들을
받아들이게 될 지 모른다. 

편안과 안락이 축복이라 여기는
영적인 탐닉으로부터 벗어나
삶에 이미 충만한 십자가를 
인지하고 끌어 안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는 어디에서든 발견된다. / 구름 위 햇살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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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식사는 잘 하셨나요?

오늘, 식사는 잘 하셨는지요?

체중 감량해야 하는데 왕성한 식욕에 이끌려 오늘도 후회가 남는 식사를 하셨다구요? 요즘 밥맛이 통 없어서 모래알 씹듯 하시다구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서 오랜만에 유쾌하셨다구요? 비즈니스 때문에 먹는 밥이라 가시방석이었다구요? 애들 밥 챙기느라 먹은 건지 전쟁 치른 건지 모르겠다구요? 오늘 저녁은 뭘 해 먹나 벌써 고민이라구요?

하루 두세 번의 식사, 그리고 사이사이에 먹는 음료와 간식. 우리는 참 많이 먹고 마시고, 거기에 기울이는 시간과 에너지도 상당합니다먹는 것과 영성 생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즘, 저는 먹는 것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느낌들, 특히 죄책감이 많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과식했을 때, 주부로서 식사를 잘 챙기지 못했을 때, 재료 준비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그냥 버려지는 음식물, 식사 때 오고가는 소리가 좋지 못했을 때는 하지 말아야 할 것해 버린 사람처럼, 해야할 것을 다하지 못한 사람처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무척 무겁고 불쾌해 집니다 

먹는 것과 관련하여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도움을 받아 볼까 합니다. 《영신수련》에는 먹는 것이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그만큼 잘 준비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시로 봅니다. , 자기 욕구가 훈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핵심은 절제입니다. 절제를 통해 자기 몸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선을 찾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내면의 소리, 위로, 영감들을 잘 느낄 수 있게 깨어납니다. 무조건 정량적으로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정상 체중이나 감량 목표를 정해 놓고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자기 욕구에 충실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몸에 대한 두려움, 먹고 난 후에 따라오는 죄책감과 자기 만족이 교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절제는 하나님께 민감하고 민첩하기 위해서 자기 삶의 독특성에 근거한 자기에게 맞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냐시오는 이것을 먹는 방식에서나 양에서 스스로의 주인”(《영신수련》, 216)이 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 먹는 일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어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일체의 자유로움을 의미합니다.

매일의 식사 때마다 《영신수련》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식사를 통해 하나님께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고, 그 가까워진 거리만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먹는 일이 수행이라니! 얼마나 멋진 발상입니까 

이렇게 해 보세요.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생각하며, 그분이 어떻게 마시고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생각하고 그분을 본받도록 힘쓴다.”(영신수련》, 214) 이렇게도 해 보세요. “또한 식사를 하는 동안 다른 생각, 즉 성인들의 생애나 어떤 경건한 관상, 혹은 해야 할 어떤 영적인 일 등을 생각할 수도 있다.”(영신수련》, 215)  많은 수도원에서 공동 식사 중에 영성 고전,  특히 《그리스도를 본받아》나 성경을 읽지요. 저는 글을 쓰는 지금도, 앞선 구절을 처음 대했을 때 받은 충격이 생각납니다. 신앙생활을 해 왔던 그때까지, 예수님께서 저희처럼 식사를 하셨다는 것 자체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일상적인 예수님의 모습엔 관심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마 대다수의 신자들이 그럴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네 신앙생활이란 것이 일상의 삶과 괴리된 특수 교회 생활로 고립되어 늘 절름발이 같이 절룩거리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예수님의 일상이 무엇이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는 마음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우리 서로 먹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아가기로 해요. 밥 짓고 상차리는 게 일인 사람으로서 밥 한 공기에 온 우주만물과 거기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내길 기도해 봅니다. 제가 차린 밥을 먹는 식구들이 하나님의 신비를 더욱 깨쳐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제 식탁에 구원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시는 주님을 초대하고 싶네요. 주님과 함께 밥을 먹으며 하고 픈 말이 참 많네요. 기도하러 가야 겠습니다.

