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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묵상

지금의 자리를 떠남

안토니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방해를 받게 되었고 자신이 의도했고 원했던 바대로의 은둔생활이 가능하지 않게되자, 주님이 자신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일들 때문에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여길까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심사숙고 끝에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챌 수 없는 위쪽지역 테베로 떠났다.          


- 아타나시우스(Atanasius, 295-373) , 《안토니의 생애》, 49.


얼마 전 추석을 맞이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느라 차들이 모든 도로들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기의 소원과 희망을 좇아, 있던 자리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잠시나마 돌아가는 길이었다.


익숙하고 또 삶의 기반이 잡힌 "지금의 자리"를 떠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하고도 더 나은 그 무엇인가가 있을 때 신발끈을 묶어매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각광을 받는 자리를 떠나기란…….

바로 그런 자리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요 부르심의 표징이 아니던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모이지 않던가?

이 현상을 간증도 하고 책을 내서 알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안토니가 지금의 자리를 떠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구현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는 바깥으로 드러난 자신을 보지 않고 항상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보며 가꾸어 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영적 스팟라이트를 받기에 혈안이 된 듯한 세상이다.

그것을 위해 박사학위도 취득하고, 책도 쓰고, 심지어 영성 훈련도 참여한다.    

지금의 자리를 떠나는 용기와 결단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미국까지 공부하러 떠나 온 자신을 돌아본다. 


우리나라 유명한 교회 목사가 6개월의 근신의 자리를 떠나 조명빛 환한 설교단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토니의 떠남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왠지 씁쓸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과거의 자리를 떠나 지금의 여기에 있는걸까? 

지금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만 하는 자리에 안주하고 있지나 않은지?

발을 디뎌서는 안될 곳을 향하여 떠나와 가고 있지나 않은지?


그저께 비가 온 이후 

가을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아브람처럼, 예수님처럼, 안토니처럼, 바람처럼 

지금의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들이 이리저리 가슴을 휘젖는다. 


/ 임택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