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바(Abba)그리고 임(님): 관계적 기도를 위한 하나님 이미지

오랜 기간 한국 교회의 자랑 중 하나는 모든 성도들이 온 마음으로 드리는 통성 기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밤을 깨우며 뜨겁게 드린 철야 기도와 온 힘을 다해 드리는 통성 기도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유산 중 하나로 인식되어왔다. 1907년 시작된 평양 대부흥을 계기로 통성 기도를 함께 드리는 기도와 죄고백의 시간으로 인식하면서 많은 교회들은 그 당시의 기도 모델을 지향하고 기도의 불길을 지펴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더불어 현재 상당 수의 교회에서 다함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 시간은 교회 성장 활력을 돋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기도와 찬양 시간의 특징은 주로 감성을 자극하여 더 진솔한 마음으로 자신의 문제와 현안을 대면하게 하고 그에 대한 솔직한 자기 응답과 고백을 이끌어내도록 도전한다는 점이다. 


원시적 언어에서 교제의 언어로

    이러한 감성 중심적인 통성 기도는 각 개인 안의 진실한 갈망과 원초적 소망을 일깨우는 점에서는 분명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기도에 관해 심리학적 연구를 진행한 앤 울라노프와 베리 울라노프(Ann & Barry Ulanov)는 기도란 본연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언어 형태 이전의 원시적 의사소통으로서 “제일의 언어(primary speech)”라고 정의한다.[각주:1] 내면 깊이 자리한 갈망은 언어를 초월하여 기도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감성을 일깨워 드리는 통성 기도의 형태는 자기 본연의 목소리를 발현하는데 큰 유익이 있다.

    그러나 기도가 가진 중요한 특성, 곧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인격적 교제의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이런 기도의 형태로만 일관하는 기도는 한계를 나타낼 수 있다. 교제의 기도 안에서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만 드러낼 것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히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성 기도는 기도자가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에 반응하여 교제하는 동시에 자기 변화의 길로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해서는 그 설명과 안내가 부족하다. 더불어 이러한 기도에서 하나님의 영은 ‘불’이나 ‘능력’ 등으로 비인격적이고 제한적 이미지로만 인식되기 쉽다.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감성적으로 불을 지피는 기도 방식은 자신 내면의 깊은 소리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통성 기도의 방식으로만 대화하지는 않듯이 하나님과의 대화적 관계는 좀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기도, 아바(Abba) 아버지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인격적 교제라고 생각할 때 기도자가 인식하는 하나님 이미지는 기도 여정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화적 관계인 기도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의 기도와 가르침에서 청원자에게 도움이 될 하나님 이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기도의 형태는 다양하였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피와 땀을 쏟는 강렬한 기도를 드렸지만 한적한 곳으로 나가 홀로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고, 대중 앞에서 그들을 위한 간구를 하나님께 잠잠히 올려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드린 기도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시작 부분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호칭인데, 이는 이전 유대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오리게누스(Origenus, 185-254)는 이 호칭의 독특성을 강조하면서 구약 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기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다.[각주:2] 물론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표현된 본문들은 14차례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언서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은망덕한 죄악을 저지를 때에도 용서하는 아버지로 묘사된다.[각주:3]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보다는“우리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자신의 백성들을 용서하실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그들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을 통틀어 인격적 교제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더더구나 기도의 호칭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는 예수님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Abba, 아람어)로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였다. 성경의 기록에서 단 한번을 제외하고 모든 기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기도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듯 예수님은 인격적 교제와 만남의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 안에는 예수님의 자기 인식,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아버지, 나의 아빠 

    더욱 놀랍고도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나타난다. “이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알려주신 기도의 시작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맺으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아버지-자녀의 관계를 이제 제자들과 믿는 이들에게 수여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리겐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느니라.”(롬 8:15)는 바울의 본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이제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졌음을 강조한다. 이는 성도들도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는 기도의 관계로 나아가라는 부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부터 너희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을 알려주겠으니,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계약적 관계에서 삼위일체적 교제의 관계로

    중요한 것은 이 아버지-자녀의 관계가 단순히 부양과 피부양의 관계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 본대로 문제 해결자이자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는 구약의 예언서에서 이미 나타난다. 또한 세상에서 표현되는 부성의 사랑은 통성 기도 안에도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바’의 이름을 수여하신 예수님은 그 이상의 관계, 곧 하나님과의 삼위일체적 교제의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예수님은‘아바’의 호칭에 내포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세 가운데 누리며 살아내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삼위일체의 연합은 역사적 예수님의 ‘현재’ 가운데 완전하게 현현하였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관계 맺으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 세계 가운데 계시해주셨다. 마찬가지로 이제 그 신비는 우리에게 수여된다. 이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적어도 하나님은 온전히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그 호칭으로 맺어가는 관계의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 때문에 온전한 기도가 된다. 바로 삼위일체의 흘러넘치는 사랑의 관계 안으로 하나님께서 기도자를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호칭 안에서 이제 하나님과 청원자는 아버지와 자녀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바(Abba)"로 부르는 관계는 단순히 부양자에게 책임과 도움을 요청하는 간청과 간구의 기도를 넘어선다. 선민과 언약 백성의 계약적 관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삼위 하나님께서 나누시는 사랑과 연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피노키오의 모험》이라는 작품에서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고 그 갈망으로 좌충우돌하며 여행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 모든 모험 이전에 이미 피노키오는 사실 그를 만든 제페토에게 있어서 사람을 초월하여 아들이었다.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만든 제페토가 사랑하였을 때 자녀로 나타난 것이다. 피노키오는 그 사랑을 알아가고 답해가는 가운데 실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이제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이와 같다. 주기도의 작은 호칭은 단순히 기도를 열어가는 시작 문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완전하게 여기시고 들어주신다는 뜻이며, 우리가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의 자녀됨이 또 다른 특별한 계시로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연인 : 아빌라의 테레사의 하나님

  기독교 영성 고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비유적 관계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일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 가운데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 16세기 스페인 영성가인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는 이 사랑의 관계를 가장 잘 묘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대표적 저술인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에서 하나님을 영혼 중심에 거하시는 사랑의 대상으로 표현한다. 영혼을 여러 개의 방들로 이뤄져 있는 투명한 수정궁으로 표현하면서 그 성의 가장 중심부에 왕이시자 사랑의 임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밝힌다.