이번 글은 식사의 신비로움을 예찬한 신학자 칼 라너의 말로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 산 것으로 화함이요, 어떤 존재물을 그 본성은 지킨 채, 더 고차원적이고 더 포괄적인 다른 현실 안으로 포섭함이다 먹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인식을 통해 주위 세계를 자기 것으로 삼고 사랑을 통해 세계라는 전체에 자기를 내맡기는 과정의 가장 낮은,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해야 한다.” - 칼 라너(Karl Rahner), 일상》 (분도출판사, 2003), 31-32. 

/ 해'맑은우리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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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4.07.08 01:02

"아들아, 너 자신을 떠나라. 그러면 나를 발견하리라."


"주여, 얼마나 자주 제 자신을 포기하리이까? 어떠한 것에서 저 자신을 떠나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언제나 그리고 매순간, 큰 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든 그렇게 하여라."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구영철 옮김,《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울: 가이드포스트), 183.


"그리스도 본받기"의 기초와 절정은 "그리스도와 대화하기"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흉내낸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영을 따라 사는 길은 그분과 나누는 쉽없는 대화에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하나님과 수도자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의 핵심 주제는 '자아/나'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가르치는 "자아 사용법"은 혹독하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혹독하듯이. 


하지만 혹독한 그 말씀은 또한 달콤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대화 중에 주님께서 "나"를 꼭집어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 우리 사랑하자"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사랑의 힘으로, 우리로 자신을 부인할 수 있게 해준다.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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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왕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4.04.07 06:30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 생명이 있으며

십자가에 보호가 있고

십자가에 위로가 있으며

십자가에 마음의 힘이 있고

십자가에 영혼의 즐거움이 있으며

십자가에 덕의 극치가 있고

십자가에 거룩의 완성이 있다.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 2, ch. 12 

("거룩한 십자가의 왕도(王道)에 대하여").


토마스 수사는 믿음의 삶에 '왕도'(royal road)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in cruce salus (/sub cruce salus)

"십자가 안에/아래 구원이 있다."


우리는 다른 데서 구원을, 생명을, 보호를, 위로를, 힘을, 즐거움을, 덕을, 거룩을 찾으려 하고,

그래서 찾지 못해 우울과 절망에 빠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는 노래한다--

여덟 줄 짜리 기쁨의 찬가(paean)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팔복을.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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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4.02.05 17:01

주님이 마음의 참된 평화요, 주님만이 안식이시요, 주님을 벗어나서는 모든 것이 괴롭고 불안합니다. 이 평안 가운데, 오직 그 안에서, 즉 유일하고 최고의 영원한 선(善)이신 주님 안에서 제가 잠을 자고 안식을 누립니다. 아멘.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구영철 옮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울: 가이드포스트), 140.


요즘 잠을 푹 자지 못한다. 


스트레스가 있어서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글을 읽고는, 

'평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맘과 몸에 평화를 잃었기에 제대로 자지 못한다. 


잔다는 것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 아닐까? 

평화롭게 안식에 들어가는 연습? 


어떤 이들이 죽을 때 평화로울 수 있을까? 

주님을 "유일하고 최고의 영원한 선"(the one, ultimate, endless good)으로 알고, 추구하고, 누렸던 이들이 아니겠는가. 

늘 "깨어있는" 이들 말이다. 


그래, 정신을 차리자. 

날은 가고 반드시 밤이 온다. 

낮에 "주님을 벗어나" 살았다면,  

밤에 자지 못하고 "괴롭고 불안"하리니. 


기도하자. 

잠은, 

구원처럼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기에. / 이종태


By Rudolf Eickemey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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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장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3.08.06 09:45
  • 이렇게 좋은 공간이 있었네요
    많이 읽고 은혜받게되서 감사드립니다

    BlogIcon 박선우 2014.02.01 22:37 신고
  • 우리 영성이 체험에 매달려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됨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진원 2014.02.02 13:23 신고
  • 이진원 님,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체험 자체에 매일 필요도 없고 매여서도 안 됩니다. 한 영성가는 하나님과의 더 깊은 하나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체험에 매달리지 말고 체험을 잊으라고까지 말했지요.

