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과 피식웃음

초콜릿과 피식 웃음


며칠 전 어떤 성도 한 분이 당 떨어지는 여름에 힘내시라고 초콜릿 한 통을 주고 가셨습니다. 당 떨어지는 여름을 걱정하는 마음이 작은 손 편지에 배어있었습니다.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힘들 때마다 하나씩 드시면서 ‘피식 웃음’ 지으라는 편지글에 미안하게도 ‘함박웃음’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크고 특별한 것을 주고 싶습니다. 특별한 시간, 특별한 이벤트, 특별한 선물을 주어야 사랑인 시대니까요. 그러나 사랑이 없다 싶어 서운했던 순간들을 돌이키면 대개 작은 순간들입니다. 작은 말 한 마디, 작은 눈빛 한 번, 작은 숨 한 호흡이 마음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한 것을 준비하는 노동같은 애씀보다 사랑하는 이에게 작은 순간을, 작은 눈빛을, 작은 숨을 보내고 싶습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향기로운 기억들은 대개 예기치 못한 작은 감동들이니까요. / 진정한 열망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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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

영성 생활/시 한 송이 2017.09.05 20:41

흐르는 강

 

자신의 몸매

지나왔던 길

꼭 가보고 싶은 곳 

집착않으니

끊임없이 흐른다


고이지 않고 

순간순간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자유다


오래된 오늘 임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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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 묵상 2 : 반복되는 충실함이 생명을 일군다.

병상묵상 2. 

반복되는 충실함이 생명을 일군다



    아버지는 모두 6번의 항암주사를 맞으셨다. 어떤 회 차에는 가려움증이, 어떤 회 차에는 부종이, 어떤 회 차에는 탈모와 극심한 통증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소화불량과 배변의 어려움은 계속되는 고통이었다. 처음에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식사를 하시고 힘을 냈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운이 빠지고 연약해지셨다. 일반적으로 항암주사를 맞고 나면 첫 주는 아주 힘들지만 둘째 주가 지나면서 회복되어 3주가 지나면 다시 항암을 맞을 정도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차수가 진행될수록 몸의 회복력이 저하되었다. 갈수록 입맛이 없으니 음식을 먹기도 힘들고, 소화가 잘 안 되니 음식도 맛이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항암주사를 맞은 후 병원에 가서 하는 정기점검에서 항암일정을 연기해야 할 수도 있는 위기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힘을 내셨다. 항암치료가 연기되면 투병은 길어질 것이기에 어떻게든 드시려고 애를 쓰셨다. 백혈구 수치가 기준에 미달되어 일정이 연기될 것 같은 때에도 그렇게 일주일 악착같이 드시고 움직이시고 애를 쓰시고 나면 입원 당일에는 수치가 정상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다. 어머니는 그런 과정을 통해 일주일이란 시간이 변화를 이루는데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하셨다.


    일주일이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끼니를 꾸준히 먹는 것이면 회복을 맛볼 수 있다. 암환자에게 음식을 먹는 일이 즐거울 리 없지만 그 힘든 일을 충실히 반복해 갈 때 생명의 기운이 몸에서 일어남을 경험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갈 때 생명이 일구어진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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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



새벽 4시. 어김없이 알람이 울리면 습관적으로 눈이 떠진다. 잠시 동안 잠자리에 누워 씨름하다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후다닥 옷을 입고 교회로 향한다. 교회에 도착하면 4시 15분. 두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난 말씀을 준비한다. 하루 동안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를 섭취하는 영의 식사 시간. 그런데 6시가 가까울수록 만나를 통한 기쁨을 뒤로 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마음 속 깊은 구석에서부터 꿈틀대기 시작한다. ‘오늘은 혹시 못 오시지 않을까? 오늘도 또 오실까?’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서 성도를 기다리는 한편의 마음과 성도가 안 오기를 바라는 또 한편의 마음이 치열하게 대립한다. 나의 기대를 비웃기나 하듯, 6시가 되면 한 영혼이 계단을 올라온다. 오늘도 늘 그렇게 어김없이 찾아온 한 사람의 성도. 