“우리 영혼을 금강석이나 아니면 맑디 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궁성으로 보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마치 하늘에 자리가 많듯이 여러 궁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 모든 궁실 맨 한 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왕실로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그윽한 비밀이 거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빌라의 테레사, 《영혼의 성》, 1궁방, 1,3장.)

하나님과의 연인 관계는 ‘영혼의 성’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영적 여정의 전체 성격을 결정짓게 된다. 열정과 헌신, 친밀함의 여러 요소들이 여정 곳곳에서 드러나게 되며 임이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때론 이끌어 가시는 사랑의 관계 안으로 영혼은 더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목자이자 영적인 약혼과 결혼의 대상이 되셔서 영혼의 가장 중심 안에서 사랑의 연합을 이끌어 가신다.

  메리 플로리히(Mary Frohlich)는 내면성 분석(Interiority Analysis)을 통해 영혼의 중심 영역과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현대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녀는 인간의 의식 가운데 초월적 하나님과 직접적인(immediate)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월적 근간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영혼의 내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하였다.[각주:4] 테레사의 표현으로 보면 이는 영혼이라는 수정 궁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방이라 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사랑하는 임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거둠 기도 : 임(님)을 향한 기도

  사랑하는 연인 관계의 비유는 구체적인 기도의 실천에까지 이어진다. 테레사는 16세기 당시 프란시스칸 전통 안에서 배운 거둠 기도를 실천하면서 더 이해를 키웠을 뿐 아니라 이를 구체적 기도의 방법으로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이 거둠 기도는 영혼의 중심 또는 인간 인식 영역 중 초월적 근간에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가 일어난다는 이해를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 

  테레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 안에 사랑으로 거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찾다가 결국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통성 기도로 크게 말하지 않아도 주님이 들으실 것이며], 오직 고요 속에 나를 두고 나 안에서 당신[하나님]을 보면 그만인 것입니다.”(《완덕의 길》, 28장 2절) 라고 일러준다. 구체적으로 거둠 기도는 세상의 여러 대상에 흩어져있는 자신의 의식과 마음을 영혼 안으로 거두어들이고 중심 안에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 방법이다. 곧, “영혼이 제 모든 능력(기관)을 거두어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같이 머무는”(《완덕의 길》, 28장 4절) 의도와 행위 자체가 기도가 된다. 더불어 그녀는 이런 의도적 거둠 활동을 실천하게 되면 경험적으로 점차 수동적인 거둠과 고요의 상태로 변화된다고 확신한다. 영혼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영혼의 수고를 소중하게 보시고 사랑으로 불러주시게 되는데 그 부름으로 인해 더 수월하게 외적 대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이끌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거둠 기도는 하나님의 내적 임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수동적 형태의 기도라 할 수 있다. 능동적 거둠에서 점차 수동적으로 이끌림 받는 과정을 통해 기도자는 영적 대화의 상대이신 하나님의 현존을 더 인식하게 되고 그 교제와 관계는 깊어지게 된다. 테레사는 이 전환을 사랑의 관계로 명시하면서 영적 연합의 과정을 첫 눈에 반하는 강렬한 사랑, 영적 약혼, 지속적이고도 안정된 결혼까지 세 단계의 과정으로 표현한다.

 

잠잠히 하나님을 사랑하라(Keep Calm and Love God) 

  기도는 하나님과 맺어가는 영적 교제 그 자체이다. 오리게누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해주신 ‘아바’ 호칭에 담긴 의미를 주목하고 이제 하나님과 삼위일체적 교제의 관계까지 나아가라고 권면한다. 또한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떼어낼 수 없는 연합을 이뤄내시는 연인이신 하나님을 소개한다. 하나님과의 대화적 관계는 더 다양해지고 풍성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제한적인 하나님 이미지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긴 교회의 역사와 고전으로부터 새로운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관계 맺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각자의 영적 여정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끄셨던 ‘그 하나님’만큼이나 새로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고 사랑하시기를 원하신다. 때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하나님의 이름이나 이미지라 할지라도 앞선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그 안에 숨겨진 의미들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나타내시기 원하신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그분과 만나 더 사랑해야 한다. 


글쓴이 : 박세훈. 샌프란시스코 제일장로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중 (기독교 영성학)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7월 호에 실린 일곱 번째 글입니다.


  1. 1. 앤과 베리 울라노브, ≪제일의 언어(Primary Speech: A Psychology of Prayer)≫(Atlanta, GA: John Knox Press, 1982), vii. [본문으로]
  2. 2. Origen,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Alexandrian Christianity)≫(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7), 280. [본문으로]
  3. 3. Johachim Jeremias, ≪예수님의 기도들(The Prayers of Jesus)≫(Philadelphia: Fortress, 1978), 95. [본문으로]
  4. 4. Mary Frohlich, ≪신비가의 상호주관성(The Intersubjectivity of the Mystic)≫(Atlanta, GA: Scholars Press, 1993), 3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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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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