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상처

     사순절, 주님의 성흔을 묵상하는 때입니다. 

 

     성흔(stigmata)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말하지요. 예로부터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 성흔을 묵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예수의 상처까지도 닮기 원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stigmata)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말했고, 예수를 닮기를 추구했던 성 프란체스코(Fransis of Assisi: 1181-1226)는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베르나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몸에 오상(五傷)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실제로 육체에 성흔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두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고난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고백을 그들은 정말 급진적인 삶으로 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에 실제로 성흔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흔이나, 나의 성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성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흔(聖痕)



누가 풀잎을 자르는가

누가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을 칼로 찌르는가

누가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가


이슬의 피가 흐른다

이슬의 붉은 피가 풀잎을 적시고

하늘과 땅과 모든 인간을 적신다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으나

나는 내 상처가 성흔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이슬의 손에 못을 박았으므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으므로


-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80.



     시인은 성화 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거리나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려진 풀잎에서, 그리고 풀잎 위의 이슬에서 성흔을 봅니다. 나아가 이슬의 붉은 피가 하늘과 땅의 모든 인간을 적신다고 말합니다. 보통 민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신비하게 여겨져 온 해·달·별이 아니라, 또는 소나무나 백로처럼 지고하게 여겨져 온 동식물이 아니라, 하찮고 흔하게 여겨져 온 풀잎과 이슬에서 거룩한 상처와 붉은 피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서울의 예수〉(1982)에 나온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라는 표현을 생각나게 합니다.


     풀잎은 인간의 욕심에 훼손된 자연 세계일 수도 있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권력자들의 폭압에 짓밟힌 민초(民草)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은 이슬처럼 맑고 죄가 없으심에도 붉은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이슬처럼 연약한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가장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5:40, 45).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라는 3연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이처럼 시인은 소위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상처에서, 특히 풀잎과 같이 낮고 흔한 사람들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성흔을 봅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당신이 상처 입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사53:4), 인간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시인은 다른 이들의 상처는 성흔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상처는 성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는 1연에서 누가 풀잎을 자르고,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었는지 물었지요. 그런데 3연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 이슬의 손에 못을” 박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죽인 죄보다 주님의 사랑은 더욱 크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요(눅23:34). 그러므로 시인의 고백은 그의 신학적 이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연민에 빠지면, 다른 이들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에, 만약 우리가 성화나 영화 속의 그리스도의 상처만 보고, 세상의 풀잎들과 이슬들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제대로 묵상하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만 아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3년 전 고난 주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세월호는 이 사순절에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몸에 많은 상처들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마치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희망과 기쁨을 잃었던 이들의 상처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었던 모든 이들의 상처가 그리스도의 성흔, 거룩한 상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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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피할수 없는 십자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6.02.13 14:33

그러므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다. 모든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 우리가 짊어지기 때문에 십자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십자가는 우리와 함께 한다. 어디로 향하든지, 위든, 아래이든, 안에서든, 밖에서든, 당신은 십자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12장. 십자가의 왕도.


어김없이 사순절이 돌아왔다. 
종교적 절기로 지나치기엔
삶의 주변에 흩어져있는 고통들이 다시금 
십자가를 가리킨다. 

 

신학공부 입문을 함께 한 동료 목사님의 사모님이,  
아직 험한 세상을 경험하지도 못한 세 아들을
남겨두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난 3여 년의 투병 생활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시간이었으리라.
그 과정을 먼발치에서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서 바라보기엔 두려웠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십자가를 바라보기가 부담스럽다. 
내 삶이 편안해졌다는 신호일 터,
편안한 순간 또한 잠시라는 사실을
영성가는 다시 확인시켜준다. 

십자가를 직시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두려움으로 남게 된다.
십자가를 직면하여 끌어안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진실한 면들을
받아들이게 될 지 모른다. 

편안과 안락이 축복이라 여기는
영적인 탐닉으로부터 벗어나
삶에 이미 충만한 십자가를 
인지하고 끌어 안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는 어디에서든 발견된다. / 구름 위 햇살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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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씨앗 (C. S. 루이스)

한 줄 묵상 2014.03.07 03:00


"물론 우리는 고난이 올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배워 알고 있습니다. 미약하나마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바치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1956년 4월 26일자)


"늘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처럼 모든 좋지 않은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발적인 가난이나 참회고행 못지 않은 영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지요."(1956년 8월 3일) 


