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전도단' - "백 투 더 클래식 편" 다시 듣기

백투더클래식 2016.08.22 16:38

CTS와 도서출판 예수전도단에서 만드는 <독서전도단>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백투더클래식》을 다루었습니다(2016년 4월 14일). 재미있고 알찬 내용이었습니다. 방송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유투브에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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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더클래식 서문 :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

백투더클래식 2015.07.06 19:48

《백 투 더 클래식: 영성 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이 책은 말 그대로 '공동의 열매'이다. 글의 착상 단계부터 원고를 완성하기까지 아홉 명의 필자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주로 '구글 문서(google docs)'라는 온라인 공간에서 협업이 이루어졌지만, 필요하면 전화 통화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의 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모두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으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2년 동안은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영적 여정을 함께 걸었다. 저자 중 한 분의 표현대로,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

책에 실린 편집자 서문을 아래에 옮겨 놓는다. (이 서문은 온라인 서점의 '미리보기' 메뉴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인쇄된 책에서는 의도치 않게 원고에 있던 각주 두 개가 빠졌는데 아래에는 다시 달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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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날씨로 비유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의 모래바람에 상상력과 경이가 메말라가는 건조한 날씨가 아닐까? 마치 현대 도시에서 동물들은 주위에서 사라져가고 동물원 우리 속에 격리되는 것처럼, 오늘날 상상력은 《해리 포터(Harry Potter)》와 같은 판타지 소설이나 〈겨울왕국(Frozen)〉과 같은 애니메이션과 영화, 드라마 속에 가두어져 버린 듯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아이들도 ‘공주 드레스’나 ‘파워레인저 가면’을 벗을 나이가 되면, ‘유치한’ 상상력도 함께 벗어 버리고 과학적 사고라는 안경을 낀 건조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은 그 현존이 점점 엷게 인식되어지고, 대신 이해하기 힘든 교리를 통해 이론적으로나 접할 수 있는 분으로 제한되어 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 영성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이성주의 시대에 저항하는 ‘불경한’ 그러나 용기 있는 행동이다. 

     저명한 영성학자 아서 홀더(Arthur G. Holder)에 의하면 ‘영성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러 세대의 독자들의 삶에 깊은 변화를 일으킨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글”이다.[각주:1] 가장 1차적인 기독교 영성 고전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서이다. 그런데 성서는 굳이 영성 고전으로 분류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에 일반적으로 기독교 영성 고전이라고 할 때에는 성서 시대 이후 기록되어 지금까지 널리 사랑받으며 꾸준히 읽히는 작품들을 말한다. 물론 어떤 특정한 텍스트가 영성 고전의 범주에 들어가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가 있다. 하지만 보통 이 범주에 포함되는 글들은 저자들이 삶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영적 진리와 경험을 담고 있다. 그래서 독자가 글을 통해 저자들이 전하는 지혜와 경험에 접촉하게 되면, 그것들은 더 이상 종이 위의 문자로 존재하지 않고 독자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경험으로 살아난다. 마치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새벽 출정호의 항해》 에서 에드먼드와 루시가 벽에 걸린 바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 액자에서 바닷물이 쏟아져 나와 조그만 방이 나니아의 세계로 변하는 것처럼, 영성 고전에 담긴 지혜와 경험은 독자의 현실로 쏟아져 나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나님의 신비로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이처럼 영성 고전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현재적인 영적 경험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기도 하고, 또한 과거와 미래의 영적 경험을 해석하는 데에 유용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항상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주목받는 일본의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佐々木中)는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내면에서는 변화에 저항하는 “방어기제”가 자연스럽게 작동하여 독자로 하여금 책이 어렵고 무료하다고 느끼게 하거나 감동받은 내용도 쉽게 잊게 만든다고 지적한다.[각주:2] 특히 대부분의 영성 고전 작품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시대와 장소와 문화 속에서 다른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기에 “방어기제”가 작동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 책의 필자들은 기독교 영성학(Christian Spirituality)을 전공하며 읽고 배운 고전 작품들을 한국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2012년부터 팀블로그(spirituality.co.kr)를 중심으로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을 시작하였다. ‘산 책(living books)’을 ‘길’로 삼아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자는 의미이다. 아직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학위 과정 중에 있는 학생의 신분이라 여러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블루아의 피터(Peter of Blois, c.1130–c.1203)의 말처럼 독자들과 함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이 되어 비록 “우리의 소견은 일천(日淺)할지라도, 영적 거장들의 어깨 위에 선 덕분에 우리는 그분들보다 더 높은 식견을 가지고, 바른 신앙의 길을 전망할 수 있게”[각주:3] 되기를 바라며 부족한 글들을 독자들 앞에 내어 놓는다. 

