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그 여자〉와 '위안부' 소녀들을 위한 탄원

오늘은 윤동주 시인(1917-1945)의 〈그 여자〉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를 함께 읽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인의 육필원고에 있는 그대로, 곧 당시의 맞춤법을 고치지 않고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여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젓슴니다.


오날도 가을바람은 그냥붐니다.


길가에 떨어진 불근 능금은

지나든 손님이 집어갓슴니다.


1937. 7. 26.



겉으로만 보면 가을 풍경의 한 장면을 그린 짧고 평범한 회화적인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함께 읽어야 할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윤동주평전》을 쓴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송우혜 님은 이 시가 고대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Sappho)의 〈한 처녀〉라는 작품을 패러디한 시라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사포의 작품을 직접 읽어보시지요. 



한 처녀


저 높은 가지 끝에서

불그스레 익는

아름다운 사과와도 같으니

따지 않음은 잊은 것이 아니요

높아서 손이 닿지 못함이다.


- 사포





송우혜 님은 이 두 작품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습니다. "사포의 한 처녀와 윤동주의 그여자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양자는 제목에서부터 기본구도까지 아주 흡사하게 닮은꼴이다. 그러나 '여자'를 노래한 시각은 정반대이다. 사포는 뭇 남성들로서는 감히 '손이 닿지 못하는,' 마치 높은 가지 끝의 붉은 사과와도 같이 고고하고 드높은 기품의 아름다운 처녀의 존재를 노래했다. 그러나 윤동주의 비평정신은 이 시에 불만을 느꼈다. …… 그는 아무리 '손에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 해도 결국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처녀들의 운명임을, 제 또래보다 먼저 피어난 뛰어난 처녀가 '지나는 손님'으로 묘사될 만큼 엉뚱한 인간에게 허망하게 걸려드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실체임을, 날카롭게 피력한 것이다."[각주:1]


그러면 윤동주 시인은 왜 사포의 낭만시를 풍자적인 시로 바꾼 것일까요?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날짜는 1937년 7월 26일입니다. 그가 북간도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재학할 때로 노구교(루거우 다리) 사건(1937년 7월 7일)으로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직후입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중국과 일본은 지속적으로 대립해왔습니다.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자신들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전선을 상해까지 확장시켜 제1차 상해사변(1932)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때 상해의 일본육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위안소는 점차 중소도시로 확장되어 갔다고 합니다.[각주:2] 또한, 여러 사람들(피해자, 가해자,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가 살았던 북간도 곳곳에도 위안소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참조: 지린성의 일본군 위안소) 그렇다면 1937년 당시 북간도 조선인들의 중심지인 용정에 있었던 윤동주도 '위안부'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윤동주의 시 〈그 여자〉에 나오는 길가에 떨어져 버린 "붉은 능금"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소녀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능금을 집어간 "지나던 손님"은 남의 땅을 점령하러 들어온 일본군인들이 아닐까요? 시인이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에 이런 내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그 여자〉를 읽어보면, 담담한 문체로 쓰여진 진술이 오히려 매우 슬프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붉은 능금을 집어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인은 스무살의 젊은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슬픈 일을 시로 기록해 두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윤동주의 〈그 여자〉를 사포의 〈한 처녀〉와 다시 한 번 대조해보면, 2연이 다음과 같은 단 한 줄로 되어 있어 시선을 끕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가을바람"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람은 인간의 힘의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영역, 나아가 기독교인이었던 윤동주에게 자연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인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윤동주는 〈또 태초의 아침〉이라는 시에서 바람에 전깃줄이 잉잉 우는 것을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을바람이 오늘도 그냥 불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능금이 떨어지고 지나던 사람이 그것을 집어가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별다른 관여 없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것으로 시인이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능금이 무게로 인해 저절로 떨어졌는지, 바람에 떨어졌는지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데, 만약 바람에 떨어진 것이라면 비극적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소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비극에 하나님도 결과적으로 거든 것이 되니까요. 어쨌든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하나님의 침묵 또는 방관은 현실에 비극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로 제시됩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이 시는 굉장히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고백으로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일종의 탄원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윤동주는 시편을 즐겨 읽었습니다. 그리고 외사촌 동생인 김정우 시인에게 시편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기도 하였습니다.[각주:3] 시편에 나오는 많은 탄원시들에는 시인(또는 공동체)가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시편 137편 7절에서는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당시 히브리인들이 당한 원통한 일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윤동주의 〈그 여자〉도 그냥 부는 가을바람처럼 방관하시는 듯한 하나님을 향해 외친 시인의 탄원이 아닐까요? 당시의 험악한 상황 때문에 시편 기자처럼 격정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시인은 당시 소녀, 또는 처녀들이 일본군들에게 끌려가 당하는 비극을 "기억해주십시오,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무언의 외침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 안타깝게도 당시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분들이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한일 외교부 장관이 공동기자회견문의 형식을 통해 '위안부' 관련 합의를 발표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합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합의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이유를 들어 보면, 그들 중에는 '위안부' 관련 사안을 '문제'로 인식하는 이들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언론과 인터넷 등에서는 "위안부 문제"라고 자주 표현해서 그런지 어떤 이들은 '위안부' 이슈가 한일 사이의 외교와 경제 협력을 가로막는 골치 아픈 '문제 거리'이고, 그래서 적당한 수준에서 빨리 풀어 해치워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위안부' 관련 사안은 결코 그런 '문제 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비극이며,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되는 역사입니다. 한일 간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번 합의로 더욱 상처받은 '위안부' 피해자들, 이젠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버린 '소녀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다시 탄원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일로 우리 국민들 사이에, 한일 사이에 분열의 골이 더 깊어지는 이 안타까운 상황으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더욱 간절하게 탄원해야 할 것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송우혜. 『윤동주평전』, 제3판. (서울: 서정시학, 2015), 253-54. [본문으로]
  2. 양현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사적 성찰과 반성." 기독교사상 666 (June 2014): 18-29. [본문으로]
  3. 김정우, "윤동주의 소년시절," 『나라사랑』 23 (1976년): 1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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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윤동주의〈팔복〉그리고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

