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에 있어 진지함을 견지한다면 이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이러한 참된 신앙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1703년 10월 5일 미국 코네티컷주 이스트 윈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목회자였지만, 그의 외조부인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목사는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였다. 에드워즈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회심을 경험했는데, 이것이 그가 신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적으로도 매우 총명해서 불과 13세에 당시 새롭게 문을 연 지역 대학(현 예일대학)에 입학해 그곳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그는 존 로크의 사상과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졸업 후 에드워즈는 외조부가 목회하는 매사추세츠 주 노스햄턴 소재 회중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했으며, 외조부가 사망한 1729년에는 그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부흥을 목격했다. 먼저 그가 목회하던 곳에서 사람들이 악습을 개선하고 청년들이 회심하면서 교회가 부흥했다. 그리고 부흥의 불길은 인근으로 번져서, 1734년에는 코네티컷에서도 부흥이 일어났다. 더 나아가 1740년에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가 부흥의 불길에 휩싸였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부흥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신앙 감정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저서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은 그러한 그의 경험과 탐구에서 나온 설교들을 모은 책이다. 



부흥의 시대와 분별의 필요성

    에드워즈는 부흥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에 거짓된 신앙도 함께 성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감정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신앙 감정을 인간이 가진 이성의 능력과 결부시키려 노력했고, 이러한 결합을 통해 성령 체험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한 방법들을 탐구했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 주는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미덕과 거룩함을 구별해 주는 표지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제1부는 감정의 본질과 중요성을 다룬다. 이어서 제2부는 신앙 감정과 관련하여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판단근거가 될 수 없는 열두 가지 표지들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제3부는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을 구별하고 보여주는 확실한 열두 가지 표지들을 다루고 있다. 이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비춰보자. 오늘날 우리는 ‘영성’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요한 덕목으로 많이 회자되고 있는 때를 살고 있다. 바야흐로 ‘영성이라는 말’이 부흥하고 있는 때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참된 신앙’을 분별하려고 노력했듯이, 지금은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분별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의 참된 신앙에 대한 가르침은 여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거룩한 감정

    에드워즈에게 있어 중요한 신학적 명제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147)이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요약하면,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 안에 ‘지성’(understanding)과 ‘성향’(inclination)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주셨다고 이해했다. ‘지성’은 인간이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말하며, ‘성향’은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같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기능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향’이 ‘행동’과 관련되면 ‘의지’(will)가 되고, ‘정신’(mind)과 관련되면 ‘마음’(heart)이 된다. 그리고 ‘마음’이 뚜렷하게 움직일 때 이를 ‘감정’(affections)이라고 부른다.(149) 


    그렇다면 이 감정이 왜 그리 중요할까?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신앙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행동의 근원이 바로 감정이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은 이 감정 안에 존재해야 한다. 그는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속한 일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에 생생하고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곧,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은 믿음에 관한 일이 감정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의 믿음은 이러한 거룩한 감정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가 “대체로”라고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모든 감정을 긍정하거나 반대로 부정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배제하였다. 대신 그는 감정들을 잘 구별하여, 그 중에 참된 감정을 삶에서 실천으로 나타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신앙 감정을 분별하는 판단근거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 자신이 경험한 부흥운동을 통해 거룩한 감정을 구별하는 표지들(signs)을 제시하였다.



거룩한 실천 : 표지 중의 표지

    이 짧은 글 안에 에드워즈가 말한 모든 표지들을 모두 다룰 수 없기에, 필자는 그 중에 마지막 항목인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에드워즈는 앞선 열한 가지 표지들을 실천의 개념으로 재조명하면서, 그 모든 것들이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다른 모든 표지들을 검증하는 최후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표지 중의 표지요, 최고의 표지이다. 그는 실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거룩한 삶은 참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은혜의 크고 확실한 표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거룩한 삶은 은혜의 모든 표지 가운데 최상의 표지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567) 


    에드워즈는 부흥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체험을 통해 변화를 보인 후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실천의 지속성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실천이 지속되어 질 때 우리는 그 마음의 동기를 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직접 보시지만, 사람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실천의 내용이 동기와 함께 연결되어있어야, 참된 은혜와 참된 신앙을 거짓된 것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어떤 사람이 단순히 실천을 했다고 해서 그의 내적인 동기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실천이 내면의 성향을 모두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으로 볼 수 없다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그는 몸의 행동과 영혼의 행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의 신앙이 참된지 아닌지를 분별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실천을 볼 수밖에 없다. 

    또한, 그는 당시 신앙인의 영적인 상태를 내적인 체험만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한 체험이라고 주장하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리스도인의 체험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부분은 영적인 실천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작용들에는 영적인 실천을 하고자 하는 체험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실천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체험적 신앙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지 않다. (626)



이신칭의와 영적 실천

    그렇다면 실천에 대한 강조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와 부딪히지는 않을까? 개신교인들이 흔히 실천을 강조하는 것에 주저하는 이유는 이러한 강조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행위나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의 가치로움이나 아름다움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상쇄하는 것으로서 여기시지 않으시며,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야 할 이유로 여기시지 않는다.(631)


    이처럼 실천은 은혜의 근거가 아니라 은혜를 증명하는 표지다.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한다면,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이신칭의론과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것이 된다. 더욱이 에드워즈는 오히려 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초청의 말씀 뒤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약속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배우고 본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 여러 성경 구절을 예로 들면서, 성경은 이신칭의와 실천의 필요성을 연결하고 있기에 서로 모순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증거할 때 성경이 강조하는 것[실천]을 경시하고, 강조하지 않는 것은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적이요, 옛 언약에 속한 방식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신앙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또한 실천에서 나타나는 은혜의 작용들과 효과적 역사를 무시하고, 철학이나 체험에서 얻은 명상으로 은혜와 양심의 내적 작용들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능력과 바르게 구별하는 능력만 믿고 거의 전적으로 깨달음과 이런 내적 작용들의 방식과 방법만을 강조하는 것도 역시 사람들의 신앙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경건의 표지로서 성경이 가장 명백하게 언급하고, 가장 자주 강조하는 것들 외에 어떤 더 나은 또는 더 높은 수준의 표지를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636) 



신앙 감정과 영성 목회

    오늘을 사는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영성이란 무엇일까? 영성이란 단어는 이제 우리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영성이란 단어를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영성을 ‘개인적인 기도생활과 방법’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많은 교회의 기도원들이 영성훈련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있는 것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성에 대한 이해는 영성을 극히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한 방편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의 개신교 영성학자 조셉 드리스킬(Joseph Driskill)은 개신교 영성의 특징 중에 하나가 사회참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영성이 자기 자신의 사적인 영적 추구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성경적이고 바른 기독교 영성이라 하기 어렵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만약 지금 생존해 있다면, 참된 영성의 본질에 대해 무엇이라고 조언할까? 에드워즈에게 있어 신앙 감정은 그저 뜨겁게 찬양하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구하도록 이끌고, 더 나아가 실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 감정은 행동으로 실천하게 만드는 감정이며, 그러기에 참된 신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가르침을 통해 오늘 우리의 영성을 살펴보면, 영성은 그저 기도 생활의 한 방편이나 바쁘고 지친 현대의 삶에서 우리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한 하나의 훈련이라고만 할 수 없다. 특히 개신교 영성은 이신칭의의 믿음을 작은 예수의 삶으로 살아내는 참된 신앙의 요체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성 목회란 목회자가 회중 안에 한 순간의 ‘뜨거운 감정’을 부추킴으로써 교회의 외적 부흥을 만들어 내려하는 기술이 아니라, 교인들이 참된 신앙으로 세상에서 지속적인 실천의 삶을 살아가도록 목회자 자신이 먼저 ‘거룩한 감정’을 품고 함께 걷는 걸음이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권철우.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기독교 영성)에서 수학하였고, 현재는 미국 유마장로교회 담임목사이다. 《백투더클래식》을 공저하였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해왔습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2월 호에 실린 마지막 글입니다. 그동안 연재를 읽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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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긴급한 사명 :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

긴급한 사명

-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


지난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국토의 곳곳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고, 여러 언론들은 광복 직후의 낙후된 모습과 현재의 발전된 모습을 비교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잠시 감격에 젖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벌어진 팽팽한 군사적 대치는 온 민족을 다시 ‘오래된 위기’로 몰아넣었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을 계기로, 북한은 전방지역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고, 남한은 전면전 돌입을 경계하는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비록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서 긴장이 평화적으로 완화되고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전쟁을 그저 ‘쉬고 있는’ 분단국가임을 실감하게 하였다. 더욱 더 이웃나라 중국은 지난 9월 전승절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으로 자국의 군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고,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전쟁 참여를 금지하는 ‘평화헌법’ 수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러한 동북아 정세는 뜨거운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처럼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무엇이라 설교해야 할까? 20세기의 대표적인 영성가이자 사회비평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자.


비밀스러운 공개편지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Cold War Letters)는 일종의 ‘목회 서신들의 묶음’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목회(牧會)는 좁은 의미에서 한 목회자가 특정한 교회를 맡아 회중들을 지도하는 형태에 한정되지 않는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한 영적 지도자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편지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관한 지혜와 권면을 전달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의 서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도 이렇게 편지를 통해 영적 지도를 행한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머튼의 《냉전 편지》는 1961년 10월부터 1962년 10월까지, 약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그가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쓴 111통의 편지 모음집이다. 49통의 편지를 모은 첫 번째 묶음은 1962년 4월에 나왔고, 거기에다 62통의 편지를 추가한 두 번째 묶음은 1963년 1월에 나왔다. 모두 등사되어 스프링으로 제본된 형태로 제한된 사람들 사이에서 회람되었다. 그런데 갖가지 통신, 인쇄 기술이 발달한 20세기 중반에 이렇게 머튼이 ‘편지’와 ‘등사’라는 수단을 활용하게 된 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먼저 토마스 머튼은 베네딕트 규칙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는 트라피스트회(Trappist)의 수도자였다. 그는 1941년 12월 미국 켄터키의 겟세마니 수도원(Abbey of Gethsemani)에 들어간 이후, 줄곧 수도원 안에서 침묵과 기도와 노동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1948)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젊은 수도자 머튼은 수도원 담장을 넘어 매우 영향력 있는 영성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자서전 외에도 기도와 영성 생활에 관한 에세이집과 시집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그의 글에 감명을 받은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엽서와 편지들이 수도원으로 날아들었다. 이처럼 외부 세계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수도원 안에 살던 머튼에게 ‘편지’는 친구들과의 소통이나 영적 지도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이유는 머튼이 수도회에 속한 수도자였기 때문에, 그가 공적으로 출판하는 모든 글들은 수도회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침묵을 강조하는 트라피스트회의 당시 장상(長上)들은 머튼이 영성 생활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장려했지만, 정치적 이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머튼은 1961년 이후 전쟁과 군비 경쟁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가톨릭계 간행물들[각주:1]에 기고하였고, 그것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트라피스트 수도회 총장 가브리엘 소르떼(Dom Gabriel Sortais: 1902-1963)는 마침내 1962년 4월 머튼에게 더 이상 전쟁에 관한 주제로 글을 출판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정식 출판된 책이 아닌, ‘등사된 편지 묶음’이라는 형태는 머튼이 장상들의 지시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수도회의 검열을 피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이용한 방법이었다. 사실 검열 문제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 오던 머튼은 공식적인 출판 금지 지시가 내려지기 이전인 1961년 말부터 자신의 편지들을 ‘비밀스러운 공개편지’로 유통시킬 계획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이런 이유로 《냉전 편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지난 2006년에야 정식 출판되었다. 또한 그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글 모음집인 《기독교 이후 시대의 평화》(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 역시 1962년 4월에 완성되었지만, 등사본으로 읽히다가 그의 사후인 2004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각주:2] 

 

긴급한 위기

그렇다면 머튼은 왜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애를 썼을까? 그의 “냉전 편지들”은 역사적으로 “베를린 위기”(Berlin Crisis)가 일어난 1961년 10월부터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가 있었던 1962년 10월 사이, 곧 군사적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에 쓰여 졌다. 두 사건 모두 냉전 시대 자본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소련 사이에 일어난 군사적 대치로, 두 강대국은 서로를 향해 포문을 열고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다행히 미국 대통령 케네디(John F. Kennedy)와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냉전’(cold war)이 실제 무력을 사용하는 ‘열전’(hot war)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를 사용한 제3차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전 세계를 휘감았던 시기였다. 머튼은 당시의 위기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는 1961년 12월 런던의 한 대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사실상 도덕적 붕괴에 이르고 있으며, 그 속에서 국가의 정책은 거의 노골적으로 멸망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을 운명론적인 무관심으로 수용하거나, 무책임성과 수동성 속에서 무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침묵해왔다는 사실입니다.(9)[각주:3]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로 핵미사일을 운송하는 소련의 군함과 그 위를 비행하는 미군 항공기. Image from Wikipedia.org베를린 위기 당시, 베를린의 찰리 포인트에서 동독군과 대치중인 미군 탱크. Image from Wikipedia.org

머튼이 느낀 위험은 일차적으로는 핵폭탄, 생화학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로 인해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심각하게 여긴 것은 그러한 무기들을 생산하고 다루는 인간들의 도덕적 불감증과 무책임한 태도였다. 호전론(戶錢論)자들은 소련의 핵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군비 확충과 선제공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머튼은 무기 산업이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국민들을 선동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의 무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하고 있습니다. …… 무기가 우리를 분노하게하고 필사적인 상태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손가락을 [미사일 발사] 버튼 위에 올려 두고 레이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17). 그의 관점에서 이것은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학자들,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은 교부 신학이나 전례 등에 대한 작은 문제들에만 신경을 쓸 뿐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5). 그래서 머튼은 지금 서구 기독교는 인간성을 상실한 채 “추상적인 형식”(8)이 되어가고 있으며, 기독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불확실의 영역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3). 이러한 사실들이 그로 하여금 긴급히 펜을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머튼은 이용 가능한 최선의 수단을 다하여 전쟁을 폐지하고, 인류를 파멸로부터 구하는 것이 자신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우선되는 사명임을 확신하였다(2).