"부인께서도 분명 아시겠지만 (고통이나 재정적 어려움 등에 직면했을 때) 삶을 하루하루 시간시간 살아 내는 것이 비결입니다. 과거나 미래를 현재에 끌어들이지 않고서 말입니다. 마치 최전선의 군인들처럼 '폭격도 그친 상태고, 비도 내리지 않고, 식량도 도착했으니 마음껏 즐기자'. 이런 자세 말이죠. 사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지요. '그날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고요."(1957년 10월 20일자)


"[스스로를] 땅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씨앗이라고 …… 생각해 보세요. 정원사가 정한 때에 꽃으로 피어나기를, 진짜 세상으로 올라가기를, 진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씨앗 말입니다. 저는 현세의 삶은 그 세상에서 돌이켜보면 비몽사몽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꿈나라에서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새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순간보다 지금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1963년 6월 28일자) 


- C. S. 루이스, <루이스가 메리에게>(서울: 홍성사, 2009)


사순절(Lent)이다. 

'고난' '훈련' '참회' 등이 주제인 절기다. 

어찌보면, 우리 인생 자체가 사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하루치의 고난이 견딜만하다. 

오늘의 fast 뒤에는 feast가 있을 것이기에. 


그래, 믿음으로 살자. 

하루하루 살자. 


하루하루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하루하루

베풀어주시는 일용할 행복에 감사드리며, 

하루하루

허락하시는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며


그렇게 하루하루


이 '40일' 동안

하루하루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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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파고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한 줄 묵상 2013.08.23 05:27

분별력과 선견지명이 있는 부모는 그들의 사랑하는 아이를 인생의 큰 파고에 내어 놓을 때, 그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방주에다가 안전하게 둔다(출 2:3). 각양각색의 나무판들로 짜여진 그 방주는 서로 다른 다양한 교육을 뜻하는데, 이것은 삶이란 파도 위를 떠다니게끔 붙들어 준다.   


-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395) , 《모세의 생애》, 2권 7.


온실의 화초는 사계절이 없다. 

제한되고 짜여진 환경을 맛볼 뿐이다.

겉으로 매끈해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손에 쥐어 보면 줄기가 허약하고 향내가 빈약하다.


산전수전, 

야생화를 보라.

비바람을 견딘 인고가 묻어있다. 

각양각색 벌과 나비들을 환대했던 온화함, 넉넉함이 스며있다. 

줄기는 단단하고 코를 쏘는 향내가 몸을 둘렀다.


가시를 세워 다가오는 삶이란 거친 파도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줄 신앙은 무엇으로 엮여질까? 


기쁨, 슬픔, 걱정, 희망, 안전, 외로움

다양한 얼굴로 다가오는 삶의 조각들을

마음을 열어 환영해 보자.

내가 싫고 힘들어 하는 것들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 달라고 소리칠 일 아니다.

대신 양식으로 삼아보자.


이제 이틀 후면

19년간 함께 있었던 큰 딸이 기숙사로 떠나간다.

처음 집을 떠나 생소한 환경을 잘 견뎌낼까?


이 아이가 삶의 파고를 즐길만한

교육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도록 두 손을 모은다. 


/ 임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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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처럼

속사람이 강해지기를 (조지 폭스)

한 줄 묵상 2013.04.26 18:52

감옥을 향해가고 있을 , 주님의 말씀이 내게 다가왔다. "나의 사랑이 항상 너에게 있고, 너는 나의 사랑 안에 있다." 나는 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혔고, 안에 있는 사람이 굉장히 강건해졌다.


조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Autobiography of George Fox, chapter III. 1649


신앙인들의 매일의 삶은 때때로 감옥을 향해 걸어가는약한 자의 모습일 때가 있다. 나를 헤칠 일들 또는 내가 두려워하는 일들이 앞에 놓여있지만 피하지 않고 나아가야 때와 같이, 세상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길을 걸어가야 때가 얼마나 많은가조지 폭스가 신앙적인 이유로 감옥에 들어가게 때에,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갑작스레 그를 휘감았다. "나의 사랑이 항상 너에게 있고, 너는 나의 사랑 안에 있다."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 그보다 내가 항상 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말씀, 느낌, 감격은 기독교 역사를 흘러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평안과 능력을 주었다. 그리고 조지폭스가 표현 한대로 ' 사람이 강건' 지는 경험을 하였다오늘도 때로 감옥 같은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동료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머물고 내가 분의 사랑 안에 있음으로  우리 안의 사람이 강해지기를 소망해본다.  / 소리벼리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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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한 욕망 (본회퍼의 옥중서신)

한 줄 묵상 2013.04.14 07:25

"인간은 신을 상실한 세계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이 지점이야말로 종교적인 인간이 하나님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과는 전면적으로 반대되는 지점이다. …… 크리스챤들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할때 이교도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 본회퍼 지음(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문익환 옮김, 