결국은 논문을 쓰지 못하는 나의 게으름에서부터 나오는 생각이다. ‘목사가 새벽예배 나오는 성도를 귀찮아하다니…….’ 하루 종일 마음이 영 죄스럽고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마음 한편으로는 여기저기서 충고랍시고 해 주었던 사람들의 음성이 뒤섞여 웅성거리는 듯하다. “논문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그 분께 양해를 구해야지! “주일날 출석하지 않는다면 결국 다른 교회 교인인데, 그 사람 때문에 논문을 못 마친다면 나중에 누구를 탓하겠나?” “자기 몸도 생각하고 돌보면서 목회를 장기간으로 보아야지.” 등등. 


박사과정 종합시험을 앞두고, 전임 목사님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의도치 않게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이 되었다. 목사님의 권유와 교회의 급박한 상황이 그 자리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작은 교회였지만 그중 다섯 명의 권사님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새벽예배를 지키시는 분들이셨다. 그 열심과 신앙을 알기에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매일같이 나와 새벽예배를 인도했다. 1년 쯤 뒤에는 교회 근처로 이사까지 했다. 하루하루가 바쁜 삶의 연속이었지만 공부를 하면서도, 이런 목회의 기회를 얻고 열심 낼 수 있다는 것이 흥에 겨웠다. 


3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무력감이 왔다. 몸의 여기저기에 문제가 생기고 건강의 악신호가 울렸다. 공부와 목회를 병행한다는 것, 늦둥이 딸마저 태어나 세 자녀를 둔 가장으로 산다는 것. 목회도, 공부도, 산다는 것 자체가 큰 짐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도는 늘지 않고 오히려 이사를 가시는 권사님, 병상에 누워 예배 참석이 어려우신 성도님들, 다섯 명이던 새벽예배 참석이 세 명으로, 세 명에서 두 명으로…….


그러다가 어느 날 한 낯선 집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회사에 나가시는 집사님인데 출석하시는 교회가 멀어 새벽예배는 우리 교회에 나오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시는구나!’ 그분을 생각하며 또다시 식은 열정을 되살렸다. 그런 기쁨도 잠시, 한두 명 나오시던 권사님들마저 새벽예배 출석이 어렵게 되었다. 80이 훨씬 넘으셨음에도 가장 열심히 기도하시던 권사님의 남편이 쓰러지셔서 새벽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권사님은 딸이 출산하여 아이를 봐 주느라 어렵단다. 그때부터 그 집사님과 나, 둘이서 한 사람은 설교자로, 한 사람은 성도로 새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렇게 둘이서 새벽예배를 드린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가끔씩 손녀를 보시던 권사님이 나오시기라도 하면 집사님 하시는 말씀이 “와, 오늘을 출석률이 두 배가 되었어요.”하며 기뻐하신다. 2년 여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시는 집사님을 보며 언젠가 우리 교회 출석하면 큰 일꾼이 되리라는 기대도 점점 사라지고, 정작 내가 담임하는 교회의 교인은 한 사람도 새벽예배에 참석하지 않게 되니 점점 마음속으로 불평이 쌓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오늘은 그분이 안 왔으면 좋겠다’라는 불손한(?)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교회에 도착해서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나타나는 집사님을 보면서 하나님께 회개를 드리고……. 이런 사이클이 몇 번 반복되었다. 마치 그 시간을 내가 마음대로 사용하면 써지지 않던 논문도 빨리 쓸 수 있을 것 같고 여기저기 일어나는 안 좋은 건강의 신호도 금방 회복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오니까 새벽예배 시간이 점점 고통스런 시간이 되어갔다. 


그날 새벽도 그런 모습으로 교회에 왔다. 사무실에 들어와 설교문을 프린트 해서 올라 가려는데 벽에 걸린 한 액자에 눈이 멈췄다. 그곳에 있은 지 한참 된 액자인데, 사실 걸려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내 취임예배 신문기사 스크랩이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목회!” ‘한 영혼’이라는 글귀가 갑자기 액자 전체보다 크게 튀어나와 보인다. 이 말은 내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존경하던 교수님이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요, 평생을 목회하시다 은퇴하신 어머니가 내게 늘 하던 말씀이요, 내가 교회의 담임이 되었을 때에 당연스레 가장 먼저 떠 올린 글귀다. 한 성도를 앞에 두고 갈등했던 나에게 하나님이 비춰주신 내 첫 마음의 기억! 언제까지일지, 혹은 평생이 된다 하더라도, 한 사람을 위해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고, 또 기도할 수 있는 그 시간이, 나에게 그 어떤 인생의 순간보다 더 순결하고, 빛나는 그런 감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한 영혼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일상에 빠져 시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처럼 느껴졌다. 