     이 책의 아홉 명의 필자들은 고전 작품과 저자를 선정할 때에 가능한 한 다양한 시대와 전통을 아우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많지는 않지만 여성 신비가들과 한국 저자들, 평신도들의 작품들도 포함함으로써 ‘서구’, ‘남성’, ‘성직자’들의 작품에 경도되지 않고 영성 고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여기에 실린 스물세 편의 에세이들은 2013년과 2014년에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상황》의 ‘백투더클래식’이라는 꼭지에 연재된 글들이다. 원래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고전 작품과 현대의 이슈 사이에 가교를 놓는 것이며, 또한 시사 주제를 다루는 월간지의 특성상 이 책에 실린 글들에는 잡지에 게재될 당시 유행한 영화, 게임, TV 프로그램, 또는 사회적 이슈 등에 대한 언급들이 의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이 이 에세이들을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건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고전의 본질적인 특징, 곧 시간을 초월하는 항구성과 장소를 넘어서는 보편성 때문이다. 영성 고전에서 얻은 지혜로 현대의 교회와 사회를 진단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글들은 독자들에게 이 책에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현대 이슈들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독자들의 형편이 되는대로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을 교회나 공동체의 소그룹 멤버들과 함께 읽고 토론한다면,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복음과상황》에 게재된 글에서 제목과 잘못된 정보들을 일부 수정한 것들이다. 그리고 글의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묶고 순서를 새롭게 배열하였다. 먼저 제1부 “신비와 경이”에서는 온 우주는 물론 우리의 일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비’ 또는 ‘경이(wonder)’와의 만남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신비’라고 하면 비현실적이고 미신적인 어떤 기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글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 때로는 육체적인 관계 속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 자체가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끊임없이 여행하는 신비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신랑으로, 어머니로, 또는 연인으로 경험되기도 하는데 이 경험의 중심에는 믿음과 사랑이 놓여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비와의 접촉점이며, 사랑만큼 놀라운 신비가 없다. 이 신비를 알기 위해서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면학심, 곧 “별을 노래하는 마음”[각주:4]을 품어야 하며, 우리의 영적 감각이 훈련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제2부 “훈련과 형성”에서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영성은 무엇이며, 그러한 영성으로 형성되기 위한 영적 훈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에 대한 대답들을 모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소비주의 사회의 뿌리에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존재한다. 욕망은 거짓 자아의 가면을 만들기도 하고, “강철 우리”와 같은 사회구조, 의식, 습관을 만들기도 해서 그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생각과 삶을 구속한다. 변화는 “자기 사랑의 우리”로부터 벗어나는 “진정한 회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의존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사막’으로 떠나는 급진적인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성자 프란치스코는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고상한 욕망을 가졌던 그의 발자취는 우리를 청빈과 섬김의 삶으로 초청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영적 규칙을 공유하는 공동체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때로는 타락한 제도권 교회 밖에서 길을 찾은 이들도 있지만, 이들 옆에는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3부 “이웃과 정의”에서는 영성의 사회적 측면과 관련된 글들을 모았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영성이 한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초월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오해가 편만하다. 그러나 영성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에 동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공공의 부를 공평하게 나눠가지지 않고, 다른 이들이 가난으로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방치한다면 도적질과 살인을 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교클럽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구원의 복된 소식은 소유와 배움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이들에게 흘러가야 한다. ‘순수 기독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불의에 분노해야 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도록 분투한 예언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의 희생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비리디타스(viriditas)”, 곧 만물에 깃든 생명력을 통해 인간 사회는 물론 자연 생태계가 회복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돌아보면 이 책은 〈산책길〉 팀블로그에 게재된 이종태 목사님의 “큐리오시티”라는 글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을 《복음과상황》의 옥명호 편집장님이 읽고, 신생 단체인 〈산책길〉에게 소중한 잡지의 지면을 내어 주셨다. 지난 2년 동안 원고를 깔끔하게 편집해서 인쇄해 주신 《복음과상황》 편집부 식구들께 필자들의 마음을 모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어려운 기독교 출판 여건 속에서도 무명의 필자들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어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신 도서출판 예수전도단과 홍지욱 팀장님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학당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팀블로그 댓글과 SNS 등을 통해서 응원해주신 독자들은 이 책의 숨의 공로자들이며 〈산책길〉의 소중한 길벗들이다. 독자들께서 책을 읽다가 발견하는 부족한 부분들을 일깨워 주신다면, 다음 글을 위한 귀중한 밑거름으로 삼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들이 바쁜 학업과 목회 가운데서도 〈산책길〉 활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고, 나아가 글을 챙겨 읽고 조언해 주신 필자들의 아내들께도 진심 어린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2015년 5월