    그런데 체험은 기독교 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입니다. 그 체험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해석해 온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 바르게 해석하고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BlogIcon 바람연필 2014.02.04 02:34 신고

진정한 영적 성장은

은혜가 주는 위안을 누릴 때가 아니라, 

그런 은혜의 부재를 

겸손과 자기초월과 인내로써 견디어낼 때 일어난다. 


그러므로,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기도생활이나 다른 경건생활이 시들어지지 않게 하라.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 4, ch. 7.


하나님의 임재와 터치를 느끼는 것은 실로 달콤한 경험이다. 기도 중에, 말씀묵상 중에, 예배 중에 그런 경험을 갖게 될 때 흔히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서구 영성사의 전통적 표현으로 말하면, (영성적) '위안'(consolation)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경험이 깊었던 영성가들은 한결같이, 그런 영성적 "위안"은 좋은 것이지만 우리 영성생활이 그런 체험에 매달려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토마스 수사는 정말 우리에게 영적 성장이 일어나는 때는 오히려 그런 '위안'이 없을 때, 흔히 하는 말로 (내적으로) '메마를' 때라고 말한다. 그런 시기, 우리가 겸손하게(humbly), 자기를 잊고서(selflessly), 인내하며(patiently) 견딜 때, 우리 영혼은 진정으로 성장한다. 우리 영혼의 근육이 자란다.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울 때는, 영적으로 고양(高揚)되어 "할렐루야!"를 외칠 때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게 되는,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지경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유일한 희망으로 알아 붙들고 늘어지는 그런 영적 근기(根氣)의 시간이 아닐까? 


그런 시간에 길러지는 겸손과 자기초월과 인내야말로 우리 영혼에 새겨지는 그리스도의 형상일 것이다.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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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와 다그 함마르셸드

<2013년 3월의 추천고전>

1961년 9월 18일 세계를 놀라게 한 비행기 사고가 있었다. 콩고 내전을 끝낼 평화협상을 중개하러 가던 유엔 사무총장의 비행기가 아프리카 밀림 상공에서 추락, 그를 포함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사고/사건이었다. 사고가 아니라 암살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심증은 충분했다. 그가 이루려고 애쓰는 평화를 달가와 하지 않는 세력이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증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그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것이 있었다. 존 F 케네디가 '금세기 가장 위대한 정치가'라고 평했을 만큼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으며, 사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큼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그 사무총장의 '내면세계'였다.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그의 서류가방에는 그가 그 살벌한 갈등의 현장 한복판으로 가면서 들고간 두 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한 권은 <성서>였고, 다른 한 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였다. 


'성직자 같은 정치인'이라고 불렸던 그 제2대 유엔 사무총장의 이름은 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öld: 다그 함마슐드')다. 날마다 기도하며 사무총장직을 수행했다는 그의 가방에서 성경이 발견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의외의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니. 현대 세계의 치열하고 복잡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유엔 사무총장의 가방에 중세 수도사의 책이라니. 성경과 더불어 발견된 책이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Reinhold Niebuhr)기독교 현실주의와 정치 문제 같은 책이었다면 하나도 이상할 것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니. 


혹, 그 날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공항 서점 같은 데서 어떻게 하다 집어 들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물증'이 있다. 바로 그가 남긴 일기장이다.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지인들은 뉴욕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1920년부터 죽기 며칠 전까지 그가 기록한 일기 노트를 발견하게 된다. 후에 "Vägmärken(Markings)"라는 제명으로 (편집) 출판된 그의 일기는 세계 곳곳의 분쟁 현장을 찾아다니며 "할 수만 있거든" 평화를 이루어내고자 분투했던 한 고귀하고 유능한 활동가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그 내면세계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국제문제도 유엔활동도 아니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서는 일, 즉 요즘 말로 '영성'이었다. Markings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들은 시편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저작,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였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20세기 중반 이후 인기(?)가 급격히 떨어진 영성고전이다. '현대인들'이―'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도―이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 책이 표방하는 영성을 (현대와 맞지 않게) 지나치게 금욕적, 수도원적, 중세적, 개인구원중심적, 도덕적, 율법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고전'에 대한 비판적(critical) 자세는 장려할 만한 태도다. 그러나 더 장려되어야할 태도는 고전을 비판적으로 '내 것 삼을'(appropriation) 줄 아는 읽기 능력이다. 함마르셸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정말 '읽었던' 사람이었다. 지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집 침대 옆 탁자에는 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놓여 있었고, 그의 일기장이 발견된 곳도 그 탁자 위였다. 