새로운 길을 찾아서

머튼은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도덕적, 영적 관점에서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였다. 그는 호전론자들이 “공산주의는 악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비도덕적이고 세속적일뿐만 아니라 완전히 비기독교적임을 폭로하였다(6). 구체적으로 머튼은 도로시 데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 또는 그가 속한 무리의 행동이나 정책으로부터 구분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악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여 그들을 형제자매가 아닌 죄인과 악당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향한 우리의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11). 나아가 그는 당시 미국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아내이며,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제수였던 에설 케네디(Ethel Kennedy)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러시아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입니다. …… 우리는 완전히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옳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육신을 입은 악마들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거대한 환상입니다.”라고 말하며, 증오와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과 상대편을 진실하게 직면할 것을 역설하였다(10). 곧, 머튼은 우리가 평화를 위해 제거해야할 것은 상대진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 그리고 그 전쟁의 뿌리가 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과 증오라고 믿었다.[각주:4] 

     머튼의 이런 견해들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부의 정책에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충(不忠)한 국민으로 간주되었으며, 전면적인 핵전쟁을 외치는 극우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튼은 비록 콜롬비아 대학시절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 잠시 기웃거린 적이 있긴 했지만, 그의 생애에 걸쳐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공산주의가 교회와 자유세계에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임을 지적한다(32). 또한 그는 전쟁에 저항하는 비폭력 평화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운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도 경고하였다. 구체적으로 머튼은 평화운동가인 제임스 포리스트(James Forest)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비폭력운동에 공격성과 도발성이 은밀히 내포됨으로 인해 오히려 상대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눈을 멀게 만들 수도 있으며(31), 평화운동가가 행동주의(activism)의 파도에 휩쓸리면 또 다른 종류의 “대중적 인간(mass-man)”, 곧 이성과 판단력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의견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할 것을 당부하였다(69). 이와 같이 머튼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거칠고 무분별한 평화운동은 전쟁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길을 추구하였을까?

     이처럼 당대의 문제를 도덕적 위기로 파악했던 머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도덕원리를 세움으로써 전면전을 피하고 전쟁 폐지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분열과 대치를 해결하고 통합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기독교 인간주의(Christian Humanism)”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때 머튼이 주장한 “인간주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써, 인간을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이해하는 태도를 말한다.(8) 이것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바탕을 둔 비인간적인 “정글의 법칙(jungle law)”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자연의 법칙(natural law)”에 따라, 원수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똑같은 ‘자연적 본성’(nature)을 지닌 형제자매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태도이다(11).

     물론 머튼은 자신이 정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의 인용구처럼 그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추구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자유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온전한 중도(sane middle path)를 찾고 발견해야 합니다.”(32) 그런데 이때의 ‘중도’는 보통 정치적으로 말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자적 또는 회색주의자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머튼은 《냉전 편지》를 등사하여 배포하는 일을 맡아 주었던 윌버 페리(Wilbur H. Ferry) 민주제도연구소(Center for Democratic Institutions) 부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제가 시도해온 것은 기본적인 도덕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덕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도 심각하게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원칙 말입니다.”(48) 또한 그는 다른 편지에서 “제3의 위치, 통합의 위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것은 냉전시대의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정치적인 신조와도 상관없는 새로운 위치이다.[각주:5]  


‘행복을 주는 약’을 버리라

로널드 W. 드워킨(Ronald W. Dworkin)은 《행복의 역습》(Artificial Happiness, 2006)이라는 책에서, 1950년대 이후 미국의 교회는 대중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적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설교하기 시작했는데(‘행복’과 ‘긍정적 사고’에 대한 강조가 대표적 예이다), 단기적으로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늘날 종교를 ‘정신작용약물’을 사용해서 ‘인공적인 행복’을 제공하는 의료산업과 비슷한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고 논증한다.[각주:6]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당시 기독교 매체와 교회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느끼게’ 만들면서도 당면한 위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수동적이게 만드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믿음은 그저 “행복을 주는 약(happiness pill)”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3). 

오늘날 우리 한국의 설교단과 서점 진열대도 “행복을 주는 약”들이 오랫동안 점령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 한국 교회의 도덕적, 영적 위기를 초래하는 데에 크게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머튼의 《냉전 편지》는 비록 반세기 이전에 쓰여 진 것들이지만, 시대의 도덕적 영적 위기에 대한 그의 통찰과 제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도 머튼이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교회의 생명력은 바로 영적 갱신에 달려있습니다. 이 갱신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며 심원한 차원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갱신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입니다. 이것은 그 위기들을 내적 의의와 인간의 성장과 인간 세계에서의 진리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69)


분명히 기억해야 것은 ‘영성 목회’는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목회자와 회중의 만족을 위한 ‘행복을 주는 약’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최소한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설교자는 당면한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행복을 주는 약’을 던져 버리고, 정치적 좌우를 넘어서는 도덕원칙, 통합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할 긴급한 의무가 있다. 그래야 영적 갱신이 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글쓴이 : 권혁일.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Ph.D. Candidate(Graduate Theological Union, 기독교 영성학). 《백투더클래식》을 편저하였고, 《제임스 게일》, 《베네딕트의 규칙》 등을 번역하였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1월 호에 "도덕적·영적 관점에서 본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실린 열한 번째 글입니다.


  1. 1. 대표적인 매체로는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가 이끌던 《가톨릭 노동자》(The Catholic Workers)가 있다. 도로시 데이는 비폭력 사회 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가톨릭교회에서는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한 그녀의 삶을 높이 평가하여 성인으로 추대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생전에 머튼과 데이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냉전 편지》에도 머튼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2통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2. Cold War Letters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는 분도출판사에서 《머튼의 평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3. 3. 인용문은 필자가 Cold War Letters (Orbis, 2008)에 수록된 원문을 번역한 것이며, 괄호 속의 번호는 냉전 편지 번호이다. 토마스 머튼은 《냉전 편지》를 직접 편집하며, 각 편지에 배열 순서대로 번호를 달아 두었다. [본문으로]
  4. 4. 머튼은 그의 책, 《새 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16장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입니다”에서 이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5. 5. Thomas Merton, The Courage for Truth: Letters to Writers (Harcourt Brace & Company, 1994), 54. [본문으로]
  6. 6. 로널드 W. 드워킨, 《행복의 역습》(아로파, 2014), 220-2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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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연의 모든 생명을 형제자매로 부르다

자연의 모든 생명을 형제자매로 부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



숲, 힐링, 그리고 생명

    몇 해 전부터 한국 사회는 웰빙(well being)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힐링’(healing)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책, 먹거리, 여행, 방송 프로그램 등 ‘힐링’ 아닌 것들이 없을 정도다. 웰빙 시대가 유기농 식품이나 슬로프드(Slow food) 등 먹거리가 이끈 시대라면, 힐링 시대는 숲이 이끄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에는 이름도 몰랐을 동네 뒷산에 올레길, 둘레길, 비렁길 등의 멋진 이름을 붙이는 것도 숲의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 7월22일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는 숲 속을 걷는 것이 우리 뇌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도시생활이 사람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그레고리 브랫맨(Gregory Bratman)은 서른여덟 명을 대상으로 사람이 걷는 환경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을 했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90분 동안, 한 그룹은 한적하고 녹음이 우거진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를 걷게 했고, 다른 한 그룹은 복잡한 팔로알토 시내를 걷게 했다. ‘걷기’가 끝난 직후에 정신 건강 설문지와 뇌 정밀검사를 해보니 한적한 숲길을 걸었던 그룹에서만 모든 검사에서 걷기 전보다 향상된 결과를 보여주었고, 혈압도 더 안정되었다. 숲과 힐링의 인과관계를 증명한 하나의 예인데, 숲의 치유능력은 숲이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난 8월 초에 교회의 청장년 그룹과 함께 2박 3일의 일정으로 킹스 캐니언 국립공원(Kings Canyon National Park)을 다녀왔다. 겨우 삼 일이지만 ‘휴대폰 없는 삶’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숲의 멋에 흠뻑 빠져갔다. 숲은 생명 아닌 것들로 상처 받은 우리의 눈과 귀를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숲에는 생명 아닌 풍경도, 생명 아닌 소리도 없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잠들고, 이름 모를 새소리가 알람을 대신한다. 바람에 흘러가는 옅은 구름들과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은 침침해진 눈을 씻어주고,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 소리며 시원한 물소리는 막힌 귀를 뚫어준다. 숲의 멋은 곧 ‘생명의 멋’이다. 그래서 숲에서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수다와 끊임없는 질문들도 온통 생명에 대한 것뿐이다. 그 멋을 즐기며 인간은 한 생명으로서의 신비롭고 멋진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숲은 창조주를 닮은 생명의 멋으로 충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이후로 사람들은 피조 세계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인간은 오랫동안 여타의 피조 생명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과 짐승의 생명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사람에게 불어 넣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창2:7). 여기서 생령(개역개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말 네페쉬 하야’는 인간 외에 ‘생물’로 번역된 다른 동물계를 가리킬 때에도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창1:20, 21, 24, 2:7, 19).[각주:1] 사람이나 생물이나 모두 똑같은 네페쉬 하야(생명)다. 또한 인간의 창조 과정이 좀 더 하나님과 친밀했다고는 하나, 재료는 사람이나 생물이나 같다. 사람이 흙에서 왔듯이, 하나님은 땅에게 온갖 종류의 생물과 짐승들을 내어라고 명령하셨다(창1:24-25). 

    창조 신앙은 자연숭배라는 이교 사상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얻어낸 신학이기는 하지만, 자연을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덴은 하나님-인간-자연이 화목한 가족처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곳이었고, 종국에 주님이 통치하실 나라는 인간과 자연이 숭배, 정복, 혹은 갑을의 관계를 이루는 곳이 아니라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뒹굴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사11:6-8) 온 생명이 더불어 형제자매가 되는 가정 공동체이다.  


형제 해와 자매 달의 찬양

"Francis and the Wolf" by John August Swanson. Image from www.johnaugustswanson.com

     낮의 해와 밤의 달을 숭배 혹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스런 형제와 자매로 칭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했던 분이 있었다. 가난의 성자로 많이 알려진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다. 그의 저작은 주로 수도자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수도회를 위한 짧은 교훈들로서 남겨진 글이 많지는 않다. 그 중에서 그의 문학적 기질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을 고르라면 단연 태양의 노래〉(The Canticle of Brother Sun)다. 태양의 노래〉는 1225년부터 1226년 사이에 프란체스코가 임종하기 직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총 14절로 이루어졌다. 첫째 부분은 1-9절로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관을 잘 담고 있으며 ‘피조물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둘째 부분은 10-11절로 불화를 겪었던 아씨시 시장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으며 ‘용서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마지막 부분인 12-14절은 ‘죽음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조차도 ‘자매’로 부르는 그의 초월적 영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지면상 주제와 관련된 첫째 부분만을 소개한다.   


1.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주여

  찬양과 영광과 존경과 모든 은총이 당신의 것입니다.

2. 지존이시여, 이 모든 것은 오직 당신께 속한 것이오니

   사람은 누구나 당신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3.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친애하는 형제 해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는 낮이며, 그를 통해 당신은 우리에게 빛을 주십니다,

4. 그는 아름다우며, 위대한 광채로 빛을 내며

   지극히 높으신 당신을 닮았습니다. 

5. 내 주여, 자매 달과 별들의 찬양을 받으소서.

   당신은 저들을 맑고 귀하고 아름답게 하늘에 조성하셨나이다. 

6. 내 주여, 형제 바람의 찬양을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화창한 날씨, 그리고 모든 날씨의 찬양을 받으소서

   저들을 통하여 당신이 만드신 것들을 기르시나이다.

7. 내 주여, 자매 물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녀는 매우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면서도 고상합니다.

8. 내 주여, 형제 불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로 인해 당신이 밤을 밝혀 주십니다.

   그는 아름답고 활동적이며, 굳세고 강합니다. 