무릎 꿇어 기도하는 내 모습 위로 우뚝 서 있는 십자가가 그날은 무겁지 않고 가볍고 친근히 느껴졌다.  / 소리벼리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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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 묵상1.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다.


병상 묵상 1. 

함께 하는 것사랑이다.



     아버지가 몇 개월의 투병생활을 마치셨다. 아직 몸을 추슬러야 하는 과정이 남았지만, 두 종류의 암을 이겨내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가슴 벅차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워 이기신 것만이 아니라 투병과정을 통해 내게 많은 선물을 주셨다. 


     아버지가 혈액암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지난 12월은 가족 모두에게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었다. 여러 번 고향으로 가서 담당의와 상의하면서 6차례 이상의 항암치료를 본가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어려움은 아버지의 간병이었다. 항암치료는 3~4일의 입원이면 가능하지만, 항암을 마치고 돌아온 환자가 다시 항암할 때까지 돌보는 3주 정도의 기간을 어떻게 지내실지가 고민이었다. 건강도 좋지 않은 어머니가 간병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큰 짐이 되었다. 


     간병인도 구해보고, 요양병원도 알아보고서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암진단을 받고 치료에 대한 모든 것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아버지에게 “내가 비용과 간병을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마시라.”고 말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아프고 죄송했다. 나는 어머니를 염려해서 요양병원에 머물면서 항암치료를 해 가시길 권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집에 머물기를 원하셨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교착에 빠졌을 때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간병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아내로서 끝까지 주어진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당신이 더 아프게 된다 해도 충실한 아내로 살고 싶다 말씀하셨다.


     친구 목사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지낼 방을 정리하고 환자를 위한 침대를 들이고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모든 치료를 준비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 나는 아버지를 위해 수고했지만 결국은 내 집으로 떠나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구나.” 부종 때문에 걷기 어렵고, 통증으로 잠 못 이루고, 배변과 소화가 어려워 식사도 고통스럽고, 말할 힘조차 없던 시간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했다.


     지난 명절 고향에 내려갔을 때, 통증으로 아파하시는 아버지를 마사지 하다가 뼈밖에 남지않은 아버지의 어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전화로 말씀하신 ‘아버지가 많이 말랐다.’가 무엇인지를 나는 그 순간 몸으로 깨달았다. 나는 언어로 듣고, 나는 내 생각으로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숨으로 듣고, 어머니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함께 있는 자만이 아는 고통, 함께 사는 자만이 아는 지식이 어머니에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왜 하나님이 그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지 알았다. 왜 예수를 인간이 되시게 하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 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지를 조금 알 것 같다. 우리와 함께 하고 싶으신 것이다. 우리의 죄가 당신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지와 상관없이 함께 있고 싶으신 것이다. 우리의 의도와 생각과 선택의 순간들에 함께 있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네가 너와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은 놀랄만한 사랑의 고백이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함께 함보다 벗어남을 우선시한다. 고통을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함께 함이 고통 속에서 줄 수 있는 더 큰 사랑일지도 모른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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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립다

영성 생활/시 한 송이 2017.07.19 08:15

사람이 그립다




여름엔 낙동강을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집에서 좀 떨어진 어가골이란 곳에 가면

어린 내가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물이 제법 있었다


젖가슴 높이 보다 더 깊은 물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가슴에 안은 채

나는 그곳을 두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얕은 곳을 흐르다 깊어진 곳에 다다른 물은

소용돌이치며 보조개를 씨익 머금은 채 

조용히 웃음을 건네 오곤 하였다


깊어진 가슴 때문에 언제나 소용돌이가 있고

또 소용돌이 때문에 깊어진 가슴들이 있다

세차게 휘돌아 가슴을 뒤집어 놓는


싱긋, 

깊어진 웃음하나 건네 줄 수 있는

강물 같은 사람이 그립다.