성경은 그 자체로 문학작품이기도 하고, 또한 많은 문학작품에 영감을 주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과 관련된 시 두 편을 함께 읽고자 합니다.

 

  먼저는 성경 《메시지》와 에세이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시입니다. 주로 산문으로 된 책을 써오던 그가 2013년에는 《거룩한 행운》(The Holy Luck)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번역한 《메시지》가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피터슨이 시집을 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 시집은 모두 3부로 구성 되어 있는데, 그 중 1부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우러난 여덟 편의 시들의 모음입니다.[각주:1] 그리고 그 중 두 번째 작품이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행운의 슬픈 자〉(The Lucky Sad)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시인은 '슬픈 사람 = 불행한 사람'이라는 통념을 뒤집고 있는데, 이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슬픈 자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지 이제 그의 시를 직접 읽어 봅시다. 먼저 영어 원문으로, 그 다음에는 서투르지만 저의 한국어 번역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The Lucky Sad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lash floods of tears, torrents of them,
Erode cruel canyons, exposing
Long forgotten strata of life
Laid down in the peaceful decades:
A badlands beauty. The same sun
That decorates each day with colors
From arroyos and mesas, also shows
Every old scar and cut of lament.
Weeping washes the wounds clean
And leaves them to heal, which always
Takes an age or two. No pain
Is ugly in past tense. Under
The Mercy every hurt is a fossil
Link in the great chain of becoming.
Pick and shovel prayers often
Turn them up in valleys of death.


Eugene Peterson, Holy Luck (Grandrapids, MI: Eedermans, 2013), 4. 



행운의 슬픈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눈 부신 눈물의 홍수, 그것들의 급류가

잔인한 협곡들을 침식시켜 오래 잊혀진

인생의 지층을 노출시킨다

평화로운 세월들 속에 눕혀진

악지(惡地)의 아름다움을. 하루하루를 

황야의 작은 협곡과 평평한 언덕의

색깔들로 칠하는 바로 그 태양이 또한 

모든 오랜 상흔과 한 조각의 비탄을 보여준다.