9. 내 주여, 우리의 자매이자 어머니인 땅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녀는 우리를 기르고, 다스리며

   알록달록한 꽃과 식물들, 그리고 온갖 과일을 내어줍니다.[각주: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각적 경험에 의지해 자연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한다. 반면에 이 노래는 프란체스코가 죽기 1년 전, 병약하고 거의 장님이 된 상태에서 극심한 병고에 시달리던 때에 작성됐다. 즉, 그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젖어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싹튼 그의 형제사랑이 다른 피조세계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태양의 노래〉를 ‘자연에 대한 찬가’로 오해할 수 없는 것은 피조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기준이 이 작품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본문의 1-2절은 오직 지극히 높으신 주님만이 찬양의 대상이며, 창조된 모든 피조세계는 주님께만 절대적으로 종속됨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이어지는 3-9절의 노래는 모든 피조세계가 오직 지극히 높으신 주께만 절대적으로 종속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그 절대적 종속의 표현으로 드리는 찬양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프란체스코의 자연관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그는 고난당하시는 예수(Crucified Christ)를 온 삶을 다해 사랑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그의 생애 말년에는 주께서 그의 양 손에 예수님의 못 자국(聖痕, stigmata)을 주실 정도였다고 후대 사람들은 전한다. 프란체스코가 그토록 십자가의 예수를 사랑했던 것은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 된 피조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는 친히 자신을 낮추어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셨는데,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과 하나로 이어주는 맏형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따라서 프란체스코는 인간과 자연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형제 관계라고 이해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토록 강조했던 형제 사랑, 특히 가난한 형제들의 사랑을 철저히 실천하면서 ‘가난한 형제’의 범주를 자연세계까지 확장하였다. 평생을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했던 프란체스코에게는 숲을 거닐며 만나는 모든 생명들도 사랑하고 친교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제자매였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영성을 통해 그는 모든 생명을 수직적인 위계질서로 분류했던 기존의 세계관을 탈피할 수 있었다. 


숲과 목회

    지난 6월 18일 가톨릭교회에서는 프란체스코 교종이 역대 교종으로는 처음으로 생태 문제를 다룬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회칙을 발표했다. 특히 이번 회칙의 제목이 태양의 노래〉의 반복하는 구절 찬미(양)를 받으소서(Praised be You)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의 자연관과 영성은 전체 가톨릭교회 사역의 지침이 될 것이고, 작은 지역 교구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회는 어떤가? 매 년 급격한 기후 변화에 따른 피해가 늘어나면서 이미 ‘자연과 환경’은 신학의 주된 토론 주제가 되었지만,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회사역의 끄트머리에도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 성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는 우리에게 꽤 친숙한 작품이고, 심지어 자주 즐겨 부르기까지 한다. 어쩌면 가톨릭 신자들 보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노래일지 모른다. 새 찬송가 69장 〈온 천하 만물 우러러〉가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찬송은 야외예배의 애창곡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찬송을 프란체스코의 것으로 쉽게 연결 짓지 못하는 이유는  온 천하 만물 우러러〉가 제목부터 가사까지 원작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새 찬송가에 실린 이 곡은 1927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출판한 《장로교 찬송가》(The Church Hymnary)에서 번역된 것으로, 윌리엄 드레퍼(William Draper)가 어린이 성령강림절 찬송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번역이 아쉬운 것은 자연에 대한 프란체스코의 태도와 관점을 제대로 옮겨내지 못해서인데, 그는 형제(Brother)자매(Sister)를 모두 그대(Thou)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연의 피조물들도 마땅히 존중할 생명들이나, 그들을 형제와 자매로는 수용할 수 없었던 그의 자연관이 번역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한국 교회는 100년 가까이 〈태양의 노래〉를 불러왔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자연관은 한 세기 전과 비교하여 그리 진일보(進一步)하지 못했다. 물론 교회들도 숲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회중이 많이 모이는 집회형 기도원보다 조용한 숲 속의 영성센터를 선호하는 이들이 꽤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로는 교회가 숲(자연과 환경)을 목회와 연결시켰다고 말 할 수 없다.  

    앞으로 자연을 통한 영성 훈련과 생태 문제에 참여하는 목회사역들이 계속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숲에 대한 ‘목회 감각’을 살려내는 일이 시급하다. 목회자의 자연관은 설교와 사역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체스코 영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목회 감각’은 숲을 이루는 온 생명을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숲에 관심을 갖고 좋아한다는 것과, 그것을 같은 생명의 형제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얼마든지 숲의 생명들을 쉼, 치유, 혹은 묵상의 도구로서 좋아할 수 있다. 혹은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 내려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숲의 충만한 생명력을 지나치게 우러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인간과 숲이 서로 형제자매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어졌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 심겨져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숲 속에서 온전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고, 숲의 생명들도 인간 형제의 따사로운 손길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태양의 노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의지하는 모든 생명들이 한 교회의 성도가 되어 찬양하며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적 감각을 갖출 때 숲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최고의 영성 훈련 장소로,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하고 치유하고 선교해야 하는 목회지로 서서히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 김종수,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 담임목사, D.Min Candidate(Pacific School of Religion, 기독교 영성)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0월 호에 실린 열 번째 글입니다.


  1. 1. 녹색의 눈으로 읽는 성서, “예수의 환경 친화적 가르침” 소기천(대한기독교서회, 2002) p.129. [본문으로]
  2. 2. Regis J. Armstrong and Ignatius C. Brady 가 공동 영역한 Francis and Clare: The Complete Works (Paulist Press, 1982)에서 필자가 번역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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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을 말하다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 (Spiritual Friendship)을 말하다

《조지폭스의 일기》와 친우회의 '명료화위원회' 





불신-자(不信-者)로 채워진 교회


    우리는 지금 불신(不信)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배를 탄 승객이 선장의 말을 믿을 수 없고, 환자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은 나랏님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는 자(信者)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다른가? 최근 이름 있는 대형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존경의 대상이었고, 신앙의 모델이었던 목사님이 돈 문제, 사생활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처음에는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알고 신앙을 지키려 했는데, 여러 가지 풍문들이 사실들로 밝혀지면서 자기 믿음의 근거마저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친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추문들과 사건들을 통해 성도들은 그들의 목회자를 ‘성직자’라기 보다는 가운이나 강대상 뒤에 숨은 ‘위선자’로 보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감추지 않는다. 목회자는 또한 어떠한가? 새벽기도회로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 등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성도, 굳어진 그들의 마음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신천지 같은 이단의 출현은 성도들 사이마저도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2015년 한국 교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불신-자(不信-者)들이 모여 단지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인지 모르겠다. .


    '영적 우정'? 불신자의 교회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에 있어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혹은 교우들 서로 간의 수평적인 영적 우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친밀함과 더불어 영성 목회에서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소중한 가치이다. 12세기 영국의 시토회 수도자였던 리보의 에일레드(Aelred of Rievaulx, 1109-1167)는 그의 저서 《영적 우정에 관하여》(On Friendship)[각주:1]에서 영적 우정은 영적 완숙(Spiritual Perfection)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라고 말한다. 그는 요한복음 4장 21절[각주:2]과 15장 15절[각주:3]을 묵상하면서 영적 우정은 “두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우정을 통해서 경험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정이다(God is Friendship).”라는 과감한 주장을 했다. 에일레드의 책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죽은지 500여 년 후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영국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또한 친구다.”라고 주장하며 영적 우정에 기초한 친우회(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각주:4] 의 시작을 알렸다.   



1.  조지 폭스와 친우회


당시 폭스는 침묵에 관해 가르쳤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증거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하였으며, 각자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도록 참고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 그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신조와 예배에 억지로 순종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내면의 빛을 통해 영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데, 이 영적인 연합이란 동일한 원칙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2), 47. 윌리엄 펜의 증언.



    퀘이커 영성의 기초자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의 일기는 실제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며 영어로 기록된 가장 위대한 자서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폭스와 같은 세대로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미국 땅에 필라델피아(형제애)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던 윌리엄 펜 (William Penn, 1644-1718) 은 《조지 폭스의 일기》 서문에서 조지 폭스는 신앙인들을 기존의 신조나 교회의 교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썼다고 증언한다. 왜 폭스는 교리와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신앙인을 만들려했을까?


    그것은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직자들을 의존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오히려 신앙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국사회는 기존의 왕정이 쇠퇴하며 공화정이 등장하는 격변기였다. 왕정이 약화되자 왕실의 보호를 받던 영국 국교회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청교도, 재세례파, 급진파, 분리주의자등 수많은 교파와 그룹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들의 교리와 신앙을 주장하며 쏟아져 나왔다. 성도들은 교회를 떠났고, 성직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며 이윤을 탐했다. 말로는 정의와 정통을 외쳐대며 속으로는 탐욕에 젖어가는 성직자들을 바라보며 조지폭스는 “그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귀머거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랬다. 폭스는 당시의 교회를 “뾰족집”이라 불렀는데 이는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보다는 성경을 수단으로 설교를 통해 성공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흉물스런 괴물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적인 방황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구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해답을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러한 영적인 고통의 정점에서 그는 그의 일생뿐만 아니라 친우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경험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 아!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 분만이 네 상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리스도는 나를 깨우치셨으며 자신의 빛을 내게 주어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 속에서 직접 희망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내게 그의 영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71-73.


    이렇게 해서 "내면의 빛(Inward Light)", "씨(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친우회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다. 마치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가 자기 감각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을 의심한 후, “ego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치며 전통에만 의존하던 중세를 떠나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것과 같이 조지 폭스는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형상, 내면의 빛을 붙잡은 것이다. 또한 서로의 신앙인들 안에는 동일한 내면의 빛이 있어서 그 빛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 안의 ‘내면의 빛’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이를 위한 ‘침묵의 예배’는 영국 방방곡곡과 영국을 넘어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이들 친우회의 영성적인 특징들을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라는 그들의 특별한 분별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다.



2. 명료화위원회[각주:5]


    명료화위원회는 초기 친우회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사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의 영적인 분별을 돕기 위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나 나아가서는 전체 공동체의 중요 안건을 위해서도 적용되었다. 이 모임 이면에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내면에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교사, 즉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문제에 처한 각 개인이나 그룹은 여러 종류의 내적, 외적 간섭으로 인해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방해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위원회로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 안의 방해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스스로가 자기 내면의 빛에 집중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질문과 경청, 침묵을 통해 격려하고 분별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먼저 개인의 분별을 위한 명료화위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가진 '중심 인물(focus person)'과 모임의 진행을 인도할 '인도자(clerk)' 그리고 중심 인물에게 질문을 통해 분별을 돕는 '4-6명의 분별을 돕는 사람들(discerners)'자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을 돕는 사람들의 질문이다.[각주:6] 이들은 충고나 설득을 통해서 중심 인물에게 영향을 주려 하기 보다는 중심 인물이 스스로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부드럽게 도와주어야 한다.  사회자는 분별자들의 질문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너무 길면 적절히 조절하거나 끊어주어야 한다. 침묵은 이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가장 역동적인 대화의 공간이다. 침묵을 통해서 중심인물이나 분별자들은 그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친우회는 이러한 개인적 명료화위원회를 공동체적 분별을 위한 의사결정위원회로 확장시켰다. 각 교회나 교단의 총회와 같은 이러한 모임은 여러 가지 첨예한 안건들이 상정될 수 있지만 사회자(clerk)는 개인적 명료화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나 이기적 욕구 때문에 ‘내면의 하나되게 하는 빛’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회의의 처음과 끝, 그리고 각 개인들의 발언 사이에 침묵을 통해서 방해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한다. 이들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이 아닌 완전 합의 (consensus)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반대하는 소수가 존재한다면, 결정을 유보하고 다수라는 힘의 논리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는 개인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다리며 침묵한다. 이러한 분별의 과정은 느리고 힘들고 더디지만 우리가 내면의, 혹은 외부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빛’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 초기 미국 퀘이커교도였던 존 울먼(John Woolman, 1720-1772)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후 이와 관련된 안건을 퀘이커 공동체에 내어 놓아 자그마치 20년의 긴 시간을 통해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하였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노예해방 선언보다 8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3. 나서는 말

    책으로만 접했던 친우회의 모습을 글로 쓰기가 부끄러워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보았다. 아무런 찬송도, 어떤 의식도 없이 그냥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앉아서 마냥, 차분히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빛의 소리. 그렇게 침묵 속에서 내면에 들려오는 빛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서 자기가 들은, 혹은 경험한 것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나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진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헤어졌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아쉬운 반응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기다리는데 익숙해 보였고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의 설교에 따라 ‘오늘 은혜 받았어요’, ‘오늘은 설교가 별로였어요’하며 설교에 따라  예배를 평가하는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친우회의 예배와 그들의 영성은 대다수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낯설고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안팎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우리에게는 똑같이 내면의 빛이 있어서 독립되지만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 조지 폭스의 믿음,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함께 모여 가만히 앉아, 참고, 기다리며, 경청하는 친우회의 침묵의 영성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영적 우정은 결국 나와 서로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를 위한 따뜻하고 조용한 기다림의 여정이 아닐까.



글쓴이 : 정승구. 미국 프리몬트의 로고스교회 담임.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중 (기독교 영성학)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9월 호에 실린 아홉 번째 글입니다.