저자들을 대신하여

권혁일


백투더 클래식 Back to the Classics

저자
권혁일 지음
출판사
예수전도단 | 2015-06-29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기독교 영성 고전(Christian spiritual class...
가격비교


  1. Arthur Holder, ed., Christian Spirituality: The Classics (New York: Routledge, 2010), xiv. [본문으로]
  2.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서울: 자음과 모음, 2012), 40. [본문으로]
  3. 남기정, 책 139-140쪽. [본문으로]
  4. 이종태, 책 2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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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을 넘어서 긍휼로: 안토니우스의 생애

백투더클래식 2014.09.01 18:01

공감을 넘어서 긍휼로:

안토니우스의 생애 


고통하는 이웃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미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내 강철 같은 신경이 싫고 창피스럽다. 그러나 미치기 위한 노력도 안 하고 어떻게 맑은 정신으로 긴긴 하루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스물여섯 살의 젊은 의사였던 아들을 잃고서 자신의 피 끓는 심경을 토해놓은 소설가 고 박완서의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의 한 구절이다. 참척을 당한 어미의 깊고도 깊은 절망과 좌절감이 그대로 뼛속 깊이 전해져 올 때는 필자의 둘째 딸이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두 번째 골수이식을 마칠 즈음이었다. 이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해서” 딸에게 고통을 주셨다는 말이었다. 위로 차원에서 던져진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로보다는 오히려 기분이 언짢아짐을 경험했다. 더 큰(?) 신앙의 인물로 쓰시기 위해 자식을 오 년이 넘도록 죽음의 그림자 아래에서 눈물과 가슴 졸임으로 지내게 하신다는 하나님을 믿고 싶지도, 또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실까?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크게’ 쓰이지 않아도 좋으니, 사랑하는 딸이 죽음의 늪에서 하루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세월호 사건을 통해 참척을 당한 유족들의 눈물과 절규가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내게 다가와 일상의 삶이 완전히 정지될 정도였다. 그즈음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강단에서 “하나님이 공연히 [세월호를]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니다.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설교한 것을 들었을 때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이와 유사한 발언들이 공공연히 한국교회에서 회자되었던 것을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신정론이란 신학의 이해의 폭을 제쳐두고서라도, 박완서가 “주변 사람들의 아무리 사려 깊은 위로일지라도 그것이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라고 토로할 만큼 극한의 고통과 좌절감 속에 있는 부모의 심정에 조금이라도 공감을 했다면 이런 설교와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신음하는 이웃들의 고통을 공감하기 전 졸렬한 신학이 먼저 그들에게 손을 내 민 것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잡아 먹어버려 공감능력이 상실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 강단에서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예수의 타자를 향한 사랑의 정신은 실존적으로 거부를 당한 것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이 《삶과 거룩함(Life and Holiness)》이란 책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대목이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공감(empathy)’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주장이나 감정 그리고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고통과 필요에 대하여 견지해야 할 신앙의 태도가 단지 공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공감과 더불어 긍휼(compassion)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


안토니우스의 긍휼의 삶

   긍휼이란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서 출발해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심지어 이웃을 위하여 스스로 위험까지 감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긍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서 긍휼이 시작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됨으로써 마음이 요동하고, 마침내 그들을 도와줄 방도를 찾아 움직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긍휼은 단순히 인식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공감과는 구분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신앙의 영웅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감(imitatio Christi)’이란 덕 안에서 긍휼의 삶을 살았음을 보게 된다. 수도자들의 아버지라고도 일컬음을 받으며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ca.251-ca.356)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수도생활을 위해 이웃들을 등지고 사막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사회와 단절되지 않았고 긍휼이 넘치는 삶을 살았음을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가 기록한 책 《안토니우스의 생애(The Life of Antony)》가 증거 해주고 있다. 그 한 예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그들[각주:1]은 안토니우스에게 자신들을 방문해 줄 것을 간청하면서, 단지 그를 보기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그 부탁을 거절하면서 그들에게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매달렸고 심지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산에서 내려오게 하려고 군대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탄식과 필요를 보게 되자 안토니우스의 마음은 요동했고 마침내 그는 산에서 내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안토니우스의 애씀은 무위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당도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과 혜택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 《안토니우스의 생애》, 84장