울음은 상처들을 깨끗이 씻어서

치유를 위해 놓아 두는데 치유엔 항상

한두 세대가 걸린다. 과거 시제로는

어떤 고통도 흉하지 않다. 신의 자비 

아래에서 모든 상처는 화석이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한 고리이다.

기도는 종종 죽음의 계속에서 

그것들을 찾아 내는 곡갱이와 삽이다.


- 유진 피터슨.


    혹시 이 시를 읽을 때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이 있으십니까? 저는 여행 중에 본 북미의 붉은 협곡과 사막이 눈 앞에 떠올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이지요. 이런 협곡들의 옆면은 마치 칼로 잘려진 것과 같은데, 거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지층들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화가의 팔레트의 한 부분 같은 다채로운 붉은 색깔들을 띠고 있습니다. 특히 해질녘 석양이 비칠 때면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납니다. 아마도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협곡들 그리고 황야의 붉은 언덕들이 가지고 있는 지층과 그 속에 오래 간직된 화석들에서 이 시의 영감을 얻은 듯합니다. 



    그는 이러한 화석에 과거의 상처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상처는 과거의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고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협곡을 침식시킬 만큼 거대한 급류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비추는 빛 속에서, 곧 오늘의 일상 속에서 빛에 의해 그 상처가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 때의 빛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신의 자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자비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Mercy) 아래에서 그 상처는 과거의 화석이 됩니다. 그리고 "되어감이라는 위대한 사슬의 한 고리"가 됩니다. 곧, 하나님의 자비로 상처가 치유될 때, 그 상처가 양분이 되어 우리가 보다 온전한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슬픈 자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통해서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어 온전하게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를 "죽음의 계곡"에서의 발굴작업을 위한 "곡괭이와 삽"에 비유합니다.


    이처럼 유진 피터슨의 〈행운의 슬픈 자〉에는 빛이시며,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읽을 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같은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앞의 시가 희망으로 빛나고 있다면, 뒤의 시는 절망으로 매우 어둡게 그늘지워져 있습니다. 이 시는 윤동주의 〈팔복〉입니다.


팔복 (八福)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윤동주


   매우 충격적입니다. 제목은 〈팔복〉, 곧 여덟 가지의 복인데, 시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중에 두 번째 복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곧, 슬픔이 다른 일곱 가지 복을 모두 잡아 먹어 버렸습니다. 그것도 원래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시인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의 자필 원고를 보면, 원래 "저희가 오래 슬플 것이오."라고 썼다가, "오래"라는 말에 줄을 긋고 "영원히"라는 말을 새로 써넣었습니다. "오래"와 "영원히"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오래 슬픈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그 슬픔이 사라질 여지가 남아 있지만, 영원히 슬픈 사람에게는 그 여지마저도 없습니다. 시인은 그만큼 끝이 없는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윤동주의 〈팔복〉 자필 원고. 왕신영 외 편집,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서울: 민음사, 1999), 170.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때는 일제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40년 12월 경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왜 이렇게 거대한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신에 대한 불신과 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일까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시'이기 때문입니다. 문자가 지니고 있는 표면적 의미보다 더 깊은 사고와 정서를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절망 가운데 부르는 비탄의 노래입니다. 비록 '기도'라는 말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기도입니다. 거대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역설적인 간구입니다. 


    이것은 윤동주가 비슷한 시기에 쓴 〈위로〉라는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에는 병원 뜰에서 요양을 하는 한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는 거기서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벗어나려고 파닥거리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거미가 다가와 나비를 줄로 칭칭 감아 버리자, 이 사나이는 한숨을 쉽니다. 이에 시적 화자는 이 젊은이를 가엽게 여기고, 위로하고자 합니다. 


"나[歲]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 〈위로〉 3연.