  1. 1) 이 작품은 에일레드가 20여 년간 집필하여 1167년 경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Aelred of Rievaulx, Spiritual Friendship: Classics with Commentary Series, (Notre Dame, Indiana: Ave Maria Press, 2008). [본문으로]
  2. 2)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문으로]
  3. 3)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본문으로]
  4. 4)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에 몸이 떨렸다고 해서 흔히들 퀘이커 (Quaker)라고 더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친우회 (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다. 우리 기독교계의 어른인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로서 알려져 있듯이 퀘이커들의 예배 및 영성은 오랜 전통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한다. [본문으로]
  5. 5) 영어로는 ‘The Clearness Committee’로 알려진 퀘이커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분별과정은 한국말로 해석이 용이치가 않다. 정화 위원회, 해명 위원회, 혹은 명료화 위원회로도 불리지만 본문에서는 퀘이커 서울 모임에서의 자문을 받아 명료화 위원회로 부른다. [본문으로]
  6. 6) 구체적인 질문이나 대화법은 본 시리즈/연재 지난 2월호에 실린 이주형 목사의 글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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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공동체와 분별 :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과 공동 분별

공동체와 분별 :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과 공동 분별 



1. 교회 공동체와 분별

    교회는 형제자매들의 신앙 공동체다. 그러나 분리된 개인으로 한 공간에서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는 성도들의 뒷모습을 마주하노라면 공동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도자인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Johann Heinrich Arnold)는 《공동체 제자도》에서 개별화된 개인과 가족이 서로의 일부가 되는 것은 자기만의 생각, 이상, 존재를 비우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참된 공동체는 하나님과 형제자매들에게서 자신을 떼어놓는 모든 것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이뤄지며, 하나님의 사랑의 영에 굴복하여 자만, 자기 연민, 자기 주장 그리고 거짓 경건에서 돌아설 때 경험될 수 있다.[각주:1]  

     하나님과 나,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나 사이를 떼어놓는 방해물들, 곧 배금주의, 외모지상주의, 과도한 경쟁, 잘못된 관행, 권위주의, 개인주의, 왜곡된 신앙관, 나태, 탐욕, 교만, 두려움 등은 이기적 자아의 모습이나 거짓 경건으로 위장하여 우리를 속인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가 《영적분별의 길》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고, 또 우리를 개인과 공동체로 부르시는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해가는’ 분별이 중요하다.[각주:2] 저자는 개인으로 그리고 공동체로 하나님의 부름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간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를 통해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길을 모색해 보겠다. 


 



2. 이냐시오 로욜라와 공동 분별

1) 분별의 영성가 이냐시오 로욜라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성은 《영신수련》이라는 작은 책자에 집약되어 있다. 영신수련은 이론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를 묵상하며 주님을 따르도록 돕는 교본이라 할 수 있다. 영신수련의 중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인데 이를 위해 예수님의 부르심을 분별하는 원리를 제공하는 ‘특별 묵상’과 ‘분별 규칙’이 첨가되어 있다. 분별규칙은 《영신수련》[313~336][각주:3]에 나타나는데, 성령의 내적인 움직임들을 다른 근원으로부터 오는 움직임들과 구분하는 방법과 항상 성령에 대하여 개방성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담고 있다. 이냐시오는 분별 원리와 규칙을 집을 가지거나, 결혼을 하거나, 가족들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적용하라고 가르칠 정도로(영신수련》[189]) 현실의 선택에 대해 씨름한 분별의 영성가였다.


2) 공동 분별의 배경

      《영신수련의 분별 원리와 규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분별을 돕는 데 쓰이지만 공동체적 배경에서도 아주 유용하다. 공동 분별의 예를 《첫 사부들의 식별》(Delibratio primorum Patrum)[각주:4]이라는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간략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만레사(Manresa)에서 여러 가지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을 맛본 후 자신의 경험과 신학의 지식 등을 영신수련》에 녹여 내고, 그것을 활용하여 많은 이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영적 생활을 도왔다. 그들 중 이냐시오를 포함한 몇 명이 청빈과 정결,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설교하는 일 등을 공동으로 체험하면서 깊은 형제애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동반자’로 스스로를 칭하면서 자신들이 수도회로 결속되어야 할지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들은 토론과 분별을 통해 같은 생활양식으로 결속하기로 결정했으며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첫 사부들[각주:5]의 식별》 은 그들이 영신수련의 정신에 기반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간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첫 사부들의 식별》에 나타난 공동 분별의 원리를 중심으로 영신수련에 배어있는 개인 분별의 원리들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되었는지를 살핌으로서 개인과 공동체의 분별에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The First Vows at Montmartre, 1534년.


3. 공동 분별의 실제

1) 분별의 시작 : 올바른 목적과 정체성 공유

      《첫 사부들의 식별》[1][각주:6]은 공동 분별이 시작된 배경을 먼저 언급한다. 이냐시오와 벗들은 동일한 소명을 공유했지만 다양한 배경과 문화로 인해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도 의사결정에 있어서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통일된 질서가 없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모두가 나름의 방식대로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공동분별을 시작해야 할까?’ 

“우리가 서로 다른 판단을 지니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각주:7]께만 찬양, 존경과 영광을 드리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양으로 봉헌하기 위하여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고자 했다.” (《첫 사부들의 식별』》[1])

     공동 분별을 시작할 때 중요한 점은 분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올바른 분별의 목적을 공유하지 못하면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목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교세(성도수나 재정)확장’, ‘성도들의 편의 증진’, ‘특정인이나 그룹의 영향력 강화’ 등이 목적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면 공동 분별은 자기 욕망의 경연장이 되고 수단이 목적을 흔들고 이기적이고 세속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공동 분별에 참여하는 모두가 분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분별에 참여하는 자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소명받은 자’라는 관점을 충분히 공유해야 한다.


2) 분별의 준비 : 불편심(영적 자유)

      목적과 정체성이 공유되었다면 다음 단계로 분별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분별의 준비는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 즉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마18:3) 

 마침내 한 결정에 이르러 만장일치로 합의한 것은 우리가 여느 때보다 좀 더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고 좀 더 열심히 묵상하면서 오직 주님께만 의지하고 희망하며 우리의 모든 관심을 주님께로만 향하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친절하시고 관대하신 분이시기에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구하는 이에게 결코 당신의 선하신 성령을 거절하지 않으신다.”(《첫 사부들의 식별》 [1] )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이 영신수련》[23]에서 말하는 '초연'이다. 이 때 초연(Indifference)은 애착으로 인해 한쪽으로 치우쳐짐이 없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불편심’(不偏心)의 상태이다. 이 때 내적자유를 누린다고 해서 ‘영적 자유’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불편심(영적 자유)은 영신수련을 관통하는 아주 본질적인 태도이다(영신수련》 [15, 179, 189]). 영신수련을 통해 수련자가 예수의 길을 향하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특별 묵상(영신수련 [23, 136~147, 149~155])과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영신수련 [169])에서도 불편심(영적자유)을 선택을 위한 준비 조건으로 분명하게 강조한다.  

      분별을 위한 두 번째 준비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첫 사부들은 일상적인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더 기도하고 더 묵상하는 최선을 드리려고 하고 있다. 일상적인 사역과 일을 벗어나지 않았다. 반드시 기도원이나 수도원과 같은 별도의 공간일 필요는 없다. 일상적인 사역과 병행하면서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그 분의 뜻을 구하려는 열정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분별은 맞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해가는 과정이다. 


3) 분별 방법 결정 : 이성적 분별

      준비를 갖춘 후 어떤 방법으로 분별했을까? 이냐시오와 그의 벗들이 사용한 실제적인 분별의 방법은 《첫 사부들의 식별》 [2]에 잘 나타난다. 그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제들을 살피고, 일을 마친 밤시간에 함께 모여서 선택안을 시험하고 이유를 설명하고, 다수의 의견에 따라 수정해가면서 합일점에 도달해갔으며, 이런 과정을 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 방식을 이성적 분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신수련』의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에 근거한다. 

제시된 직책이나 교회의 특전을 취함으로써 오직 우리 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내 영혼을 구원하는 데 내게 얼마나 유익하고 도움이 될 것인지를 따지고 고찰한다.(영신수련》[181])

제시된 것에 대해 이처럼 다방면으로 따지며 궁리한 다음에는 이성이 어느 편으로 더 기우는지를 살핀다.(영신수련 [182])

    이냐시오의 분별 규칙은 기본적으로 위로와 실망이라는 내면의 감정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유혹이 있을 수 있기에 이성적 성찰로 보완도록 한다. 이냐시오와 벗들은 공동체로 결속되는 것이 하나님을 더 섬기고 영광스럽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유를 서로에게 설명함으로써 서로 시험하고, 더 나은 안을 찾고, 다수의 생각을 모아가는 이성적 분별을 사용한다. 


4) 선택안 구체화 : 질문하기

      분별의 방법을 정한 후에 질문을 제기한다. 첫 질문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내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가?였다. 이것은 근원을 흔드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의 동반자라는 이름으로 삶을 나누며 살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우정, 이미 이루어오던 방식까지도 폐기할 수 있는 개방성이 담긴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그들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다양한 우리를 함께 모이게 하셨고 일치시키셨으니 하나님께서 모으시고 일치시킨 것을 우리가 갈라서는 안 된다.”(《첫 사부들의 식별》[3])라고 마음을 모아간다. 그들에게 공통의 신앙 경험을 주시고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명의 본질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 중 누군가 한 명에게 순명할 수 있는가?이었다(《첫 사부들의 식별》[4]). 만약 그들이 한 공동체로 연결되기 원한다면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 순명의 삶을 살아야했다. 이것은 첫 질문을 구체화하는 실제적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두 번의 질문하기를 통해 구체적인 선택안을 갖게 되었다.


5) 교착 해결하기 : 믿음을 통한 개인과 공동체의 양립

      그들이 영성수련을 함께 하고 공동 사역을 체험하고 결속되었다고 해서 공동 분별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여러 날 기도하고 숙고했지만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첫 사부들의 식별》[5]). 이냐시오와 동반들은 이 때 더 나은 방법으로 ‘분별의 환경을 바꾸는 것’과 ‘누군가에게 결정을 위임하는 것’을 고민한다(첫 사부들의 식별[5]). 그러나 세 가지 영적 준비를 제안함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더 많은 기도와 묵상 등의 최선을 다하는 노력’, ‘상대방의 생각을 염탐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말 것’, ‘제3자적 태도를 가질 것’(첫 사부들의 식별[6]).  교착상태에 빠지면, 소수자를 설득하거나 또는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위임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 때 영적 준비를 위한 해결책을 제안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집중적으로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함께 기도하면서 제3자적 관점, 즉 불편심(영적 자유)을 가지면서 자신이 경험한 움직임을 공동체와 나누었다. 개인에게 경험된 하나님의 의도를 존중하여 각 개인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때로는 동일하고 때로는 상반되지만 전체적으로 온전히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고 있다. 믿음으로서 교착을 해결한다. 


6) 선택안 결정  : 선택안에 대한 불이익과 이익을 통한 마음의 기울기 측정

      교착을 해결하기 위한 영적 준비를 마친 후, 다음 날 모여서 개별적으로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얻게 된 순명에 대한 부정적 측면(불이익들)을 전체에게 돌아가면서 발표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질문의 반대측면, 즉 순명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익들)에 대하여 기도 중에 성찰한 것을 다시 돌아가면서 나누었다. 이 때 전 날 나눈 것들 중 불가능하고 엉뚱한 것들은 감소시켜갔다(첫 사부들의 식별[7]). 이런 정보들을 다시 숙고해가면서 마음의 기울기를 측정해 나갔다(《영신수련》[182]). 공동체 전체가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지를 살피면서 다수의 마음이 어디로 모아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다수결이지만 아무의 반대도 없는 만장일치의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첫 사부들의 식별[8])


4. 제언

      이냐시오의 공동 분별은 개인의 분별과 공동체의 분별을 일치시키는 과정을 통해 다수의 의견이 한마음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과정이다. 포스트 모던의 교회 현실에서 첫 사부들의 식별》의 식별에서 제공하는 모델을 통해 개별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공동 분별은 특히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공동 분별의 모든 과정이 《영신수련》이라는 지속적인 회심 체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선택하려는 《영신 수련》의 정신과 태도가 배어 있지 않은 채 방법만으로 올바른 공동 분별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훈련해 가면 이냐시오를 도우신 주님이 분명 우리도 도우실 것이다. 이냐시오의 공동 분별의 원리와 정신을 당회와 제직회 등의 의사결정에 적용해 감으로서 한국교회가 참된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길 바란다.


글쓴이 : 유재경.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Th.M(영성신학), 영락수련원(영락교회 영성센터)지도목사.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8월 호에 실린 여덟 번째 글입니다. 잡지에는 지면의 제한으로 인해 요약본이 실렸지만, 이곳에서는 전문을 게재합니다.


  1. 1.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공동체 제자도》, 110~115쪽 요약. [본문으로]
  2. 2.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은사적 분별(고전 12:10)을 ‘분별’로,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든 믿는 자가 내면 안에 일어나는 영의 움직임을 구별하는 훈련적 분별(요일1:9, 4:1)은 ‘식별’로 용어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친숙한 ‘분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3. 3. Ignatius of Loyola 지음, 정제천 옮김,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서울: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0), 313~336번(쪽 번호 아닌 문단 번호이며 이후부터 《영신수련》 [313]으로 표기함) [본문으로]
  4. 4. 다양한 영어 번역본 중 Jules J. Toner, S.J. “The Deliberation that Started the Jesuits: A Commentario on the Deliberatio Primorum Patrum,” newly translated, with a historical introduction, Studies in the Spirituality of Jesuits Ⅵ no. 4 (June 1974)를 기반으로 쓴 심종혁, "사도적 공동체로서의 예수회의 기원", 종교신학연구 6 (서강대 신학연구소, 1993.12): 389-419쪽의 한글 번역문을 사용하였음. [본문으로]
  5.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의 창립에 참여한 설립 주역들 [본문으로]
  6. 5. 아투로 코디나(Arturo Codina)가 라틴어 원문을 아홉 개의 문단으로 분류한 표준 번호를 따름. [본문으로]
  7. 6. 번역본은 “하느님”이지만 이 글의 독자가 대부분 개신교 배경을 가진 점을 감안하여 앞으로 “하나님”으로 바꾸어 쓰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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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바(Abba)그리고 임(님): 관계적 기도를 위한 하나님 이미지

오랜 기간 한국 교회의 자랑 중 하나는 모든 성도들이 온 마음으로 드리는 통성 기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밤을 깨우며 뜨겁게 드린 철야 기도와 온 힘을 다해 드리는 통성 기도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유산 중 하나로 인식되어왔다. 1907년 시작된 평양 대부흥을 계기로 통성 기도를 함께 드리는 기도와 죄고백의 시간으로 인식하면서 많은 교회들은 그 당시의 기도 모델을 지향하고 기도의 불길을 지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더불어 현재 상당 수의 교회에서 다함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 시간은 교회 성장 활력을 돋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기도와 찬양 시간의 특징은 주로 감성을 자극하여 더 진솔한 마음으로 자신의 문제와 현안을 대면하게 하고 그에 대한 솔직한 자기 응답과 고백을 이끌어내도록 도전한다는 점이다. 