<옥중서신> (The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226, 


히브리 문학은 '인간(ish)'이라는 단어가 '욕망(esh)'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인간(ish)'은 어원 자체에서부터 '욕망(esh)'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을 보면[각주:1], 인간의 탐욕(욕망)은 인간 내부에서부터 스물스물 올라오기 보다는 외부로 부터, 즉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욕망은 타인이 가진 것에 자극 받아 그것을 모방해서 생겨나고, 인간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그것을 소유한 대상과 긴장관계를 형성해 결국 갈등이나 폭력에 이른다. 이 이론은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르네 지라드(René Girard)모방 욕구’(Mimetic Desire)이론이다.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우리의 욕망이 무조건 외부의 자극에 의해 생긴다는 모방욕구이론을 절대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 우리는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들을 무조건 모방하며 탐욕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내 동료와 선후배가 욕망하면 나도 그러해야하고, 이 세상이 그렇게 욕망하면 나도 더이상 질문하지않고 그렇게 욕망하고, 더 좋은 직장, 더 편한 미래, 더 많은 돈벌이와 박수소리를 찾아다니는 그들의 욕망에 묻혀 나도 그렇게 욕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도 없는 내가 그들의 허영과 함께 세상 속을 떠돌아 다니고 있지는 않는가? 작금의 신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들의 욕망이 그러하지는 않은가? 


본회퍼는 교회가 욕망하는 것들이 당시 독일교회처럼 자신들의 입신과 세속적 영달이라면, 그런 교회는 세상의 쓰레기가 될 것이라고 질책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차라리 욕망하려면 좀더 고상한 것을 욕망하라고 권고한다. 신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욕망을 하라!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준엄히 권고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처럼 낮은 가치들을 구걸하지 말고,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높은 가치를 욕망하라고 권고한다./ 나무 잎사귀 이경희

 

  1.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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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밀, 야수, 그리고 빵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한 줄 묵상 2012.09.30 02:35
  •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의 밀이고 우리의 운명을 부서지고 갈리는 것이며 우리의 결국은 그분의 빵이 되는 것이다...그리고 다시 누군가의 양식이 되어고 누군가를 살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의 의미, 제자의 길...많은 것이 떠오르지만, 감히 뭐 보텔말이 없이 그저 숙연해지네요...이런 신앙의 선현들이 있어 바라볼 수 있는 것마저 복이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새결새김 2012.10.01 03:55 신고

"저는 모든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당부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방해하지 않는다면, 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기쁘게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간청하니 저에게 적절하지 않은 호의를 베풀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야수들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야수들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밀입니다. 그리고 야수의 이빨에 갈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순전한 하나님의 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of Antioch, ? ~ ca. 108), Letter to the Romans, Ch. 4.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00년을 전후해서 시리아에 위치한 안디옥의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 황제 때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사형을 선고 받고 로마로 압송을 당했다. 그는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수들의 먹이가 될 예정이었다. 로마로 붙잡혀 가는 도중에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을 구출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그대로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놓아두라고 부탁하였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이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순교를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편지 곳곳에서 절절하게 배어나왔다.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밀'이고, 운명은 '야수의 이빨에 갈리는 것'이며, 소망은 '하나님의 빵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열망과 용기는 조그만 어려움에도 쉽게 낙심하고, 역경을 피하고 싶어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이그나티우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렇게 말뿐만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였던 이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을 자신들의 죽음으로 구현해내었다(요한복음 12:24). 물론 이그나티우스의 순교에 대한 이런 열망은 로마시대의 박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피어난 것이지만, 그의 편지에 담긴 진지함과 용기는 오늘 나의 정체성과 가야할 길과 소망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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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한 시간만 나와 함께 있을 수 없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2.09.21 05:24
  • 외롭게 공부하다가 이젠 많은 성도님들과 함께 목회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 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것 같고, 그냥 예배당에 앉아 조금의 무서움, 조금의 절망감, 그런 기분이 엄습할 때...
    제자 중 한명도 함께 기도하지 못했던 그 시간, 예수님이 물으신 "한 시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니?" 하는 그 말씀은 그 고독과 애탐의 깊이가 얼마였을까하는 물음을 줍니다.

    BlogIcon 소리벼리 2012.09.18 14:50 신고
  •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 원한 고난, 그 만큼 고귀한 것이겠지요.

    BlogIcon 바람연필 2012.09.21 06:25 신고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만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말은 종교적인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했는 지를 보여주는 아주 분명한 실례가 된다……하나님은 고난을 나누기 위해 인간을 부르신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1944년 7월 18의 글.