재미 있는 것은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라고 했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만큼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강력한 구원의 행동이 없습니다. 거미줄을 헝클어뜨림으로써 화자는 나비를 구원합니다. 그리고 비록 화자가 직접 젊은이의 병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한숨을 쉬며 체념하던 젊은이는 나비가 놓임을 얻는 것을 보고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구절을 뒤집은 〈팔복〉은 시인이 거미줄을 뒤헝큰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손으로 슬픈 자기 민족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거미줄을 헝크는 것과 같은 시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은 동족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의 시'이자 역설적인 '위로의 시'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행운의 슬픈 자〉와 〈팔복〉은 왜 이렇게 다를까요? 그것은 시인의 위치 때문입니다. 〈행운의 슬픈 자〉에서 슬픔은 과거의 상처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처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그 상처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팔복〉의 시적 화자는 그 상처, 아니 상처라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그 절망과 슬픔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한 가운데에서는 '지금의 아픔이 나중에는 좋은 약이 될 것이다'라는 해석에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긍정의 옷, 또는 이론적인 희망의 옷을 입히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개념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을 때에, 그 기존의 개념을 '헝클어뜨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그 기존의 개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설적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현실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솔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자신을 책망하시기보다 긍휼히 여기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자비이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참고로 2부 "바스락거리는 풀"(The Rustling Grass)에는 창조세계 속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시들이, 3부 "부드러운 돌들"(Smooth Stones)에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의미에 대한 시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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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의 <동생을 위해> 그리고 4월 16일

2014년 4월 16일, 고난주간 수요일, 세월호가 조난당하고 삼백 여명의 꽃다운 생명이 바닷속에 잠겼다. 

1943년 4월 16일, 고난주간 금요일 밤, 토마스 머튼의 동생 존 폴 머튼이 영국 해협에서 조난 당하고, 다음날 이른 새벽 바다 위에서 숨을 거뒀다.


존 폴 머튼(John Paul Merton, 1918-1943)은 당시 캐나다 공군 소속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탄 비행기가 고도를 잃고 바다에 추락했고, 그 충격으로 그는 척추가 부러져 버렸다. 함께 탑승하고 있던 동료 두 명이 그를 간신히 고무보트로 끌어 올렸지만, 그는 세 시간 정도 갈증 속에서 버티며 기도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동료들은 구조를 기다리며 바다 위를 표류하다가 표류 넷째 날 존의 시신을 수장하였고, 다섯째 날에 구조되었다. 양친이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에 토마스와 존 두 사람에게 서로는 참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토마스 머튼은 동생의 죽음 소식에 크게 슬퍼했고, 그의 세 시간의 목마름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목마름을 보았다. 아래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토마스 머튼이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은 애가(歌)인데, Thirty Poems(1944)라는 그의 첫 번째 시집에 실렸다가 후에 그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 초판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세월호 사고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애도하며, 머튼의 시를 한글로 다시 옮긴다. 




동생을 위해 : 1943년 작전 중 실종됨

 


사랑스런 아우야, 내가 잠들지 않으면

나의 눈은 너의 무덤에 놓는 꽃이란다

그리고 내가 빵을 먹지 못하면

나의 금식은 버들처럼 네가 죽은 곳에 살리라

내가 뜨거운 열기 속에 갈증을 적실 물을 찾지 못하면

나의 갈증은 너, 가련한 여행자를 위한 샘이 되리라

 

네 가련한 몸은 어디,

어느 적막하고 연기 자욱한 나라에

누웠느냐, 실종되었느냐, 그리고 죽었느냐?

그리고 네 불행한 영혼은

어떤 처참한 풍경 속에 길을 잃었느냐?

 

오라, 나의 노동 속에 안식처를 찾으라

그리고 내 슬픔 속에 네 머리를 눕혀라,

아니 차라리 내 생명과 피를 가져라

그래서 널 위해 더 좋은 침대를 사라

아니 내 숨과 내 죽음을 가져라

그래서 널 위해 더 좋은 안식을 사라

 

모든 전사들이 총탄에 맞고

깃발들이 먼지 속으로 추락할 때

너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는 그들에게 여전히 말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우리 모두를 위해.

 

네 사월의 잔해 속에 그리스도가 학살당하고

내 봄의 폐허 속에 그리스도가 눈물을 쏟는다.

그의 눈물의 돈이

너의 약하고 외로운 손으로 떨어지리라

그러면 너를 다시 사서 너의 땅으로 돌아오라.

그의 눈물의 침묵이 

종소리처럼 너의 낯선 무덤에 떨어지리라.