오래된 오늘 임택동


사진 : http://www.ecn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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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아름다운 것들

Point Reyes By King of Hearts - Own work, CC BY-SA 4.0, Link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 해안을 따라 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포인트레이즈(Point Reyes)라는 곳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넓고 푸른 초지를 한참 동안 지나 차에서 내려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면 육지끝 바위에 예쁘장하게 서 있는 등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망망대해를 바라다보는 아담한 등대의 자태를 눈에 담노라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 십상입니다. 나아가 그곳 오른편에 펼쳐진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길게 뻗은 원시 해안을 보게 되면 그 광활함에 절로 입이 벌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갈 때마다 저의 시선을 가장 크게 사로잡는 광경은 등대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나무들의 자태입니다. 제법 큰 나무들이 더 이상 위로 자라지는 못하고 하나같이 왼쪽으로 치우쳐 눕다시피 하여 마치 나무동굴을 연상시키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불어대는 강한 북태평양 해풍의 위력에 나무들이 결국 옆으로 쓰러지다시피 몸을 기울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욕심을 부려 더 키를 높여 똑바로 서있고자 했다면 부는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뿌리째 뽑혔을 겁니다. 만일 이 나무들이 바람 잔잔한 곳에 삶의 터를 잡았다면 그 누구보다 곧은 몸으로 자신의 예쁜 몸매를 자랑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런데 몸이 비틀어지고 등이 활처럼 휘어져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무들은 그 어떤 나무들보다 더 아름답고 그들만의 고유한 자태로 저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마치 예술가의 치밀한 손길이 닿은 작품처럼 말입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는 것조차 어렵게 만드는 강한 바람, 그것도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불어대는 바람을 그 어느 나무인들 좋아하겠습니까? 그곳에 싹을 틔어 몸을 내밀어보니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대는 척박한 땅, 곧 녹록하지 않은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다른 나무들을 부러워하면서 주어진 생을 비관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온 몸으로 모진 바람을 감내하며 살았던 나날들. 이들의 수많은 일상의 날들이 오늘날 저의 두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잉태한 것입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반드시 철저한 조화와 균형, 티없는 깨끗함과 화려함만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원래 보고 느끼는 이의 눈과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보는 이가 아름답다고 느끼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든, 비뚤어지고 기울어져 있든, 매끈하든, 울퉁불퉁하든 그건 아름다운 것입니다. 



     몇 년 전 일입니다. 저의 둘째 딸이 어느 날부터 오른쪽 팔이 심하게 아프기 시작하여 진단에 진단을 거듭한 끝에 경추 6번 근처에 약 1센티미터 크기의 종양이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당장 조직 검사를 하려 했으나 그 종양이 너무 민감하고 어려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터라 수술에 위험이 따르고 또 양성일 가능성도 있으니 일단 좀 지켜보자는 병원측의 권고를 따라 약 2개월을 기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보낸 그 시간은 본인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 2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무척 힘들고 어려운 기간이었습니다. 


     통증 관리를 위해 신경차단 시술에 관한 얘기가 나올 무렵, 마침내 목 근처에 "ㄴ"자 모양의 40 센티미터 가량의 흉터를 수반하는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힘겹게 얻어낸 조직 검사의 결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병명인 유잉육종이라는 암으로 판명이 났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아내는 병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민감한 종양의 위치 때문에 칼을 대는 수술은 하지 못하였고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1년여간 하였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치료를 마치고 지금 4 년째 재발 없이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 종양이 팔로 내려가는 신경을 누르는 바람에 딸은 오른팔에 마치 불이 붙은 것과 같은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면서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매 30분 간격으로 통증의 정도를 딸에게 물어보아 기록하고, 하루에 몇 번씩 전화로 담당 의사와 통화를 하면서 진통제 양을 조절해 갔습니다. 하지만 강한 진통제인 몰핀 조차도 잘 듣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고통이 딸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 아이 곁에서 별다른 도움을 주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했던 날들을 기억할 때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딸의 신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수술 후 딸은 예상보다 큰 수술 자국에 엄청난 실망을 하였고 바깥에 외출 할 때는 흉터를 가려주는 옷을 입곤 했습니다. 가끔씩 집에서 울먹이며 애들이 자꾸 자기 목을 쳐다 본다고 얘기 할 때는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에 저도 가슴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외모에 온갖 신경을 쓰는 십대 여자아이로서는 견디기 쉽지않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도 가족도 그 상처를 보는 일에 익숙해 지기 시작하였고 다른 이들의 눈길도 점점 의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평상시 저는 그 상처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였고, 가끔씩 그 상처가 저의 눈에 들어올 때면 그것이 흉하기 보다는 오히려 꽃무늬처럼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저에게 그 상처는 사랑하는 딸의 인내와 용기의 징표입니다. 깊은 어두움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했던 순간들이 오롯이 새겨진 흔적이기도 합니다. 딸에게 수시로 건네주었던 격려와 희망, 하나님 사랑에 관한 말들이 담긴 전시물입니다. 고난의 정점에서 희미하기만 한 하나님의 손길을 찾고자 애썼던 영적 분투의 현장이 새겨진 기록물입니다. 그래서 비록 남들의 눈에는 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의 가슴과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흔적들 중의 하나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상처라는 말에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삶이 온 몸의 끔찍한 상처로 장식된 분이지요. 등에는 채찍으로, 손과 발에는 못으로, 옆구리에는 창으로, 그리고 이마에는 가시로 인한 상처들이 온 몸을 덮었습니다. 하지만 이 끔찍해 보일만한 상처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처들이 지극한 사랑과 자비의 이야기가 담겨진 흔적들이기 때문이지요. 일생을 통해 예수님의 삶을 단순하고도 철저히 본받고자 했던 아씨시의 프란시스코 성인은 훗날 자신의 몸에도 예수님과 유사한 상처(성흔, Stigmata)가 드러나는 기적적인 현상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예수님의 상처는 예수님을 닮는다는 표징임과 동시에 흠모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포인트레이즈에 있는 등 굽어지고 비틀어진 나무들이, 저의 딸의 몸에 있는 상처가 모든 사람들의 눈에 아름답게 보여질 리 만무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상처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아름답다라고 인정 받는 일은 사실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상처들을 지극한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 그것을 흠모하는 눈과 마음을 가진 이들은 분명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 오래된 오늘 임택동