     안토니우스의 초미의 관심은 금욕 생활을 통한 영성 훈련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웃들의 필요와 슬픔 앞에서는 자신을 위한 그 굳은 갈망도 눈 녹듯 녹아내렸다.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안토니우스의 수행은 영적인 엑스터시(ecstasy) 체험이나 사막의 수실(壽室)과 수도공동체에서만 인정받고 통용되는 갇혀버린 창백한 영성이 아니라, 이웃의 눈물 앞에서 마음이 요동하며 자기 신앙의 어젠다(agenda)를 내려놓게 되는 열리고 살아있는 영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비록 수행의 삶을 위하여 사람들을 피해서 거처를 옮겨 다니며 홍해 인근 깊은 광야로 들어갔지만, 그 후에도 안토니우스는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찾아 그를 만나러 왔고 또 자신도 간혹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의 수행의 삶이 얼마나 이웃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지는 그의 초기 수행의 삶을 묘사한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또래 사람들에 대하여서 경쟁적이지는 않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도덕함양에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했던 연유는 다른 사람들 아무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그로 인해 기쁨을 누리게끔 하려는 데 있었다. 

- 《안토니우스의 생애》 4장.

     사실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한 책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안토니우스의 이웃을 향한 긍휼의 삶에 주된 초점을 둔 책은 아니다. 당시 기독교 내부에서 가장 큰 쟁점의 대상이었던 아리우스파에 대한 견제 및 대항적 요소가 곳곳에 배어있고, 또 안토니우스의 삶에 대한 소개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전형 및 수도자들의 본을 제시하려는 데 중점을 두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후일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인물의 영성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책 안에는 금욕적 삶을 기반으로 기도에 매진하는 일, 영을 분별하며 사탄을 대적하는 일,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필요와 고충을 해소시켜 눈물을 닦아주는 일 중에서 어느 편이 더 영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일인지 전혀 구분하지 않는다. 고 권정생 선생은 이렇게 얘기한다.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만들어도, 인간에게 따뜻한 정(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박사학위를 받아도, 이런 소박하고 지극히 작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서울: 녹색평론사, 2008), 20).



공감을 넘어서

     큰 교회를 목회한다고 해서, 신학지식이 많이 축적되어 있다고 해서, 영성 훈련을 몇 가지 알고 받았다고 해서, 영성 관련 책자들을 접하여 새로운 지식이 생겼다고 해서 이웃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긍휼이 없어도 크게 문제시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긍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예수의 길이 바로 다름 아닌 긍휼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적인 영적 활동들 중의 하나인 기도의 삶과 긍휼의 삶의 연관성을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기도가 우리를 긍휼 어린 그리스도와의 좀 더 깊은 연합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항상 구체적인 섬김의 행위를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 고통을 만난다. 섬김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 안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 《긍휼(Compassion)》(서울: IVP, 2002), 188.   

지난 세월호 사태를 겪으며, 이웃의 고통에 공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또 한 번 우리나라 교회가 수모를 당하였다. 이웃에게 공감할 줄 아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절실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감의 언덕을 넘어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긍휼이야말로 성육신과 십자가란 예수의 길이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다. 기도하는 일, 목회하는 일과 이웃의 눈물을 공감하며 도움의 발걸음을 내딛는 긍휼의 길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 특히 목회자는 긍휼의 사람이어야 한다. 긍휼의 사람은 참척을 당하여 눈물 흘리는 이웃에게 소위 하나님의 섭리를 설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눈물을 훔치며 손수건 한 장이라도 건네는 사람일 것이다.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 소개되고 있는 안토니우스, 그는 예수의 길, 긍휼의 길을 옹골차게 살아내었다.

그(안토니우스)는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던지 마치 그가 제 삼자가 아닌 피해 당자자쪽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안토니우스의 생애》, 87장.


