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슬픔의 신비

한 줄 묵상 2016.06.23 10:42

여러분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거하실 자리를 열어 두기 위해 그대들이 해야 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의 기쁨과 슬픔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To open up the place of the Holy Spirit in your heart, what you have to do is to learn how to make joys and sorrows of brothers your own.)

-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각주:1]


순전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한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전3:16)는 진리를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그것은 형제자매들의 기쁨과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가능하다. 그는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십자가의 요한과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를 인용하며, 우리가 다른 이들의 필요에 얼마나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느냐에 비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그리스도의 몸의 신비에 있다. 곧, 다른 이들의 기쁨과 슬픔이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의 기쁨과 슬픔을 내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께서 거하실 공간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형제자매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또는 "내 코가 석자다."라는 속담은 우리가 얼마나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마음이 닫힌 존재인지를 잘 보여 준다. 바쁘고 힘겨운 삶이지만, 잠시 멈추고 마음의 창을 열어보자.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기쁨과 슬픔을 내 것으로 삼아 마음에 간직해 두자. 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그곳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The Monastic Life: Sharing Joys and Sorrows" in Thomas Merton on Monastic Spirituality, Now You Know Media, Gethsemani Classroom Series (CD), 201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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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긴급한 사명 :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

긴급한 사명

-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


지난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국토의 곳곳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고, 여러 언론들은 광복 직후의 낙후된 모습과 현재의 발전된 모습을 비교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잠시 감격에 젖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벌어진 팽팽한 군사적 대치는 온 민족을 다시 ‘오래된 위기’로 몰아넣었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군사적 충돌을 계기로, 북한은 전방지역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고, 남한은 전면전 돌입을 경계하는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다. 비록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서 긴장이 평화적으로 완화되고 사람들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전쟁을 그저 ‘쉬고 있는’ 분단국가임을 실감하게 하였다. 더욱 더 이웃나라 중국은 지난 9월 전승절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으로 자국의 군사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고,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전쟁 참여를 금지하는 ‘평화헌법’ 수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러한 동북아 정세는 뜨거운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처럼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의 위기 가운데 놓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일까?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무엇이라 설교해야 할까? 20세기의 대표적인 영성가이자 사회비평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자.


비밀스러운 공개편지

토마스 머튼의 《냉전 편지》(Cold War Letters)는 일종의 ‘목회 서신들의 묶음’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목회(牧會)는 좁은 의미에서 한 목회자가 특정한 교회를 맡아 회중들을 지도하는 형태에 한정되지 않는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한 영적 지도자가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편지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관한 지혜와 권면을 전달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의 서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도 이렇게 편지를 통해 영적 지도를 행한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머튼의 《냉전 편지》는 1961년 10월부터 1962년 10월까지, 약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그가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쓴 111통의 편지 모음집이다. 49통의 편지를 모은 첫 번째 묶음은 1962년 4월에 나왔고, 거기에다 62통의 편지를 추가한 두 번째 묶음은 1963년 1월에 나왔다. 모두 등사되어 스프링으로 제본된 형태로 제한된 사람들 사이에서 회람되었다. 그런데 갖가지 통신, 인쇄 기술이 발달한 20세기 중반에 이렇게 머튼이 ‘편지’와 ‘등사’라는 수단을 활용하게 된 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먼저 토마스 머튼은 베네딕트 규칙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는 트라피스트회(Trappist)의 수도자였다. 그는 1941년 12월 미국 켄터키의 겟세마니 수도원(Abbey of Gethsemani)에 들어간 이후, 줄곧 수도원 안에서 침묵과 기도와 노동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1948)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젊은 수도자 머튼은 수도원 담장을 넘어 매우 영향력 있는 영성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자서전 외에도 기도와 영성 생활에 관한 에세이집과 시집을 여러 권 출판하였는데, 그의 글에 감명을 받은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엽서와 편지들이 수도원으로 날아들었다. 이처럼 외부 세계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수도원 안에 살던 머튼에게 ‘편지’는 친구들과의 소통이나 영적 지도를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이유는 머튼이 수도회에 속한 수도자였기 때문에, 그가 공적으로 출판하는 모든 글들은 수도회의 검열을 거쳐야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침묵을 강조하는 트라피스트회의 당시 장상(長上)들은 머튼이 영성 생활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장려했지만, 정치적 이슈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머튼은 1961년 이후 전쟁과 군비 경쟁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가톨릭계 간행물들[각주:1]에 기고하였고, 그것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트라피스트 수도회 총장 가브리엘 소르떼(Dom Gabriel Sortais: 1902-1963)는 마침내 1962년 4월 머튼에게 더 이상 전쟁에 관한 주제로 글을 출판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정식 출판된 책이 아닌, ‘등사된 편지 묶음’이라는 형태는 머튼이 장상들의 지시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수도회의 검열을 피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이용한 방법이었다. 사실 검열 문제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 오던 머튼은 공식적인 출판 금지 지시가 내려지기 이전인 1961년 말부터 자신의 편지들을 ‘비밀스러운 공개편지’로 유통시킬 계획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이런 이유로 《냉전 편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지난 2006년에야 정식 출판되었다. 또한 그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글 모음집인 《기독교 이후 시대의 평화》(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 역시 1962년 4월에 완성되었지만, 등사본으로 읽히다가 그의 사후인 2004년에야 출판될 수 있었다.[각주:2] 