* 이 글은 「소망말씀나눔」2017년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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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부른다

아름다움이 부른다


시인 박목월 선생님의 시 중에 「개안」(開眼)이라는 시가 있다.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신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는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신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지복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신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신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시인은 술에 취했던 것 같다. ‘새 술’(행 2:13)에. 그렇기에 저리 ‘방언’을 쏟아 놓았을 터다. 산문 일색 세계에서 시는 새로운 언어, 곧 방언이다. 시인은 꽃을 ‘불꽃’이라고 명명한다. 아니 호명(呼名)한다. 꽃은, 모든 꽃은, 실은 그냥 꽃이 아니라 ‘불꽃’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꽃’은 사실 ‘불꽃’이기 때문이다. 불인 꽃, 꽃인 불, 꽃불이기 때문이다. 


꽃은, 이 땅의 모든 꽃은 실은 다 불붙어 있다. 그래서다. 꽃을 정말 보게 된 사람은 꽃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 불에 놀라서다. 꽃에 붙어 있는 불.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떨기나무’에도 붙어 있는 그 불에 말이다.


그 불을 볼 수 있으려면 ‘눈이 열려야’한다. 시인은 ‘나이 60에 겨우’그 눈이 열렸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아니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보지 못하는’자였으면서 스스로 ‘본다’고 여겨왔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으니라”(요 9:41)


우리는 정말 ‘보는’자일까? ‘꽃을 꽃으로 볼’줄 아는 사람 말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볼 줄 아는 사람 말이다. 시인은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노래에 우리는 “아멘!”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고, 혹 우리는 조롱하는 사람은 아닌가? 대낮에 웬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느냐고 성령 받은 이들을 조롱했던 그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멈춰 세운다. 우리의 숨을 멎게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숨이 멎고 말문이 막힌다. 말을 잃어버린다. 할 말을 잃고 그저 보기만 하게 된다. 그렇게 ‘봄’을 찾는다. 


‘본다’는 것은 그렇게 가히 죽음(臨死) 체험이다. ‘신’을 만나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꽃을 보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있게’하시는 신을 만난다는 것이다. 신은, 모세가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 앞에서 만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분이시요, 또 만물을 ‘있게 하시는’분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출 10:28) 


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죽게 되는 것일까? 감히 용안(龍顔)을 올려다보았다고 해서 진노를 사서 죽게 되는 것일까? 성령 받은 시인이라면 달리 상상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죽게 되는 건,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운’얼굴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숨이 멎도록’아름다운 얼굴이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면 사람은 숨이 멎는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사(反射)하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도 그렇다. 너무 아름다운 것 앞에 서면 우리는 순간 숨이 멎고 만다. “헉!”우리는 신음소리를 낸다. “아...”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한다. 우리말 ‘아름답다’가 이미 ‘아리다’와 통하는 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온다. ‘그리움’때문이다. 그리움이 일깨워지기 때문이다.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일깨워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바다’, 하늘을 그리는 마음 말이다. 