그 소리를 들으라, 그리고 오라그들이 너를 집으로 부른다.

 

 

/ 토마스 머튼 지음, 권혁일 옮김.

Thomas Merton(1915-1968), "For my Brother : Reported Missing in Action, 1943," in The Collected Poems of Thomas Merton (New York: New Directions, 1977),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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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영성 생활의 인도자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을 때도
    그 안개가 실은
    하나님의 임재 구름이라고 믿고 걸아가야겠습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11.14 07:08 신고


"어떤 이가 이집트에서 달아나 국경선을 벗어났는데, 유혹의 공격을 받아 겁에 질리게 되면, 그 때마다 인도자는 높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원수가 그를 추격하여 군대로 포위할 때마다 인도자는 바다를 변화시켜서 그가 건널 수 있도록 만든다.

 

이렇게 바다를 건널 때에 구름이 인도자로 섬겼다. 우리보다 앞선 이들은 구름을 성령의 은혜로 바르게 해석하였다. 성령은 합당한 이들을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Good)께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성령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 물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왜냐하면 그 인도자가 그를 위해 물 사이로 길을 내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 그는 '자유'로 안전하게 인도되어지며, 그를 속박하기 위해서 추격하던 이는 물속에서 파멸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c.335-395), The Life of Moses, bk. 2, ch.120-121. 



※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모세의 생애를 (1)빛에서 출발하여 (2)구름을 지나 (3)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적 여정으로 해석하였다. 위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죄된 삶(이집트)을 떠난 이후에 유혹(이집트군의 추격)을 받아 다시 죄의 속박에 빠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구름'을 통하여 바다를 건너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에서 구름(영적 황량함, 건조함, 침체 또는 불명확함 등)은 물리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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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 밤 - 십자가의 성 요한


    어둔 밤 

 

1.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불타 열망하며

좋아라, 순전한 은혜여

아무도 모르게 나왔다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2.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옷을 바꿔입고, 비밀계단을 오른다
좋아라, 순전한 은혜여

캄캄한 속에 꼭꼭 숨어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3. 행복한 밤에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은밀한 곳

빛도 없이 길잡이도 없이

나도 아무것도 보지 못 했다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빛밖엔


4. 그 빛이 나를

정오의 빛보다 더욱 확실히 인도한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5. 아, 나를 인도하는 밤이여

새벽보다 더 사랑스러운 밤이여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자를

한몸으로 묶어주는 밤이여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자를 변화시키고


6. 내 가슴의 꽃밭

오직 그분만을 지켜온 그곳

거기서 당신이 잠드셨을 때

나는 당신을 어루만지고

잣나무의 바람이 부채가 되고


7. 작은 탑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그분의 머리채를 만져드릴 때

부드러운 당신의 손으로

내 목에 상처를 내시니

나의 모든 감각은 끊어졌다


8. 망각 속에 나 자신을 남겨두고

사랑하는 그분께 내 얼굴 기대이니

모든 것이 멈추고, 나도 사라진다

백합화 떨기 속에

내 시름 버려두고 돌아선다


십자가의 성 요한 지음

권혁일 옮김

왼편의 작품은 16세기 스페인에 살았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Juan de la Cruze, 1542. 6. 24.- 1591. 12. 14.)의 "어둔 밤(The Dark Night)"라는 시이다.

이것은 연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 체험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은 그의 수도원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이들에 의해 납치 되어 어두운 감방에서 약 아홉달 동안 갇혀 지냈는데, 이 때 그가 경험한 고통과 은혜를 "어둔 밤"과 "영적 찬송 (Spiritual Canticle)"이라는 시에 담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 "어둔 밤"을 해설한 주석서가 바로 <갈멜의 산길>과 <어둔 밤>이라는 영성 고전 작품들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긴 두 권의 책들보다 이 시 한편이 '어둔 밤'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어둔 밤'은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모든 영적, 육적 욕망으로부터 정화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과의 연합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둔 밤을 주시고,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의 다른 욕망들이 어두워지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불타게 하신다. 우리의 삶이 어두워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고 삶의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품으며 기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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