 

긴급한 위기

그렇다면 머튼은 왜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애를 썼을까? 그의 “냉전 편지들”은 역사적으로 “베를린 위기”(Berlin Crisis)가 일어난 1961년 10월부터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가 있었던 1962년 10월 사이, 곧 군사적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에 쓰여 졌다. 두 사건 모두 냉전 시대 자본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소련 사이에 일어난 군사적 대치로, 두 강대국은 서로를 향해 포문을 열고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다행히 미국 대통령 케네디(John F. Kennedy)와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냉전’(cold war)이 실제 무력을 사용하는 ‘열전’(hot war)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를 사용한 제3차 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전 세계를 휘감았던 시기였다. 머튼은 당시의 위기를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는 1961년 12월 런던의 한 대주교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은 매우 심각합니다. 사실상 도덕적 붕괴에 이르고 있으며, 그 속에서 국가의 정책은 거의 노골적으로 멸망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을 운명론적인 무관심으로 수용하거나, 무책임성과 수동성 속에서 무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이 거의 완벽하게 침묵해왔다는 사실입니다.(9)[각주:3]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로 핵미사일을 운송하는 소련의 군함과 그 위를 비행하는 미군 항공기. Image from Wikipedia.org베를린 위기 당시, 베를린의 찰리 포인트에서 동독군과 대치중인 미군 탱크. Image from Wikipedia.org

머튼이 느낀 위험은 일차적으로는 핵폭탄, 생화학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로 인해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 심각하게 여긴 것은 그러한 무기들을 생산하고 다루는 인간들의 도덕적 불감증과 무책임한 태도였다. 호전론(戶錢論)자들은 소련의 핵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군비 확충과 선제공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머튼은 무기 산업이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국민들을 선동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의 무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하고 있습니다. …… 무기가 우리를 분노하게하고 필사적인 상태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손가락을 [미사일 발사] 버튼 위에 올려 두고 레이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17). 그의 관점에서 이것은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학자들, 성직자들,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은 교부 신학이나 전례 등에 대한 작은 문제들에만 신경을 쓸 뿐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5). 그래서 머튼은 지금 서구 기독교는 인간성을 상실한 채 “추상적인 형식”(8)이 되어가고 있으며, 기독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불확실의 영역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3). 이러한 사실들이 그로 하여금 긴급히 펜을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머튼은 이용 가능한 최선의 수단을 다하여 전쟁을 폐지하고, 인류를 파멸로부터 구하는 것이 자신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우선되는 사명임을 확신하였다(2).