원시적 언어에서 교제의 언어로

    이러한 감성 중심적인 통성 기도는 각 개인 안의 진실한 갈망과 원초적 소망을 일깨우는 점에서는 분명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기도에 관해 심리학적 연구를 진행한 앤 울라노프와 베리 울라노프(Ann & Barry Ulanov)는 기도란 본연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 형태 이전의 원시적 의사소통으로서 “제일의 언어(primary speech)”라고 정의한다.[각주:1] 내면 깊이 자리한 갈망은 언어를 초월하여 기도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감성을 일깨워 드리는 통성 기도의 형태는 자기 본연의 목소리를 발현하는데 큰 유익이 있다.

    그러나 기도가 가진 중요한 특성, 곧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인격적 교제의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이런 기도의 형태로만 일관하는 기도는 한계를 나타낼 수 있다. 교제의 기도 안에서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만 드러낼 것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히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성 기도는 기도자가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에 반응하여 교제하는 동시에 자기 변화의 길로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해서는 그 설명과 안내가 부족하다. 더불어 이러한 기도에서 하나님의 영은 ‘불’이나 ‘능력’ 등으로 비인격적이고 제한적 이미지로만 인식되기 쉽다.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감성적으로 불을 지피는 기도 방식은 자신 내면의 깊은 소리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통성 기도의 방식으로만 대화하지는 않듯이 하나님과의 대화적 관계는 좀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기도, 아바(Abba) 아버지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인격적 교제라고 생각할 때 기도자가 인식하는 하나님 이미지는 기도 여정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화적 관계인 기도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의 기도와 가르침에서 청원자에게 도움이 될 하나님 이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기도의 형태는 다양하였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피와 땀을 쏟는 강렬한 기도를 드렸지만 한적한 곳으로 나가 홀로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고, 대중 앞에서 그들을 위한 간구를 하나님께 잠잠히 올려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드린 기도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시작 부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호칭인데, 이는 이전 유대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오리게누스(Origenus, 185-254)는 이 호칭의 독특성을 강조하면서 구약 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기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각주:2] 물론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표현된 본문들은 14차례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언서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은망덕한 죄악을 저지를 때에도 용서하는 아버지로 묘사된다.[각주:3]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보다는“우리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자신의 백성들을 용서하실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그들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을 통틀어 인격적 교제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더더구나 기도의 호칭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는 예수님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Abba, 아람어)로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였다. 성경의 기록에서 단 한번을 제외하고 모든 기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기도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듯 예수님은 인격적 교제와 만남의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 안에는 예수님의 자기 인식,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아버지, 나의 아빠 

    더욱 놀랍고도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나타난다. “이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알려주신 기도의 시작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맺으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아버지-자녀의 관계를 이제 제자들과 믿는 이들에게 수여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리겐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느니라.”(롬 8:15)는 바울의 본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이제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졌음을 강조한다. 이는 성도들도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는 기도의 관계로 나아가라는 부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부터 너희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을 알려주겠으니,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계약적 관계에서 삼위일체적 교제의 관계로

    중요한 것은 이 아버지-자녀의 관계가 단순히 부양과 피부양의 관계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 본대로 문제 해결자이자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는 구약의 예언서에서 이미 나타난다. 또한 세상에서 표현되는 부성의 사랑은 통성 기도 안에도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바’의 이름을 수여하신 예수님은 그 이상의 관계, 곧 하나님과의 삼위일체적 교제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예수님은‘아바’의 호칭에 내포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세 가운데 누리며 살아내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삼위일체의 연합은 역사적 예수님의 ‘현재’ 가운데 완전하게 현현하였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관계 맺으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 세계 가운데 계시해주셨다. 마찬가지로 이제 그 신비는 우리에게 수여된다. 이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적어도 하나님은 온전히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그 호칭으로 맺어가는 관계의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 때문에 온전한 기도가 된다. 바로 삼위일체의 흘러넘치는 사랑의 관계 안으로 하나님께서 기도자를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호칭 안에서 이제 하나님과 청원자는 아버지와 자녀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바(Abba)"로 부르는 관계는 단순히 부양자에게 책임과 도움을 요청하는 간청과 간구의 기도를 넘어선다. 선민과 언약 백성의 계약적 관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삼위 하나님께서 나누시는 사랑과 연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피노키오의 모험》이라는 작품에서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고 그 갈망으로 좌충우돌하며 여행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 모든 모험 이전에 이미 피노키오는 사실 그를 만든 제페토에게 있어서 사람을 초월하여 아들이었다.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만든 제페토가 사랑하였을 때 자녀로 나타난 것이다. 피노키오는 그 사랑을 알아가고 답해가는 가운데 실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이제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이와 같다. 주기도의 작은 호칭은 단순히 기도를 열어가는 시작 문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완전하게 여기시고 들어주신다는 뜻이며, 우리가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의 자녀됨이 또 다른 특별한 계시로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연인 : 아빌라의 테레사의 하나님

  기독교 영성 고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비유적 관계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일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 가운데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 16세기 스페인 영성가인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는 이 사랑의 관계를 가장 잘 묘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대표적 저술인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에서 하나님을 영혼 중심에 거하시는 사랑의 대상으로 표현한다. 영혼을 여러 개의 방들로 이뤄져 있는 투명한 수정궁으로 표현하면서 그 성의 가장 중심부에 왕이시자 사랑의 임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밝힌다.

“우리 영혼을 금강석이나 아니면 맑디 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궁성으로 보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마치 하늘에 자리가 많듯이 여러 궁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 모든 궁실 맨 한 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왕실로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그윽한 비밀이 거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빌라의 테레사, 《영혼의 성》, 1궁방, 1,3장.)

하나님과의 연인 관계는 ‘영혼의 성’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영적 여정의 전체 성격을 결정짓게 된다. 열정과 헌신, 친밀함의 여러 요소들이 여정 곳곳에서 드러나게 되며 임이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때론 이끌어 가시는 사랑의 관계 안으로 영혼은 더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목자이자 영적인 약혼과 결혼의 대상이 되셔서 영혼의 가장 중심 안에서 사랑의 연합을 이끌어 가신다.

  메리 플로리히(Mary Frohlich)는 내면성 분석(Interiority Analysis)을 통해 영혼의 중심 영역과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현대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녀는 인간의 의식 가운데 초월적 하나님과 직접적인(immediate)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월적 근간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영혼의 내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였다.[각주:4] 테레사의 표현으로 보면 이는 영혼이라는 수정 궁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방이라 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사랑하는 임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거둠 기도 : 임(님)을 향한 기도

  사랑하는 연인 관계의 비유는 구체적인 기도의 실천에까지 이어진다. 테레사는 16세기 당시 프란시스칸 전통 안에서 배운 거둠 기도를 실천하면서 더 이해를 키웠을 뿐 아니라 이를 구체적 기도의 방법으로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이 거둠 기도는 영혼의 중심 또는 인간 인식 영역 중 초월적 근간에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가 일어난다는 이해를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 

  테레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 안에 사랑으로 거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찾다가 결국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통성 기도로 크게 말하지 않아도 주님이 들으실 것이며], 오직 고요 속에 나를 두고 나 안에서 당신[하나님]을 보면 그만인 것입니다.”(《완덕의 길》, 28장 2절) 라고 일러준다. 구체적으로 거둠 기도는 세상의 여러 대상에 흩어져있는 자신의 의식과 마음을 영혼 안으로 거두어들이고 중심 안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 방법이다. 곧, “영혼이 제 모든 능력(기관)을 거두어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같이 머무는”(《완덕의 길》, 28장 4절) 의도와 행위 자체가 기도가 된다. 더불어 그녀는 이런 의도적 거둠 활동을 실천하게 되면 경험적으로 점차 수동적인 거둠과 고요의 상태로 변화된다고 확신한다. 영혼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영혼의 수고를 소중하게 보시고 사랑으로 불러주시게 되는데 그 부름으로 인해 더 수월하게 외적 대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이끌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거둠 기도는 하나님의 내적 임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수동적 형태의 기도라 할 수 있다. 능동적 거둠에서 점차 수동적으로 이끌림 받는 과정을 통해 기도자는 영적 대화의 상대이신 하나님의 현존을 더 인식하게 되고 그 교제와 관계는 깊어지게 된다. 테레사는 이 전환을 사랑의 관계로 명시하면서 영적 연합의 과정을 첫 눈에 반하는 강렬한 사랑, 영적 약혼, 지속적이고도 안정된 결혼까지 세 단계의 과정으로 표현한다.

 

잠잠히 하나님을 사랑하라(Keep Calm and Love God) 

  기도는 하나님과 맺어가는 영적 교제 그 자체이다. 오리게누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해주신 ‘아바’ 호칭에 담긴 의미를 주목하고 이제 하나님과 삼위일체적 교제의 관계까지 나아가라고 권면한다. 또한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떼어낼 수 없는 연합을 이뤄내시는 연인이신 하나님을 소개한다. 하나님과의 대화적 관계는 더 다양해지고 풍성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제한적인 하나님 이미지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긴 교회의 역사와 고전으로부터 새로운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관계 맺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각자의 영적 여정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끄셨던 ‘그 하나님’만큼이나 새로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고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때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하나님의 이름이나 이미지라 할지라도 앞선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그 안에 숨겨진 의미들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나타내시기 원하신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그분과 만나 더 사랑해야 한다. 


글쓴이 : 박세훈. 샌프란시스코 제일장로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중 (기독교 영성학)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7월 호에 실린 일곱 번째 글입니다.


  1. 1. 앤과 베리 울라노브, ≪제일의 언어(Primary Speech: A Psychology of Prayer)≫(Atlanta, GA: John Knox Press, 1982), vii. [본문으로]
  2. 2. Origen,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Alexandrian Christianity)≫(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7), 280. [본문으로]
  3. 3. Johachim Jeremias, ≪예수님의 기도들(The Prayers of Jesus)≫(Philadelphia: Fortress, 1978), 95. [본문으로]
  4. 4. Mary Frohlich, ≪신비가의 상호주관성(The Intersubjectivity of the Mystic)≫(Atlanta, GA: Scholars Press, 1993), 3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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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귀고 2세에게 배우는,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영성 목회’

6. 귀고(Guigo) 2세에게 배우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통한 ‘영성 목회’



한국교회 안에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이제 그리 생경한 단어가 아니다. 라틴어 '렉시오(lectio)'는 ‘모으다’, ‘필요한 것을 선택하다’, ‘눈으로 모아들이다’라는 뜻의 'legere'에서 온 명사형으로, ‘기록된 본문을 눈으로 훑어보아 마음에 모으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렉시오 디비나는 ‘거룩한 말씀을 눈으로 훑어 마음에 모으는 영적훈련’이다. 그러나 아직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렉시오 디비나를 QT(경건시간)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여 교회 내 대안적 프로그램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고대 사막의 수도자들에 의해 시작되어 12세기 카르투시오 수도회에서 윤곽을 갖게 된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아, 고전에서 주는 풍성한 깊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렉시오 디비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귀고(Guigo) 2세의 책, 《수도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Monks)를 근거로, 수도자들이 어떻게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Union with God)를 추구했는지를 살펴 볼 것이고, 이러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하나님 경험이 어떻게 목회 현장에 새로운 힘을 넣어줄 수 있는지 다루고자 한다. 


귀고(Guigo) 2세의 《수도승의 사다리》

엄밀히 말하면, 렉시오 디비나는 12세기 귀고(Guigo) 2세의 것도,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것도, 사막의 구도자들의 것도 아닌 하나님의 것이다. 일찌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렉시오 디비나의 형태를 받아들인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고백하면서 말씀으로 삶을 조명 받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성경읽기, 즉 머리로만 분석하고 지적 만족을 주는 접근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이 곳에서’ ‘내 것으로’ 삼는 ‘전유화’(appropriation)를 의미하는 '렉시오 디비나'라는 단어는 서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네딕트 (Benedict of Nursia, 480-547)가 처음 사용하였다. 베네딕트는 그의 책 《베네딕트 규칙서》 48장에서,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영성 깊은 독서(lectio divina)뿐만 아니라 육체 노동을 위한 구체적인 시간을 배정해야 한다.”[각주:1]라고 말하며, 'lectio divina'라는 단어를 처음 소개하였다.