사람은 본래 그 바다 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아름다움에 잠겨서, 아름다움을 마시며, 아름다움 속을 헤엄치며, 아름다움을 호흡하며, 아름다움을 살아내며, 그렇게 그 자신 하늘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도록 말이다. 


그래서 아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바다 바깥으로 나와 있고, 우리 영혼은 그 바다를, 하늘을 아리도록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리움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사람이란 안드로포스(anthropos), 즉 ‘위를 바라보는’(ano + throsko) 존재다. 하늘을 앙망하고, 영원을 동경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다시 사람이게 한다. 우리 안에 이 그리움을 일깨워줌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우리를 부른다. 자기 밖에 몰랐던 우리를, 세상 밖에 몰랐던 우리를 우리 자신 밖으로, 세상 밖으로 불러낸다. 하늘을 향해 불러낸다. 아름다움(to kalon)은 부름(kaleo)이다. 


이 부름을 듣자. 


“[모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4-5)


이종태




두란노바이블칼리지 영성학과 여름 특강

"예기치 못한 기쁨(C.S.루이스와 소망의 영성)"



일시 : 2017년 7월 3일 (월) 10:00-16:30

수강료 : 6만원 (6월 26일까지는 4만 5천원)



루이스의 많은 책들을 번역하고, 그의 영성을 전공한 산책길 이종태 연구원이 강의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웹사이트에서 확인하세요. (
http://www.duranno.com/biblecollege/view/seminar_detail.asp?smrnum=2192)




세미나소개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S.루이스는 기독교가 전하는 "소망의 이유"에 대해 변호했던 변증가이자, <나니아 연대기>같은 작품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속에 '하늘을 향한 그리움'을 일깨워준 영성문학 작가였습니다. 이번 특강은 루이스의 생애와 작품의 중심주제였던 '소망의 영성'에 대해 살펴보며, 영성과 인문이 만나는 자리로서의 '초월을 향한 갈망'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늘을 소망하는 마음이야말로 주님앞에서 이 땅을 힘있게 살아가게 해주고 

우리의 일상을 의미로 채워주는 영적 원천임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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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처럼

거룩한 상처

     사순절, 주님의 성흔을 묵상하는 때입니다. 

 

     성흔(stigmata)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말하지요. 예로부터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 성흔을 묵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예수의 상처까지도 닮기 원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stigmata)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말했고, 예수를 닮기를 추구했던 성 프란체스코(Fransis of Assisi: 1181-1226)는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베르나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몸에 오상(五傷)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실제로 육체에 성흔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두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고난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고백을 그들은 정말 급진적인 삶으로 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에 실제로 성흔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흔이나, 나의 성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성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흔(聖痕)



누가 풀잎을 자르는가

누가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을 칼로 찌르는가

누가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가


이슬의 피가 흐른다

이슬의 붉은 피가 풀잎을 적시고

하늘과 땅과 모든 인간을 적신다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으나

나는 내 상처가 성흔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이슬의 손에 못을 박았으므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으므로


-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80.



     시인은 성화 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거리나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려진 풀잎에서, 그리고 풀잎 위의 이슬에서 성흔을 봅니다. 나아가 이슬의 붉은 피가 하늘과 땅의 모든 인간을 적신다고 말합니다. 보통 민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신비하게 여겨져 온 해·달·별이 아니라, 또는 소나무나 백로처럼 지고하게 여겨져 온 동식물이 아니라, 하찮고 흔하게 여겨져 온 풀잎과 이슬에서 거룩한 상처와 붉은 피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서울의 예수〉(1982)에 나온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라는 표현을 생각나게 합니다.


     풀잎은 인간의 욕심에 훼손된 자연 세계일 수도 있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권력자들의 폭압에 짓밟힌 민초(民草)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은 이슬처럼 맑고 죄가 없으심에도 붉은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이슬처럼 연약한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가장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5:40, 45).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라는 3연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이처럼 시인은 소위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상처에서, 특히 풀잎과 같이 낮고 흔한 사람들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성흔을 봅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당신이 상처 입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사53:4), 인간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시인은 다른 이들의 상처는 성흔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상처는 성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는 1연에서 누가 풀잎을 자르고,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었는지 물었지요. 그런데 3연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 이슬의 손에 못을” 박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죽인 죄보다 주님의 사랑은 더욱 크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요(눅23:34). 그러므로 시인의 고백은 그의 신학적 이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연민에 빠지면, 다른 이들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에, 만약 우리가 성화나 영화 속의 그리스도의 상처만 보고, 세상의 풀잎들과 이슬들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제대로 묵상하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만 아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3년 전 고난 주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세월호는 이 사순절에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몸에 많은 상처들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마치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희망과 기쁨을 잃었던 이들의 상처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었던 모든 이들의 상처가 그리스도의 성흔, 거룩한 상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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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창구멍, 겨울의 숨구멍