새로운 길을 찾아서

머튼은 이러한 위기를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도덕적, 영적 관점에서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였다. 그는 호전론자들이 “공산주의는 악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쓸어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태도는 비도덕적이고 세속적일뿐만 아니라 완전히 비기독교적임을 폭로하였다(6). 구체적으로 머튼은 도로시 데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 또는 그가 속한 무리의 행동이나 정책으로부터 구분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악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여 그들을 형제자매가 아닌 죄인과 악당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향한 우리의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11). 나아가 그는 당시 미국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의 아내이며,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제수였던 에설 케네디(Ethel Kennedy)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러시아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입니다. …… 우리는 완전히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옳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육신을 입은 악마들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거대한 환상입니다.”라고 말하며, 증오와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과 상대편을 진실하게 직면할 것을 역설하였다(10). 곧, 머튼은 우리가 평화를 위해 제거해야할 것은 상대진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 그리고 그 전쟁의 뿌리가 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과 증오라고 믿었다.[각주:4] 

     머튼의 이런 견해들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부의 정책에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충(不忠)한 국민으로 간주되었으며, 전면적인 핵전쟁을 외치는 극우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튼은 비록 콜롬비아 대학시절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에 잠시 기웃거린 적이 있긴 했지만, 그의 생애에 걸쳐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공산주의가 교회와 자유세계에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임을 지적한다(32). 또한 그는 전쟁에 저항하는 비폭력 평화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운동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도 경고하였다. 구체적으로 머튼은 평화운동가인 제임스 포리스트(James Forest)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비폭력운동에 공격성과 도발성이 은밀히 내포됨으로 인해 오히려 상대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눈을 멀게 만들 수도 있으며(31), 평화운동가가 행동주의(activism)의 파도에 휩쓸리면 또 다른 종류의 “대중적 인간(mass-man)”, 곧 이성과 판단력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의견에 휩쓸려 가는 사람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할 것을 당부하였다(69). 이와 같이 머튼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거칠고 무분별한 평화운동은 전쟁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길을 추구하였을까?

     이처럼 당대의 문제를 도덕적 위기로 파악했던 머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도덕원리를 세움으로써 전면전을 피하고 전쟁 폐지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분열과 대치를 해결하고 통합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기독교 인간주의(Christian Humanism)”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때 머튼이 주장한 “인간주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써, 인간을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이해하는 태도를 말한다.(8) 이것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바탕을 둔 비인간적인 “정글의 법칙(jungle law)”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자연의 법칙(natural law)”에 따라, 원수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똑같은 ‘자연적 본성’(nature)을 지닌 형제자매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태도이다(11).

     물론 머튼은 자신이 정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의 인용구처럼 그는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추구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자유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온전한 중도(sane middle path)를 찾고 발견해야 합니다.”(32) 그런데 이때의 ‘중도’는 보통 정치적으로 말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자적 또는 회색주의자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머튼은 《냉전 편지》를 등사하여 배포하는 일을 맡아 주었던 윌버 페리(Wilbur H. Ferry) 민주제도연구소(Center for Democratic Institutions) 부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제가 시도해온 것은 기본적인 도덕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덕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도 심각하게 부정할 수 없는 그런 원칙 말입니다.”(48) 또한 그는 다른 편지에서 “제3의 위치, 통합의 위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것은 냉전시대의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정치적인 신조와도 상관없는 새로운 위치이다.[각주:5]  


‘행복을 주는 약’을 버리라

로널드 W. 드워킨(Ronald W. Dworkin)은 《행복의 역습》(Artificial Happiness, 2006)이라는 책에서, 1950년대 이후 미국의 교회는 대중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적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설교하기 시작했는데(‘행복’과 ‘긍정적 사고’에 대한 강조가 대표적 예이다), 단기적으로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늘날 종교를 ‘정신작용약물’을 사용해서 ‘인공적인 행복’을 제공하는 의료산업과 비슷한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고 논증한다.[각주:6]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당시 기독교 매체와 교회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느끼게’ 만들면서도 당면한 위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수동적이게 만드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믿음은 그저 “행복을 주는 약(happiness pill)”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3). 