그 후 아직 뚜렷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던 렉시오 디비나는 카르투시오회(Carthusian Order)의 귀고 2세에 의해 전형화된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귀고 2세의 생애에 대해 뚜렷히 알려진 바는 없다. 프랑스 그르노블 근처에서 1084년 창설된 카르투시오회의 초기 회원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 1173년 공동체의 책임자의 자리에 있다가 제 9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1180년 이 소임을 끝낸 후, 1188년 소천했다는 것 정도가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렉시오 디비나의 전체적인 윤곽이 그의 책 《수도승의 사다리》에 잘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귀고 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에서, 구도자들이 마치 사다리의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듯,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해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에 대해 네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 이 네 단계를 자세히 뜯어보자. 그가 말하는 렉시오 디비나는 무엇인가?

먼저, 독서(lectio)는 치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것인데 특히 자신의 에너지를 성경에 집중하는 것이다. 음식 먹는 것에 비유하자면, 이 단계는 음식을 입에 넣는 단계이다. 귀고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을 치밀하게 이해하기를 소망하면서, (이 독서의 단계에서는) 영혼이 달콤한 포도송이를 한 입 베어 물고 씹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마치 포도를 포도즙 짜개에 넣듯이 말이다. 이제 이 독서의 단계에서 (잠자고 있는) 지성의 모든 힘을 불러 일깨운다.”[각주:2] 이 단계는 렉시오 디비나의 첫 번째 단계로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그러나 집중해서 성경을 읽는(lectio) 단계이다. 

두 번째로 묵상(meditatio)은 말씀 안에 숨겨진 진리를 찾기 위해 이성의 도움을 받아 행해지는 적극적인 단계이다. 귀고는 이 단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묵상을 치밀하게 할 경우, 묵상은 영혼 밖에만 머물지 않고, 덜 중요한 것에 묶여있지 않고, 오히려 이 묵상으로 인해 내 영혼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며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철저히 내 마음을 식별하게 된다.”[각주:3]

성서를 통해 영성을 고취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을 마련한 샌드라 쉬나이더스(Sandra Schneiders)에 의하면, 이 묵상의 단계는 성경 본문을 내면화하는 단계로써 그것의 의미를 반추하거나 말그대로 묵상하는 단계라고 소개한다. 더 나아가 쉬나이더스는 중세 성서 주석들은 영적 깊이나 풍부한 상상의 폭(넓이)을 가지면서 이 묵상의 단계에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단계는 성경 본문의 연구를 넘어서 독자가 자신만의 상황(삶과 경험)속에서 본문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각주:4]

세 번째로 기도(oratio)는 묵상에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독자가 성경 본문 안에서, 혹은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귀고는 이 단계에서 우리의 영혼은 우리 스스로 지성과 감성의 감미로움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겸손하게 그리고 철저히 기도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렉시오 디비나는 이 기도의 단계를 통해 절정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 주님, 당신이 성경의 양식을 쪼개주셔야만, 당신이 그 속에서 당신 자신을 내게 보여주십니다. 그 때, 내가 더 당신을 보기 원할수록, 더욱 내가 당신을 보기를 사모할수록, 당신은 내게 성경의 글이 아닌, 그 껍데기의 의미가 아닌, 글 안에 숨겨있는 의미로, 그 깊은 말씀 안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각주:5]

마지막으로 관상(contemplatio)은 온 마음과 뜻이 하나님께 올려져서 그분에게 잠겨있게 되어 영원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앞의 단계의 깊이있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고 그것이 바로 영적 삶의 꼭짓점이자 본질의 영역인 관상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말씀을 연구하는 식의 시도, 즉 무엇인가는 알아가는 모든 시도를 내려놓고 독서와 묵상과 기도의 단계에서 만난 하나님과의 일치를 누리는 단계이다. 귀고는 이 관상의 단계에서 하나님은, 

“아주 달콤하고 감미로운 하늘의 이슬을 흩뿌려주시고, 가장 고귀한 향수로 기름부어주시고, 지치고 지리한 영혼을 회복시켜주시고, 갈급한 심령을 만족시켜주시고, 배고픈 영혼을 먹여주시고, 이 땅의 모든 염려를 잊게하시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다.”[각주:6]고 설명하고 있다. 쉬나이더스 역시 이 관상의 단계를 “완전히 만개한 꽃으로서, 어떤 그림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단계”[각주:7]라고 설명한다.   

또한 귀고는 이 네 단계는 분리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로의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다.

“독서(lectio)는 이 모든 단계의 기본이며, 묵상을 위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묵상(meditatio)은 찾아야 할 것을 더 주의 깊게 고려하면서 숨겨진 보물들을 파내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 보물을 꺼내는 것은 묵상의 힘으로는 안 되며 이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oratio)는 전심으로 기도 자체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이 보물을 간구하는 것인데, 이 보물은 바로 관상의 감미로움(The sweetness of contemplation)이다. 관상(contemplatio)은 이전 세 단계의 상급으로, 하늘의 감미로움으로 갈망하는 영혼을 촉촉이 적시는 것이다.”[각주:8]

이렇게 귀고 2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렉시오 디비나를 사다리의 이미지로 전형화해서, 각각의 단계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지 보여주었으며, 많은 구도자들을 말씀으로 초대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다.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영성목회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 귀고 2세의 렉시오 디비나를 목회 현장에 적용할 것인가? 성경의 권위가 강한 한국의 개신교는 19, 20세기 유럽과 미국의 대부흥을 거치면서 검증된 다양한 성경 프로그램을 가지고있다. 그 중에 ‘QT’는 제자훈련의 입문단계로 인식되어 개 교회의 성경공부반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귀납법적 성경연구’식 프로그램은 좀더 지적 접근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갈급함을 해결해주고 있다. 이 얼마나 소중하고 풍성한 영적 유산이란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훈련을 받아도 왜 우리는 변하지 않는가! 이 거대한 담론을 제한된 지면에 소개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할 수 없다. 단, 성경의 절대성이 강한 개신교가 이제까지 수많은 성경 프로그램을 해왔지만 삶에 깊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면, 지금까지의 접근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아닐까?

렉시오 디비나 소개는 이 지점에 방점을 찍고 한국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성경을 읽되 본문이 주는 의미보다는 독자의 삶의 정황에 더 큰 관심을 갖는 QT식 성경읽기가 아닌, 혹은 성경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삶에 적용하기 보다 본문 자체를 알아가는 정보적 관심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귀납법적 성경연구식 성경 읽기가 아닌, 본문을 철저히 읽고, 묵상하고, 기도로 올려드리며, 기도 중에 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해서 그 말씀이 철저히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렉시오 디비나는 영성 목회에 중요한 시작이라 하겠다. 

이렇게 성경을 기반으로 한 영성을 추구하는, 앞서 이미 언급한, 샌드라 쉬나이더스는 우리에게 좀 더 많은 들을거리를 제공한다. 쉬나이더스는 어떻게 크리스찬이 성경을 통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쉬나이더스는 성경의 역사적, 문학적 방법을 통해 얻은 정보들은 변화를 가져오기가 힘들고 오히려 성경 안으로 들어가서 성경의 세계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독자가 그 말씀 안에 자신을 완전히 열었을 때,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하고 그 때, 비로소 변화를 경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각주:9] 즉, 쉬나이더스 역시 귀고처럼 정보적(informative) 접근이 아닌 변화적(transformative) 접근으로 성경을 경험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성서읽기는 백화점식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머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정보 생산에 헐떡이던 모더니즘적 접근에 매여있는 한국교회에 큰 방향을 바꿀 영성 목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할례된 성도와 다음 세대는 더 이상 지식을 더하는 제자훈련식 프로그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은 ‘변화’에 있다. 내가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변하느냐? 이런 도전적 토양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영성 목회는 우리의 신앙 체질을 바꿀 수 있는 건강한 시도가 될 것이다. 말씀 안에 자신을 완전히 열어(lectio, meditatio), 말씀의 세계 안에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oratio), 그분 안에서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을 경험하는 것(contemplatio) 그래서 옛 삶을 벗고 새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영성의 진수라 하겠다. 


글쓴이 : 이경희.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새크라멘토 시온장로교회 목사, GTU 기독교 영성학 Ph.D Candidate.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6월 호에 실린 여섯 번째 글입니다.


  1.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지음, 권혁일·김재현 옮김, 《베네딕트의 규칙서》(KIATS, 2011), 91. [본문으로]
  2. Guigo II, Ladder of Monks and Twelve Meditations, trans. Edmund Colledge, O.S.A. and James Walsh, S.J, (Kalamazoo, MI: Cistercian Publication, 1981), 69. [본문으로]
  3. Ibid., 70. [본문으로]
  4. Sandra Schneiders, “Biblical Spirituality,” Interpretation 56, no. 2 (April 1, 2002): 140. [본문으로]
  5. 주: Guigo II, Ladder of Monks and Twelve Meditations, 73. [본문으로]
  6. Ibid., 74. [본문으로]
  7. Schneiders, “Biblical Spirituality”: 140. [본문으로]
  8. Guigo II, Ladder of Monks and Twelve Meditations, 79. [본문으로]
  9. Schneiders, “Biblical Spirituality”: 1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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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감리교 신도회의 규칙

감리교 신도회의 규칙: 

“선을 행하라, 악을 피하라, 모든 성회에 참석하라”




19세기 초 감리교 캠프 모임(Camp Meeting). Image from http://global.britannica.com/EBchecked/topic/378415/Methodism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91)가 이끌었던 초기 감리교 부흥 운동의 동인(動因)으로 ‘전격적 회심을 강조하는 열광적인 부흥 집회’를 꼽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는 초기 감리교 운동의 단편적인 모습일 뿐이다. 웨슬리가 옥외 설교(“field preaching”; 교회 건물이 없는 곳에서 열리는 대중 집회)를 중시했던 것은 사실이다. 공장 지역과 탄광 지대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던 당시 상황에서, 옥외 설교는 지역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렇게 대중 집회를 통하여 회심한 사람들을 신도회(Methodist societies)라는 공동체에 가입시켜 영적으로 돌보고 신앙적으로 훈련하도록 하는 일을 옥외 설교 이상으로 중시하였다. 그렇게 돌보지 않으면 모처럼 신앙적으로 각성한 사람들 대부분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는 것이 거듭 드러났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웨슬리가 이렇게 대중 집회와 공동체 운동을 결함시킨 것이 초기 감리교 성장의 중요한 동력이었으며, 신도회는 감리교 영성 형성의 중요한 장(場)이었다고 평가한다.[각주:1]


     웨슬리는 늘어나는 신도회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이들을 지역 단위로 묶어 연합신도회를 만들고, 1743년 5월 1일에는 이들을 위한 통일된 규칙을 발표하였다. “연합 신도회의 성격, 형태 그리고 규칙”(The Nature, Design and General Rules of the United Societies, 이하 “신도회의 규칙”)이 바로 그것이다.[각주:2] 오늘날 한국 교회에 소그룹 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대중적인 집회와 함께 훈련·규칙·공동체를 중시한 웨슬리의 통찰이 담긴 “신도회의 규칙”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속회(Class)에 참여하라


“신도회의 규칙”은 신도회의 목적에 관해서는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이 모임은 규칙적으로 모여서 함께 경건의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귐으로서, 함께 기도하며, 함께 권고의 말씀을 받으며, 사랑 안에서 서로를 돌보고 지켜주어 (to watch over), 서로의 구원을 함께 이루어 가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즉, 신도회는 친밀하고 온정적인 신도들 간의 유대를 경험하는 곳이었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회원들은 서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함께 격려하고 위로하는 “상호 권면”(mutual accountability)을 실천했다. 이를 위해, 웨슬리는 모든 신도회원들이 12명 단위(지도자 1인과 11명의 회원)로 된 속회라는 소그룹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보다 높은 수준의 신앙 훈련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밴드(Band)라는 소그룹을 별도로 두었다.


신도회는 또한 규율을 정하고 함께 훈련하는 공동체였다. “신도회의 규칙”은, 회원들은 


“첫째로, 악을 피함으로”(By doing no harm)

“둘째, 선을 행함으로”(By doing good)

“셋째, 모든 성회에 참여함으로”(By attending all the ordinances of God)


자신들의 “구원을 향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확증해야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큰 원칙들로 각 원칙 아래에는 구체적인 실천 덕목들을 두어 회원이 삶의 지침으로 삼도록 하였다. 

 


모든 악을 피하라


첫 번째 원칙은 신도회원이 된 사람은 “모든 종류의 악을 피하는(avoiding evil in every kind)”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지침이다. “신도회의 규칙”은, 이 원칙과 관련해서, 회원들이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피해야 하는 항목들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일(출20:7)

평일에 하는 일들, 물건을 매매하는 일을 주일에 함으로써, 주일을 더럽히는 것.

술에 취하는 일, 독한 술을 팔거나 사는 일, 그리고 그것을 마시는 일

싸움, 언쟁, 소란을 피우는 일, 신자들 간의 법적 다툼(고전6:6), 악을 악으로 갚는 일(벧전 3:9), 욕을 욕으로 갚는 일, 물건을 사고팔 때 많은 말을 하는 것(지나치게 흥정을 하거나, 값을 깎는 행위를 말함)

밀수품을 판매하거나 매입하는 행위

고리의 이자를 취하는 행위

무자비한 말이나, 무익한 대화, 특히 관리나 목사들에 대한 험담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는 행위(마7:1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아닌 것, 예를 들면, 금이나 다른 귀금속을 몸에 걸치는 일,  값비싼 옷을 입는 것.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없는 오락

하나님을 아는 일과 사랑하는 일에 적절치 않은 노래를 부르거나, 그런 책을 읽는 행위

세속적인 것에 쉽게 타협하는 행동이나 방종(self-indlugence)

땅에 보물을 쌓는 일.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돈을 빌리는 일 혹은 갚을 수 없는 외상을 지는 행위.