모두가 빠른 걸음으로 예루살렘 상경길에 오르기 시작한다.

조금 뒤쳐지면 다른 몸뚱어리에 의해 예수님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에

모두 잰걸음으로 예수님의 주변을 사수한다.


호산나 소리가 먼 발치에서부터 들려온다.

'아차 늦었구나' 

군중들에 의해 떠밀려 난,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은 

재빨리 예수님의 옆자리를 꿰차고 다짜고짜 들이댄다.

'당신의 영광의 날, 내 아들들에게 한 자리씩 내어 주소!'


모두가 영광의 자리를 탐내며 예수께로 다가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과 다른 곳, '골고다 언덕'만을 응시하신다.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이 고난의 시간을 함께 보내줄 자를 찾고 있건만,

이 땅의 몸뚱어리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입시에, 결혼에, 승진에, 사업에 '대박' 만을 

꿈꾸고 있다.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 부름을 받았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인생 역전만을 꿈꾸고 예수를 이용한다.

그 때와 똑같이 또 속고 있는 우리 주님! /  나무 잎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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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약한 병사의 고백 (주기철)

한 줄 묵상 2012.09.08 01:25
  • 목사가 되었어도 언제나 작은 문제 앞에 연약함을 느낍니다. . 영원히, 영원히 난 문제 앞에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연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앞에 내 연약함을 내어 드리고 그 분께 나의 삶에 들어오시도록 간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말씀에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BlogIcon 소리벼리 2012.09.08 07:56 신고

나같이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내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 뿐입니다……주님을 위해서 오는 고난을 내가 지금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주기철 (1897-1944), <오종목의 나의 기원>.

 



나이를 조금씩 더 먹을수록 삶이 이전보다 더욱 힘들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내게 닥쳐오는 어려운 일들이 짧은 시간에 끝나지 않고 오랫동안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님은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 번에 끝난다면 이길 수 있지만,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난은 견디기가 어렵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분은 결국에는 장기간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순교의 꽃을 피웠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오랜 기간의 고난을 이겨내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분은 먼저 자신이 강철 같은 투사가 아니라 연약한 약졸임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그 고난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또한 그분은 지금 고난을 피하고 평안과 즐거움을 누린다면 나중에 주님의 얼굴을 뵐 낯이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비단 일제치하 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유진 피터슨의 책제목처럼 우리의 영적 여정은 한 방향으로 가는 오랜 순종”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의 길이다. 그 길을 걸어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님을 뵐 면목이 생긴다. 그길을 끝까지 걸어 갈 수 있는 이는 주님만을 의지하는 약한 병사이다. /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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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그분의 나를 다루심 (조지 폭스)

한 줄 묵상 2012.09.05 23:30
  • 이글을 읽으니 퀘이커 영성이 더 잘 이해가 되는군요. '순결함과 의로움'에 대한 진실한 추구! 잘 배웠습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09.06 03:11 신고

 주님이 나를 인도하였던 여러 가지 수련과 시험과 환난들그 모두가 그분이 나를 다루심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내가 열 세 살이 되었을 때에 난 순결함과 의로움을 알았다왜냐하면 비록 세상의 사람들이 기만의 말과 변하기 쉬운 말들을 쏟아낼지라도주님은 나에게 모든 것에 있어서 충실하게내적으로는 하나님께외적으로는 사람들에게언제나 모든 것에 있어서 '예'  '아니오'로 분명히 표현하고 변치 말 것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 The Journal1635년의 글.




 

목회자가 없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고 모두가 동료와 친구로서 이루어진 교회! 찬양도 없고, 그 밖의 모든 예식이 생략되고 단지 오랜 기간의 침묵을 통해서 성령님의 음성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참 빛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누구나가 자연스럽게 자기 안에 조명된 빛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배!  한국 개신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퀘이커들의 예배 및 영성은 오랜 전통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한다.

 

퀘이커 영성의  기초자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의 저널은 실제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며 영어로 기록된 가장 위대한 자서전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1664년 오랜 기간의 수감생활 중에서 그는 이전 13년간 (1647-1675)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몇 번을 걸쳐 그의 전 인생의 기록을 남겨 그가 죽은 3년 뒤 1964년 이 작업은 결실을 맺어 출판되기에 이른다.

 

가톨릭에게도,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던 그의 삶은 저널이 시작되는 첫 문장, "그가 당한 모든 수련과 시험과 환난, 그것이 주님이 자기를 다루심이었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타협 없이 진행되어 온 그의 모든 고백과 신앙은 그의 13세 때의 기억, "순결함과 의로움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소년 폭스의 고백을 통해 가슴 아프게 메아리가 되어 온다. /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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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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