오늘날 우리 한국의 설교단과 서점 진열대도 “행복을 주는 약”들이 오랫동안 점령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재 한국 교회의 도덕적, 영적 위기를 초래하는 데에 크게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머튼의 《냉전 편지》는 비록 반세기 이전에 쓰여 진 것들이지만, 시대의 도덕적 영적 위기에 대한 그의 통찰과 제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도 머튼이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교회의 생명력은 바로 영적 갱신에 달려있습니다. 이 갱신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며 심원한 차원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갱신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입니다. 이것은 그 위기들을 내적 의의와 인간의 성장과 인간 세계에서의 진리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69)


분명히 기억해야 것은 ‘영성 목회’는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목회자와 회중의 만족을 위한 ‘행복을 주는 약’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최소한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설교자는 당면한 역사적 위기에 대한 참된 영적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행복을 주는 약’을 던져 버리고, 정치적 좌우를 넘어서는 도덕원칙, 통합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할 긴급한 의무가 있다. 그래야 영적 갱신이 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글쓴이 : 권혁일.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Ph.D. Candidate(Graduate Theological Union, 기독교 영성학). 《백투더클래식》을 편저하였고, 《제임스 게일》, 《베네딕트의 규칙》 등을 번역하였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1월 호에 "도덕적·영적 관점에서 본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실린 열한 번째 글입니다.


  1. 1. 대표적인 매체로는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가 이끌던 《가톨릭 노동자》(The Catholic Workers)가 있다. 도로시 데이는 비폭력 사회 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으며, 가톨릭교회에서는 평화와 정의를 위해 헌신한 그녀의 삶을 높이 평가하여 성인으로 추대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생전에 머튼과 데이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냉전 편지》에도 머튼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2통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2. Cold War Letters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고, 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는 분도출판사에서 《머튼의 평화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3. 3. 인용문은 필자가 Cold War Letters (Orbis, 2008)에 수록된 원문을 번역한 것이며, 괄호 속의 번호는 냉전 편지 번호이다. 토마스 머튼은 《냉전 편지》를 직접 편집하며, 각 편지에 배열 순서대로 번호를 달아 두었다. [본문으로]
  4. 4. 머튼은 그의 책, 《새 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16장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입니다”에서 이 주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5. 5. Thomas Merton, The Courage for Truth: Letters to Writers (Harcourt Brace & Company, 1994), 54. [본문으로]
  6. 6. 로널드 W. 드워킨, 《행복의 역습》(아로파, 2014), 220-2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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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밤의 주님 (토마스 머튼)

기타/산책길 엽서 2015.11.2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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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부담 없는 입문서, 아쉬운 연구서

토머스 머튼

은둔하는 수도자 ∙ 문필가 ∙ 활동하는 예언자

Mission-Shaped Hermit: Thomas Merton, Mission and Spirituality

키스 제임스 지음 · 김은해 옮김 | 비아 | 2015년


    선교와 영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올해 초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5)에 관한 책을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바로 성공회 출판사 '비아'에서 나온 《토머스 머튼: 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Mission-Shaped Hermit :Thomas Merton, Mission and Spirituality인데요, 문자적으로 옮기자면 "사명으로 형성된 은둔 수도자: 토마스 머튼, 선교와 영성"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서의 제목에 포함된 "Mission-Shaped" 운동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운동은 Mission-Shaped Church[사명으로 형성된 교회]라는 제목의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2004년 보고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가 서문을 쓴 이 책은 영국 사회의 세속화와 그로 인한 교인수 감소라는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교회의 모델로서 "선교적인 교회"(missionary church)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 이후로 "Mission-Shaped"라는 형용사구는 일종의 유행어가 되어 영국 국교회에서 출판되는 많은 문서와 책들의 제목에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키스 제임스(Keith James)의 Mission-Shaped Hermit도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각주:1]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듯이, 영어 단어 'mission'[미션]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주로 '선교'라고 번역되고 있고,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어려운) '임무' 또는 '과제'라는 의미로 번역 없이 그대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사명' 또는 '천직'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마태복음 28:19-20)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명'은 일차적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머튼의 글에서 '미션'이라는 단어는 거의 대부분 우리말로 '선교'보다는 '사명'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머튼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을 읽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정작 머튼 자신은 비종교인 또는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선교에 대해서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머튼은 그리스도인의(또는 수도자의) 사회적, 도덕적, 시대적 사명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책, 《토머스 머튼: 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에는 '미션'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선교'와 '사명' 사이의 간극이 존재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책의 저자 키스 제임스는 '선교'라는 관점에서 머튼을 소개합니다. 그는 서문에서 "토머스 머튼이 선교를 지향하는 운동을 점검했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까?"(8)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입니다. 먼저 장점인 이유는 지금까지 머튼에 관한 책과 글들이 아주 많이 나왔지만, 선교의 관점에서 머튼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글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머튼은 선교보다는 '종교 간의 대화'라는 주제로 더 많이 연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라는 바늘로 머튼의 인용구들을 구슬처럼 꿰매고 있는 이 책은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다소 실망스럽게도 실제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선교에 대한 머튼의 직접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 주고 있지 못합니다. 