웨슬리는 이와 같이, 십계명, 산상 수훈 등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경건 생활의 덕목들을 회원들의 신앙 실천의 기본으로 삼도록 하였다. 또한, 회원들이 사회 속에서 신앙인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며 사는 데 지침이 되는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의미 있게 보인다.   



선을 행하라


     두 번째 원칙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을 다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능한 모든 종류의 선을, 모든 사람들에게 행하라.”는 원칙이다(갈6:10). 이를 위한 세부 규정들은 이웃 사랑과 선교적 삶에 관련된 지침들을 포괄하고 있다.  

이웃의 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대로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사람과 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가 도와주어라.

이웃의 영혼을 위하여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바르게 인도하고 권면하라. “우리의 마음이 죄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전에는 우리가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열광주의자들의 사악한 가르침을 철저히 배격하라.


여기서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 이채롭게 보인다. 하지만 이는 웨슬리가 평생 목회 활동 내내 열광주의자들의 주장을 경계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웨슬리가 그들의 주장들 중에도 가장 우려한 것은, 그들이 개인의 내적 주관적 변화의 체험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웃 사랑과 선교적 삶에 관계된 신앙 덕목들의 중요성을 경시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내적 경건과 외적 경건의 조화,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조화를 깨뜨리고, 올바른 신앙적 성숙을 저해한다는 점을 웨슬리는 간파한 것이다. 그는 이런 점을 “신도회의 규칙”에 반영함으로써, 신도회원들이 열광주의자들의 지나친 주장들을 분별하고 균형 잡힌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돕고자 하였다.  


또한 이 두 번째 범주에는 공동체 생활에 관련된 아래와 같은 지침들도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가족들과 믿음의 가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갈6:10). 그들을 고용하고, 그들의 물건을 사주고, 그들의 사업을 도우라….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회원들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직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지침들을 포함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대로 부지런히 절약하여 복음이 비난받지 않게 하라. 

인내로써 앞을 향하여 달려 나가고, 자신을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을 당하고, 세상에서의 모욕과 비난을 감수하라.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때, 사람들이 온갖 거짓말과 악한 말을 하리라.”는 것을 잊지 말라. 



모든 성회에 참석하라


     세 번째 원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려고 그분께서 친히 제정하신 모든 규례들(all the ordinances of God)에 참여함으로 “구원을 향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입증하라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공적 예배에 참석하라. 

성경 말씀을 받는 모임, 즉 말씀을 읽거나 강해하는 모임에 참여하라.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라. 

가족 기도와 개인 기도를 지켜라. 

성경을 탐구하는 일에 참여하라. 

금식과 절식을 지켜라.


이러한 신앙생활의 근본적 실천 덕목들을 명시적으로 규정해야 했던 데에는 앞에서 언급한 것 과 같은 열광주의에 대한 경계가 들어 있다. 열광주의자들의 사적·주관적 체험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신앙 실천들—예를 들면, 공적 예배, 성례전, 말씀 선포, 성경 묵상 등과 같이 공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마저 경시하는 경향을 띄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그릇된 가르침을 경계하면서, 올바른 신앙 성장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신앙 실천들의 토대 위에서, 그리고 신앙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여기서 분명히 하였다. 


     또한, 세 번째 원칙에는 신자들의 영적 성숙과 이웃 사랑의 실천과 같이, 첫째와 둘째 원칙에 속한 신앙 실천들이 인간의 독자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은혜와 성령의 능력에 응답하는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확증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에 더하여,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영국 국교회의 모든 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거기서 베풀어지는 성찬에 반드시 참여해야 함을 의무로 규정함으로서, 감리교 신도회가 영국 국교회에 속한 하나의 단체(evangelical order)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감리교의 개혁 운동이 분파주의나 분리주의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신도회의 규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신도회의 규칙”은 모든 신도회원들이 이 규칙을 철저히 준수해 줄 것을 당부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가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또는 습관적으로 위반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경고하여 알려줄 것이고 권면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들 가운데 더 이상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모든 감리교 신도회원들이 규칙에 동의하게 하고 이것을 지키도록 서로 권고를 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자들의 모임을 영적으로 건전하게 유지하고, 그들의 지속적인 영적 성장을 돕는 일에는 온정적이면서도 적절한 규율을 유지하는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웨슬리는 목회 경험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회심의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영적으로 성장하려는 열망이 자리 잡게 된다는 점을 확신하였다. 그는 회심을 단지 ‘죄 사함을 확증하는 순간’으로만 보지 않고 거듭남으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회심을 성령의 인도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의 새로운 탄생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듭난 사람들이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지와 격려와 영적 지도가 오가는 공동체가 필수적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신도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공동체였다. 웨슬리는 “혼과 몸이 사람을 만든다면, 성령과 훈련은 기독교인을 만든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대중 집회를 통해 회심한 사람들이 올바른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게 하는 일을 돕기 위해, 성서에 바탕을 둔 규율을 가지고 서로 권면하는 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신도회의 규칙”이 내적 경건과 외적 경건의 조화를 강조하였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웨슬리는 개인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의 신앙이 올바르고 조화롭게 성장하는 일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직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악을 피하라, 선을 행하라, 모든 성회에 참석하라”는 규율을 가지고 공동체 속에서 훈련하게 함으로써, 신자들의 개인적 경건의 추구가 공동체의 상호 돌봄과 지도 속에서 행해지게 하였고, 또한 신앙인으로서 사회의 성결에 책임을 다하는 것을 훈련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화를 강조한 감리교 부흥 운동이 근대 영국 사회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깊이 되새겨볼 점이다. 


18세기 영국의 상황과 오늘의 한국 교회 상황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회심한 사람들의 신앙 성장을 돕고자, 공동체를 만들어 개인적 경건과 사회의 성결을 훈련하도록 한 웨슬리의 통찰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글쓴이 : 남기정.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새열매연합감리교회 목사, GTU 기독교 영성학 Ph.D Candidate.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5월 호에 실린 다섯 번째 글입니다.


  1. T. 런연, 《새로운 창조》, 김고광 역 (1999), 4장; 김진두, 《웨슬리의 실천신학》 개정판 (2004), 5장; Richard P.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1995), Ch. 3; David Lowes Watston, “Methodist Spirituality,” in Protestant Spiritual Traditions, ed. Frank C. Senn (1986). [본문으로]
  2. John Wesley, “The Nature, Design, and General Rules of the United Societies (1743),” in The Methodist Societies: History, Nature, and Design, The Bicentennial Edition of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IX (1989), 67-75; 김진두, 《웨슬리의 실천신학》, 159-6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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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과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규칙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2천년의 역사를 넘어서 지금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들 중 하나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가 공동체인가라는 질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목회자들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적 공동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와 동시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열두 명의 제자공동체를 세운 일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서 열두 명의 제자들이 형성한 공동체가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공동체가 지닌 특징은 무엇인가? 공동체와 관련해서 신앙의 선배들이 영성사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참고한 두 개의 본문은 복음서에서 ‘열두 제자 파송’(마태복음 10:1-15)과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초대교회의 모습’(사도행전 2:42-47, 사도행전 4:32-37)일 것이다. 


  먼저, ‘열두 제자 파송’ 본문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제자공동체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7). 둘째,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에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주신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셋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여행하는 공동체였다. 넷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전도 여행 시에 돈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롭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 또 여행과 숙박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9-11). 다섯째,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6:7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둘씩 둘씩 보내셨는데 이 역시 전도 여행의 공동체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부가적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은 일차적으로 제자공동체에 주어진 기도문이라는 사실 역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서 제시된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제자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고 환경을 마련해달라는 요청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간구들은 제자공동체의 비전과 방향을 기억하고잘 따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고,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그리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는 제자공동체가 그 비전을 잘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이고 외적인 환경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다.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 본문들은 ‘오순절 초대교회’ 모습에서 어떤 공동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믿는 무리”의 공동체였다. 둘째, 초대교회 공동체의 영적지도자들인 사도들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영적 능력(“기사와 표적”(2:43)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신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셋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함께 교제, 성만찬 및 공동식사, 기도에 참여했다. 넷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공동소유와 나눔을 실천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 4:32-35 참고). 성경적 공동체는 위에서 살펴본 두 개의 본문 외에도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제자공동체의 대표적인 특징은 위에서 열거한 항목들 안에 잘 담겨져 있다.


영성고전에서 공동체 배우기

  교회의 역사는 성경적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가깝게 실현한 공동체는 12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가 이탈리아에서 세운 탁발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난 영성을 가장 잘 따른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마태복음 10:1-15의 제자공동체를 본뜬 탁발수도회의 설립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3-5세기 사막의 수도공동체와, 그 영향을 받아 설립된 6세기 유럽의 정주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들을 비롯해서, 한참 후인 근대에 설립된 메노나이트(Mennonite) 공동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지역교회들 가운데에도 나타났을 것이다.


  영성고전 가운데 공동체를 잘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책으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의 《베네딕트 규칙서》[각주:1]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의 《신도의 공동생활》[각주:2]을 들 수 있다. 《규칙서》는 서방교회 대부분의 정주수도회가 사용하는 규칙서가 되었고, 다른 수도회 및 공동체의 규칙서에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 독일 고백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본회퍼가 쓴 《공동생활》은 현대 개신교 교회의 교회론 연구 및 공동체 운동에서 필독서가 되었다. 이 두 권의 영성고전이 천착하는 제자 공동체의 특징들 가운데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참고할만한 내용들을 요약해 보자.



공동생활이 왜 필요한가?

 

첫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왜 공동생활이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는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을 모은 책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학교(schola)”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수도자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그리고 단번에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진정한 왕이신 주님 그리스도를 위한 전투에 임하기 위해 순종이라는 강하고 빛나는 무기로 무장”한 사람이다. 《규칙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룩한 순종이라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영성 훈련들이다. 베네딕트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 훈련장으로서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순종은 《규칙서》 총 73장의 내용 중 가장 앞부분인 다섯 번째 장에 배치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에 의해 순종이 남용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2장 수도원장의 자질”에서 수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자세를 특별히 주문한다. “수도원장은 결코 주님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거나, 결정하거나, 명령해서는 안 된다.” 수도원장은 “제자들에게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들을 말보다는 행실로 보여주어야 한다.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제자들에게는 말로써 주님의 명령을 알려주고, 고집스럽거나 어리석은 제자들에게는 삶의 모범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또 “수도원장은 수도원에서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제3장 조언을 얻기 위한 형제들의 소집”에서 수도원장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반드시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을 소집해서 그 사안에 대해 설명한 후에, 형제들의 조언을 듣고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순종을 요청하는 수도원장과 순종해야 하는 형제들 사이에는 이처럼 상호 책임과 상호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칙서》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지역교회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이 질문들이 경감식을 일깨운다고 느끼는 목회자들에게, 《규칙서》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침들을 많이 담고 있다.


 

다음으로, 본회퍼의 《공동생활》은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믿는 무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보이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이 은총에 참예하는 것은 아닙니다.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홀로 서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사귐(fellowship/koinonia)이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서 히틀러를 주님처럼 섬기고 협력하는 교회들을 잘못되었다고 용기 있게 비판하는 고백교회를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핑켄발데(Finkenwalde)라는 시골에 세워진 한 신학교에서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3년여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기록하였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사귐을 갖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대표적인 경험이었다. 공동생활처럼 기쁘고 은혜로운 것은 없다. 본회퍼의 핑켄발데 신학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시편 133:1의 말씀을 경험하는 현장이었다. “보라, 형제끼리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고!”(공동번역). 또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공동생활은 자연인의 사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영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자연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마는,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사귐은 반드시 나와 남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연적 욕망이 어느 틈에 스며들어와 기독교인의 사귐에서 “영의 힘을 박탈하고 교회에서 활동력을 거세해 버림으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 본회퍼는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를 통과한 사귐만이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동생활》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예배와 교제를 포함한 공동체 만남의 기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자연적인 욕구에 기초해서 서로를 직접 만나려고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사이에 둔 만남을 지향하고 있는가? 