창구멍, 겨울의 숨구멍

 

 

숨구멍이 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답답한 상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됨을 비유한 표현이지요. 요즘처럼 사회적으로 어려울 때뿐만이 아니라, 계절적으로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에는 문을 꼭꼭 닫아 놓고 지내기 때문에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갑갑한 상황 속에서 숨구멍이 트이게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나요?


숭실중학 재학 당시 윤동주(뒷줄 오른쪽), 문익환(뒷줄 가운데)

오는 216일은 윤동주 시인(1917-1945)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서러운 죽음을 맞이한 지 72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1230일은 우리에게 언제나 청년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윤동주 시인의 백 번째 생일입니다. 그는 서시십자가와 같은 잘 알려진 서정시 외에도 많은 동시를 지었는데요, 그 중에 창구멍이라는 작품을 함께 읽어 보고자 합니다.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고쳐 인용합니다.

 

   창구멍

 

   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구 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 해 비치웁니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혀끝으로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이 동시는 시인이 갓 스물이 된 1936년 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그는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배여 있습니다. 그리고 약 2년 후 윤동주는 이 시를 햇빛·바람이라는 제목으로 고쳐 썼는데, 여기에서는 아빠대신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이(화자)는 방안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입니다. 밖은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어서 아이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빠나 엄마는 엄동설한에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에 나가 나무를 파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존재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방안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 눈으로 부모와 같은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당시 윤동주가 다니던 숭실중학은 한겨울과 같은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193512월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집단적으로 거부하였는데, 이로 인해 1936120일 교장 조지 매퀸이 일제에 의해 파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학교에 모여 교장을 내놓으라고 외치며 데모를 하였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학교는 강제로 무기휴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창구멍의 배경이 된 겨울 날씨와 아빠의 부재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주목해 볼 것은 창구멍의 역할입니다. 추운 날씨에 방안에 갇혀 있는 아이는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또는 혀끝으로 작은 구멍을 뚫어 바깥세상을 내다봅니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서 바깥으로부터 아롱아롱 아침 해가 비쳐오고, “살랑살랑 찬바람이 찾아옵니다. , 작은 창구멍은 바깥세상과의 소통의 통로입니다.


<창구멍> 육필원고. 윤동주 자필시고전집(민음사)에서.


아침 햇살과 찬바람은 홀로 있는 외로운 아이를 위로하고,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는 벗들입니다. 시인이 194012월에 쓴 병원이라는 시에는 병든 젊은 여자에게 나비 한 마리도” “바람조차도 찾아오지 않는 훨씬 더 암울하고 답답한 상황이 나오지만, 그래도 창구멍에서는 아침 해가 아롱아롱 비쳐오고, 바람이 살랑살랑 찾아옵니다. 비록 아빠엄마는 함께 없지만, 창조주는 자연을 통해 어린 아이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시인은 혹독한 겨울과 같이 춥고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이렇게 일상적인 자연 현상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시 속의 아이가 절망과 우울함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창구멍을 뚫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가 바깥세상을 내다 볼 수도, 햇볕과 바람이 그에게 찾아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작은 창구멍은 그가 노트에 써놓은 시들입니다. 실제로 시인이 19363월부터 사용한 그의 두 번째 시작노트의 표지에는 ()”이라는 제목이 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첫 번째 시작 노트의 목차에서 창구멍의 제목 옆에다 동요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육필 원고를 보면 한 행의 글자 수를 4·3·5음절로 맞추어서 4음보가 반복되는 노래로 만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부탁해서 이 시에다 곡조를 붙여 보았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바람이 매서운 겨울이지만, 윤동주의 동요 창구멍을 부를 때, 여러분들의 삶에 작은 숨구멍 하나 트이길 기도하면서요. / 권혁일



Magazine Hub 46 (2017년 2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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