임택동은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과정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신앙과 영성이 발휘되고 또 표현되어지는 것(lived religion)에 성경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4년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재판관들을 가리킨다. 당시 안토니우스를 찾는 많은 방문객들이 있었고, 이들 때문에 사실 그는 자신의 수행 생활에 지장을 받으면서도 산 바깥으로 이끌려 나가곤 했다. 그런데 심지어 재판관들까지도 안토니우스에게 그런 요청을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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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백투더클래식 2014.03.04 03:52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생의 절정의 순간이 있다.” 테이블 위에 얹힌 진분홍 장미꽃의 도드라진 자태는 마치 이런 말을 건네 오는 듯하다. 도시의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숨 가쁜 발자국 소리들은 아마도 그런 절정을 꿈꾸며 모이고 또 모였으리라. 많은 도시인들의 가슴에는 더 많은 소유와 축적은 생을 빛나게 해준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듯하다. 이 글귀의 끝자락에 도종환의 시 한 구절은 의문부호를 하나 붙여 놓는다.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도종환, ‘단풍 드는 날일부.

 



떠나온 사람들


        버림과 떠남으로 생의 절정을 향해간 사람들이 있었다. 주후 3-6세기경,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비옥한 생활 터전을 버리고 훌쩍 떠나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구현하고픈 열망으로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와 이야기들을 모아서 담아 놓은 책이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The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이다.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숭앙했던 스승들의 금언들과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보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의 모태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각 금언들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와 상황 가운데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주어진 교훈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교훈들이 약 천오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사막의 남녀 수도자들은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사막 수도자의 원조 격인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ca251-356)는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1)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듣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토니우스의 뒤를 이어 사막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다른 사람들의 귓가에도 울렸다.


        이들의 떠남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의 자리는 정상적이지 않고 현재의 삶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이 그들을 움직였다. 그들 당시 기독교회는 사막화 과정 가운데 있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고 황제까지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권력과 재물의 위력 앞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전에 만연했던 혹독한 핍박과 순교는 사람들에게 한 주인을 섬기도록 신앙의 절대성을 요구하였지만, 신앙생활이 자유로워진 이후에는 오히려 신앙이 삶의 한 조각으로 전락하면서 영적 긴장감과 절박함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지만 이처럼 교회가 사막같이 메말라져만 갔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워 올린 사람들이 바로 사막의 수도자들이었다이들이 삶의 터전을 떠난 것은 그들 나름의 보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보화는 세상 가치관을 확실히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압바 히페레키오스가 말했다. “수도자의 보물은 자발적인 가난이다. 형제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자. 안식의 시간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120.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살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영적인 절박함이 이처럼 포기와 가난의 삶으로 떠나게 했다. 떠남은 말 그대로 문제점들의 나열이나 예리한 분석이 아니라, 실제로 발걸음을 옮기는 결기 있는 행동이다. 간절한 염원이 스며있어야만 일어나는 삶의 양태인 것이다. 간절한 염원은 수도자적 삶을 낳았고, 수도자적 삶은 사막의 꽃, 즉 하나님의 향기 나는 사람들을 잉태했다.

 


사막에 핀 꽃


        사막은 메마르지만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강같이 흐르는 곳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불꽃 속에서 또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과 강렬한 대면을 가졌던 곳이 광야였다. 세례 요한이 외친 곳도 광야였고,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사탄의 시험을 받은 곳도 광야였으며, 바울 역시 회심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는데 그것도 광야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 체험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여정(고전 10:11)의 한 형태라고 가르친다. 이들 모두가 사막에서 하나님을 만나 부대끼며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었고, 때로는 사탄과 처절한 싸움을 하면서 형성되고 꽃을 피웠다. 사막의 수도자들 역시 그와 같은 전통을 이은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막에서의 하루하루는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기 위한 열망으로 채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적 필요를 줄여나가는 고행과 침묵, 규칙적인 기도와 자신을 성찰하는 삶에 투신하였다. 이 모든 훈련에는 절제와 분별이 밑받침 되었다.

 

한 원로가 오이가 좀 먹고 싶었다. 그는 오이를 가져다가 그걸 눈앞에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욕망에 지진 않았으나, 스스로 벌주면서 그 욕망을 뉘우쳤던 것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79.