공동체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 훈련들

  둘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영성 훈련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가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규칙서는 형제들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원칙들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제8장에서 제20장까지는 “성무일도”와 관련된 규정들을 다룬다. 성무일도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다. 시편 119:164,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하루 일곱 번씩 기도했다. 새벽기도(Lauds), 제1시(Prime), 제3시(Terce), 제6시(Sext), 제9시(None), 저녁기도(Vespers), 그리고 마지막 기도(Compline). 그리고 새벽 2시 또는 3시 이후에 일어나서 드리는 야간기도(Vigils)까지 합하면 하루 여덟 번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 시간에는 다수의 시편을 암송하고 성경을 봉독했으며 중간 중간에 찬송을 부르고 다른 기도문들도 사용했다. 제48장은 육체노동 및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위해 배정된 시간과 방법을 안내한다. 규칙서  따르면 형제들의 일상은 계절에 따라 시간 분량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 여덟 번에 걸친 기도, 여섯 시간 가량의 노동, 그리고 두 시간 이상의 독서로 이루어져있었다. 규칙서에 나오는 일상생활 규칙들은 일차적으로 6세기에 봉쇄 수도원에서 정주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일상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준수할 영성 생활 규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메조리 톰슨(Marjorie J. Thompson)이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천(Soul Feast)》에서 영성 생활 규칙을 리듬으로 이해한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자라가는 데 필요한 영성 훈련들을 시간과 결부시켜서 리듬화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본회퍼가 《공동생활》에서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그는 영성 훈련들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1)공동생활 훈련, (2)개인적인 훈련, (3)섬김의 훈련, 그리고 (4)죄의 고백과 성만찬. 제2장 “남과 함께 사는 하루”라는 제목 아래에 제시된 공동생활 훈련에는 아침 경건회, 식탁 교제, 노동, 정오기도, 그리고 저녁기도가 있다. 특히 아침 경건회 또는 아침 예배의 구성 요소들인 시편 기도, 성서 읽기, 찬양, 그리고 공동 기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제3장 “홀로 있는 날”에서 제시된 개인적인 훈련에는 고독과 침묵, 묵상, 그리고 중보기도가 있다. 제4장 “섬김”에서는 혀를 다스리기, 자기를 낮추기, 경청, 적극적으로 돕기, 서로 참고 용납하기,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기, 그리고 참다운 권위의 근거는 섬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제5장 “죄의 고백과 성만찬”은 죄고백의 중요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죄의 고백이 어떻게 성만찬을 준비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훈련은 20세기 초반에 그가 실천한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우리 시대에 가정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 공동체에 적용하기가 용이하다. 특히 한국 교회 목회 현장에 도전이 되는 부분은 시편 기도, 침묵, 경청, 죄의 고백과 성만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성경과 영성고전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마다 우리는 대단한 도전을 받는다. 철저하게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인간의 노력으로 설립한 공동체들 안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만 가능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본회퍼의 《공동생활》을 자주 읽고 목회자 자신과 목회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교회에 공동체의 본질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 이강학.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co.kr) 대표연구원이며,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영적 분별의 길》이 있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4월 호에 실린 네 번째 글입니다.



  1.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김재현 역 (서울: KIATS, 2011). 이하 《규칙서》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2.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이하 《공동생활》,이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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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스타고지(mystagogy): 신비에 눈뜨기

미스타고지(mystagogy): 

신비에 눈뜨기






영혼의 눈에 끼었던 /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어지며 /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 새삼 놀라웁고 // 창밖 울타리 한구석 /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 부활의 시범을 보듯 / 사뭇 황홀합니다. // 창창한 우주, 허막(虛莫)의 바다에 /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 - 구상, <말씀의 실상>.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고 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믿음은 '눈'(目)이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는 눈이다. 귀 기울여 말씀을 들으면 '믿음의 눈'이 열린다. 그런데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말한다, 믿음의 눈이 열리면 우리는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보게 된다.

    "영혼의 눈"이 밝아지면 만유일체가 우리에게 '보이는 말씀'이 된다. 어거스틴과 칼빈은 세례와 성찬, 즉 성사(sacrament)를 일컬어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이라고 했다. 시인은 만유일체가 '보이는 말씀'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의 노래에 따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은 성사(聖事)다. 거룩한 표징(sacrum signum)이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이기에 세상은 말씀 천지다. 믿음의 눈에는 그렇다. 믿음의 눈은 "손가락이 열 개인 것"에서 "이적"을 보며, "새로 피는 개나리꽃"에서 "부활의 시범"을 본다. 보며 놀라고, 보며 황홀해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연신 ‘할렐루야!'를, '아멘!'을 터뜨린다. 예배당 안에서 말씀을 들을 때 뿐 아니라, 예배당 밖에서 '보이는 말씀'을 보면서도 그는 그렇게 은혜를 받는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은혜를 받는 방편'(means of grace), 곧 성사이기 때문이다.

    성사를 행하는 교회의 전례(liturgy) 시간은 바로 이런 눈이 길러지는 시간이다.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세례의 물을 보면서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들어가셨다가 나오신 요단강 그 죽음의 강 물을 볼 줄 아는 사람,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보면서 거기서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예배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들꽃 한 송이에서 부활의 영광을, 십자가의 성흔(聖痕: stigmata)을, 창조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성사와 성찬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그런데 그 성사들에서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그 성사들이 표현하는 바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무 느낌도 없다면 "은혜 받았다"는 말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성사들이 표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말씀 말이다.

    예배 전례가 내가 느끼는 바를 잘 표현해주지 못한다며, 그래서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신도에게 랍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예배 전례가 내가 느끼는 바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전례가 표현하는 바를 내가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성사가 표현하는 바를 여실히 느낄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는 그 성사를 행하는 전례의 예절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한다. 초기 교회에는 그렇게 세례와 성찬례의 예절 하나하나의 의미를 밝혀 말해주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 있었다. 바로 '미스타고지'(mystagogy)가 그것이다. '미스타고지'는 그대로 옮기면 '신비 입문 교육'이라는 말인데, 초기 (헬라) 교회는 '성사'를 '미스테리온'(mysterion), 즉 '신비'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는 성사를 신비를 가리켜주는 거룩한 표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성사 전례의 영적 의미를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밝혀 말해주는 교육 활동(pedagogy)을 '신비 입문 교육'이라고 불렀다.


시릴의 「미스타고지 강론」


    초기 교회 미스타고지 현장을 엿보게 해주는 귀한 자료가 있다. 주후 4세기 예루살렘 교회의 주교였던 시릴(Cyril of Jerusalem)의 「미스타고지 강론」(Mystaogogic Catecheses)[각주:1]이 그것이다. 시릴은 23장으로 구성된 「교리 강론」(Catechetical Lectures)을 남겼는데, 1장부터 18장까지는 세례지원자(catechumen)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강론한 내용이고, 19장부터 23장까지는 부활절을 맞아 세례를 받은 새신자들에게 세례와 성찬례 예절의 의미를 강론한 내용으로서, 이 마지막 다섯 장을 따로「미스타고지 강론」이라고 부른다. 

    시릴은 세례와 성찬례를 '영적, 천상적 신비(Mysteries)'라고 부른다.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기 위함이다. 시릴은 세례는 단순히 죄 사함을 받는 것 훨씬 이상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롬 6:3) 것이요 "그리스도로 옷 입는"(갈 3:27) 것이다. 세례 때 옷을 벗는 건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린다"(골 3:9)는 뜻이다.

    세례 받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들은 이제 성찬에 참여한다. 성찬에 대한 강론을 시작하면서 시릴은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것은 내 몸이다" 말씀해주셨건만 어떻게 감히 성찬의 떡이 그리스도의 몸임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것은 내 피다" 말씀해주셨건만 어떻게 성찬의 포도주가 그분의 피라고 말하길 주저할 수 있습니까?


당시도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건 분명 '믿기 어려운' 일이었을 터다. 그러나 시릴은 묻는다, "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던 분께서 포도주가 피가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시릴은 말한다, 성찬은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은 혼인 잔치이며, "감각"(sense)은 성찬의 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볼 뿐이지만 "믿음"은 거기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본다.   

    시릴은 성찬 전례의 예절 하나하나의 뜻을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밝혀준다. "손을 씻는" 건 "죄된 행실을 씼는다"는 뜻이다. "서로를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서로 입맞춤 합시다" 하는 부름에 성도 간에 입맞춤을 나누는 것은 "서로의 죄를 용서"해주며, 함께 "영적으로 어우러지며", 서로 간에 행한 "모든 잘못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추방시킨다"는 의미이며,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다. 이 키스는 화해의 키스이며, 따라서 "거룩한 입맞춤"(고전 16:20)이며, 성도 간에 문안하는 "사랑의 입맞춤"(벧전 5:14)이다. 

    이 키스례(禮) 후, 집례자는 큰 소리로 "여러분의 마음을 드높이십시오" 하고 외치는데, 이는 이 "경외로운(awful) 시간"에 예배자는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골 3:2)해야 한다는 부름이며, 그러면 회중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높입니다"라고 응답하며 "이 세상 모든 염려를 다 내려놓고" 주님이 계신 하늘을 향해 영혼의 눈을 든다. 그러면 집례자가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하고 말하고, 회중은 "(감사드림이)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응답한다. 

    성찬은 '감사'(eucharist)의 예를 행하는 것이며, "주님을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시 34:3)는 일이다. 시릴은 지상의 교회가 드리는 찬양은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2-3) 외치는, 하나님의 보좌 주위의 스랍들의 찬양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감사와 찬양의 기도 후, 교회는 하나님께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시어(에피클레시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드리고, "교회의 평화와 세상의 안녕을 위해" 기도드리고, "앞서 잠든 이들을 추도"하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다함께 드린다. 

    이제 집례자는 "거룩한 것을 거룩한 이들에게"라고 말하는데, 시릴은 그리스도는 "본질상"(by nature) 거룩하신 분이지만,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함으로"(by participation) 거룩한 사람들, 즉 성도(聖徒)가 된다고 말한다. 성령을 통해 "거룩한 것"이 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라는 초대의 말은 노래로 불렸다. 노래하는 이(chanter)가 "성스런 멜로디"에 맞추어 노래했다, "(너희는)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시 34:8).

    시릴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올 때 "왼 손으로 오른 손을 받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마치 "보좌"로 왕을 받치는 듯 한 이런 손모양은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는 건 "왕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릴은 성도들에게 성찬의 떡을 받을 때 "아멘!"하고 받은 다음, 떡을 눈에 갖다 대어 "눈을 성화시킨"(hallowed your eyes) 다음 떡을 들라고 말한다. 


초대교회 성찬 모습. 로마의 칼릭투스 카타콤 벽화 (주후 3세기. A Eucharistic fresco, Catacomb of Callixtus).

신비 앞에서 


    예배는 우리의 "눈이 성화되는" 시간이어야 한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어"지고 이 세상 만사와 만물을 둘러싸고 있는 거룩한 신비에 눈 뜨게 되는 시간 말이다. 성사가, 전례가 궁극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은 결국 '신비'다. 구속의 신비, 창조의 신비 말이다. 세상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 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면 눈이 열린다. 만유일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보는 눈이, 말이다. 

    신비에 눈 뜨면 사람은 노래하고 춤추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은 예배한다. 예배는 노래하는 일이고 춤추는 일이다. 예배의 말은 실은 다 노래/시고, 예배의 동작은 실은 다 춤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보게 되면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다. 대신 노래가 터져 나온다. 찬양의 시가 터져 나온다. 몸으로 부르는 노래가 춤이다. 예배하며 일어서고 앉고 두 팔을 들고 무릎을 꿇고 하는 모든 동작이 실은 다 춤 동작이다. 내 안에 샘솟는 노래가 시켜서 하는 동작이다. 왜 일어서는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그리스도께서 내게 "일어나라!"(마 17:7)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왜 앉는가? 제 정신을 잃고 무덤 사이를 배회하던 내가 이제 "주의 발치에 앉아"(눅 8:35) 말씀을 들으려는 것이다. 

    예배자는 일어서고 앉고 하는 예배 동작이 표현해주는 바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주일 아침 예배당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이미 은혜를 받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이리 저리 방황하던 저, 이제 주님 앞에  가만히 앉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느라 여러 갈래로 흩어졌던 마음을 그는 '두 손을 모아' 다시 하나로 모은다. 그러다가 "이제, 우리 다함께 일어나 영광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하는 인도자의 부름이 들리면 그는 힘차게 '일어선다'. 그렇게 부활을 연습한다. 몸의 부활을. 

    예배 때 행하는 모든 예(禮) 하나하나의 뜻을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밝혀주고, 성도들로 하여금 성사를 '보이는 말씀'으로 체험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 필요하다. '미스타고지'가 필요하다. 예배를 성서적으로 영적으로 주해(exegesis)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자신이 먼저 신비에 사로잡혀 노래하듯 말하고 춤추듯 집례하는 예배 인도자다.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집회의 사회를 보는 것과 다르다. 예배 인도자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어야 한다. 그 떨림은 신비 앞에서의 경이의 떨림이요, 거룩을 대면하는 이의 경외의 “두렵고 떨림”이다. 그 떨림이 ‘영성’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예배의 영성을 배울 수 있는 책이 있다. 정교회 전례학자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 1921-1983)이 저술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복있는사람)인데 현대 미스타고지 저작의 고전이다. 슈메만은 묻는다, "그리스도께 이 세상에 가져오셨다고 우리가 믿는 그 새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슈메만은 말한다, 아니, 노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 "성만찬적인 삶"(eucharistic life)을 가져오셨다! 내 손에 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로 알아보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 곧 감사(eucharist)의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들을 "떼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 말이다(눅9:16).  자기 몸을 바쳐 사랑의 식탁을 차리는 삶 말이다. 그런 삶의 원형이신 분의 음성을 우리는 예배 때 듣는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받아서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다." 이 음성에 믿음으로 '아멘'하고서 예배당 밖을 나서면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다. 하늘과 땅이, 천사들과 예언자들이, 역사와 양심이 우리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 외치고 있는 세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만이 아는 세계다. 



글쓴이 : 이종태. 장로교 목사. 장로회신학대학원(M.Div.). GTU (Ph.D. Candidate, 기독교영성학).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co.kr) 연구원. 역서로 《순전한 기독교》,《가르침과 배움의 영성》,《메시지 성경》등이 있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3월 호에 실린 세 번째 글입니다.


  1. St. Cyril of Jerusalem's Lectures on the Christian Sacraments: The Procatechesis and the Five Mystagogical Catecheses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7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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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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