개명한 현대에 더는 맞지 않는 수동적 태도를 장려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 중에서 함마르셀드가 그의 일기장에 인용하고 있는 한 부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뿌리를 박고 견고히 서 있는 이들이니, 교만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이 풍성히 받은 모든 좋은 선물을 다 하나님께로 돌리며, 따라서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한다. (II, X, 4.)


이 구절을 또박또박 옮겨쓴 뒤 함마르셸드는 여백에 "1953년 4월 7일"이라고 적어 넣었는데, 그 날짜는 바로 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날짜였다. 


초인적 지혜와 인내, 또 용기가 요구되는 평화협상 자리에 가면서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가고 싶어 했던 이유를 이제 우리는 얼마간 짐작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정말 그 일의 막중함과 어려움, 그리고 그 일에 따르는 유혹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했던 그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기도에 더욱 공감할 수 있으리라. / 산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아

저자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출판사
가이드포스트 | 2009-12-09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중세 경건 문학의 최고봉! 삶의 시간대를 초월하는 기독교의 기본...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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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2.11.20 03:12
  • 글뿐만 아니라 함께 올리신 그림과 책도 흥미롭습니다^^ 찾아보니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해골이 여러 번 등장하네요. 아래의 링크에 있는 그림에서 프란시스가 해골을 들고 묵상하고 있는데, 카라바조에게 '해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http://en.wikipedia.org/wiki/Saint_Francis_in_Prayer_(Caravaggio)

    BlogIcon 바람연필 2012.11.20 12:32 신고

곧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라.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말고

죄로부터 도망쳐라.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1, ch.23.


영성가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말한다. 


죽음을 기억(re-member)한다는 것은, 

보기 싫어 멀리 내쫓아버린 죽음을 

다시(re) 나의, 내 삶의 일부(member)로 받아들여 

자주 들여다보며 생각한다는 것일 것이다.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해보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병적인 태도가 아닐까? 

토마스 수사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말한다. 


죽음 생각이 싫은 것은, 

죽음이 그저 두렵기 때문이고, 

죽음이 그저 두려운 것은 

죄와 싸우는 삶 ― 경건한 삶, 영적인 삶 ― 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 기억하기'는, 

어떻게든 죽음을 망각하게 만들어

사람을 아무 생각없는 '소비자'로 살다 죽게 만들어 버리려는 

현대사회 ― 세상! ― 음모와 술책에 맞서는

반문화적(counter-cultural) 라이프스타일이요, 영성이다. 


/ 산처럼

Caravaggio(1573-1610), 'San Gerolamo' (Saint Je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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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감기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2.10.22 19:28
  • 저도 놀라게 되네요. 일이 하나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그로 인해 나의 이기심을 깨닫게 되니 감사해야겠군요.

    BlogIcon 바람연필 2012.10.23 06:29 신고

많은 이들이 남들 모르게 이기적으로 ― 자기중심적으로 ― 살고 있는데, 

자기 자신도 그걸 모를 때도 많다.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잘 되고 있을 때는

평화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일이 하나라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그들은 금세 성질을 내거나(irritable) 풀이 죽는다(depressed).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1, ch.14.




요즘 마음이 왠지 울적하여, 

울적한 마음을 베개 삼아 게으르게 뒹굴며 지내다가, 

이 구절을 읽고 화들짝 마음이 깨어난다. 


"아, 내가 좁아터진 나 자신(利己心)속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구나. 그러니 이렇게 답답하지."


마음이 깨어나니

몸도 깨어나는 듯하다

--감기가 나을 것 같다. /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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