  

      수도자들은 세상을 떠나옴으로써 상대적으로 외부의 유혹에서 자유로웠지만,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절제하며, 깨어 분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제는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그 유혹에 흔들리는 내면의 욕망이었다. 그들은 항상 속사람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 앞에서 생활한다는 경각심을 지닌 채, 삶의 모든 조각들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기를 원했다사막은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기가 어렵고, 생명이 있는 존재는 항상 존립 자체를 위협받으며 살아야 하는 곳이다. 생명보다는 죽음이 더 친근한 곳이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안팎의 연약함 때문에 거룩한 삶을 단 하루라도 지탱해 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했던 곳이 바로 사막이었다. 수도자들은 물과 빵이 아닌 겸손으로 살아야 함을 체득해야만 했다.

 

복된 신클레티케가 말했다. “쐐기가 없으면 배의 나사를 조이는 것이 불가능하듯, 겸손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302.

 

        유혹을 이기기 위해 수도자들은 사막에서 겸손과 자비와 인내라는 꽃들을 피워나갔다. 사막은 아프지만 치료를 제공해 주었고, 고통스러웠지만 행복을 던져다 주었다.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그들이 평생 걸쳐왔던 옷가지들을 벗기기에 충분하였다. 감정과 지식에 치우친 껍데기와도 같은 하나님과의 피상적인 만남은 이글거리는 햇볕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져 내렸다. 뜨거운 숨결을 지니신 하나님과의 대면은 영혼의 가식적인 껍데기를 완전히 벗겨 버렸다. 땅속에 깊이 박힌 단단한 바윗돌처럼 확고하게 안다고 믿어왔던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했다밤하늘이 쏟아놓은 뭇 별들보다 많은 분심들과 유혹들이 자신들의 호흡 속에 깃들어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고, 또 이것들을 부추기는 사탄의 위협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자신이 얼마나 목이 뻣뻣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현존과 천상의 은혜를 향한 갈망과 회개의 삶은 더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원로가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를 어디든 달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눈물과 애통이 뒤따라야 한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61.

 

애통함과 눈물 속에 그들은 다듬어져 갔다. 사막은 이처럼 표면적인 나가 아닌 근원적인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궁극의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겸손과 환대, 자비와 인내가 싹터 나오면서 사막 곳곳에 꽃이 만발하였다. 이 같은 생생한 체험들이 깊어져 사막에 영적인 스승(Abba, Amma)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의 말 한 마디는 타들어가는 제자들의 목을 시원하게 적셔 주었다. 그리고 도시에 있는 사람들, 왕과 법관들도 그 지혜를 듣기 위해 사막으로 찾아 왔다. 결국 나일강의 넘쳐나는 물이 사람들의 타는 가슴을 해갈시켜 준 것이 아니라, 건조한 바람이 가득한 사막이 사람들과 도시에 생명수를 공급해주었다.



 

절정에 서는 떠남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개신교에 대한 진단과 비판이 어느 때보다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면면이 살펴보면 한결같이 교회 토양이 점점 불모지가 되어간다는 내용이다. 생명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증상이 만연하다는 암울한 진단이다. 사막화가 먼 나라 몽골에서만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막화되어가는 한국 교회에 생명수가 절실하다. 생명수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신앙을 무너뜨리는 세력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 저항은 과거 교회의 사막화에 저항하여 사막으로 떠났던 수도자들처럼 우리의 사막을 찾아 떠나는 결기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권력과 성공과 명예와 부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한국 교회는 지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는 새 땅을 밟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남으로써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한국 교회의 황폐화는 완연하다. 하지만 만약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그리고 공동체의 사막을 찾아 떠난다면, 그래서 그들이 과거 이집트 사막이 수도자들로 도시를 이루었던것처럼 많아진다면, 한국 교회는 떠남을 통해 피어나는 새로운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의 지금 이 자리는 어떤 곳인가? 지금 이 자리를 저항하며 사막을 향한 떠남이 있었던가? 나의 사막은 어디이고 무엇일까? 일상에서 나는 무슨 꽃들을 피워내고 있나? 우리야 말로 바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사막의 독방(cell)에 거하며 이런 질문들과 씨름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수도자들이 스승에게 찾아와서 절박한 심정으로 외쳤던 말,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그러면 우리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건져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한 원로가 말했다. “말만 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말이 많다. 행동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닌 까닭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200.

 

임택동은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과정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신앙과 영성이 발휘되고 또 표현되어지는 것(lived religion)에 성경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4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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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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