    저자는 본론에서 머튼이 수도생활을 통해 깨달은 지혜와 유산들을 (그것들이 선교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몇 가지 간략하게 언급한 뒤에, 결론에서 그것들이 오늘날의 선교에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적용' 또는 '유추'하고 있습니다. 키스 제임스가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제7장 머튼과 선교: 결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담겨져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은 은연중에, 때로는 노골적으로 다른 이를 개종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교회는 다른 종교 집단을 그리스도교 선교를 방해하고 국가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교적 유산을 훼손하는 경쟁자로 곧잘 간주한다. 신앙과 다른 길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 머튼은 진리에 열린 태도를 가질 것을 권했다. 진리는 어디에서든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린 태도는 자신과는 다른 이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자신과는 다른 이를 사랑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따를 때 교회의 선교는 거듭나며 활력을 얻는다. 머튼은 교회가 행동만큼이나 침묵과 관상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 침묵은 행동과 예언자적 증언을 이끌어 낼 수 있다. (65쪽)

곧, 타종교인을 개종의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열린 태도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 교회가 선교 활동을 할 때에는 활동 자체에 매몰되지 말아야 하고, 침묵을 통해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예언자적 증언이라는 열매를 맺어야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 견해에는 위의 구절에는 (이 책의 다른 구절들에도 종종 그런 부분이 발견되지만) 머튼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섞여 있습니다. 관상과 활동의 관계,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머튼의 사상을 가져와서 저자가 선교의 관점에서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맞는 것 같기도 하나 다른 한 편으로는 양복 옷감을 잘라서 한복에 갖다 붙인 것과 같은 부자연스러움과 논리적 비약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위의 "진리는 어디에서든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문장은 문맥상 모든 종교에, 또는 모든 종교의 바깥에 진리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매우 논쟁적인 이슈입니다. 저자가 구체적으로 머튼의 어떤 글에 근거해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지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머튼은  타종교에서 수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자연적인 깨달음과 하나님의 선물로 얻게 되는 초자연적인 비전을 구분하였고, 타종교와 대화할 때에는 교리적 차원이 아니라 경험적 차원에서 접근하였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시도한 것처럼 머튼의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한 생각을 선교의 영역으로 가져와 적용하기 위해서는 짧고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보다 신중하고 정확한 해석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저자도 위에 인용한 구절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지역 교회가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를 명료하게 도출해 설명할 수는 없다."(65쪽)라고 말하고 있으며, 몇 장 뒤에서는 "머튼의 통찰과 비전을 우리가 처한 상황에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직 이를 행할 때에만 알 수 있다."(68쪽)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키스 제임스는 이 책에서 머튼의 영성이 오늘날의 선교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 지를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는 '머튼을 통해서 우리가 선교를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추상적인 선언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68쪽).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읽은 후에 남는 가장 진한 아쉬움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본론에서 저자가 다루고 있는 '경청', '사랑', '침묵', '예언', '초연함' 등에 관한 내용들은 이미 머튼에 대한 다른 책들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 사소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머튼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나 정보가 발견되는 점, 때로는 인용문이 머튼의 것인지 다른 인물의 것인지 책 뒤에 있는 미주를 찾아 보지 않으면 본문에서는 구분이 되지 않는 점, 그리고 (이것은 한국어판 편집 과정에서의 실수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인용구는 미주의 참고문헌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점 등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실망은 머튼을 여러 해 동안 공부해온 저만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머튼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면, 100여 쪽 밖에 되지 않는(원서는 28쪽) 짧은 그 내용들이 쉽고 신선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 이 책은 크기도 작고 두께도 얇아서 손에 들고 다니기도 좋고, 독서에 대한 부담도 줄여줍니다. 또한 사실 이 책에 인용된 머튼의 많은 구절들은 문맥에서 그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더라도, 그 구절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사고와 성찰의 문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뒤에 실린 토마스 머튼에 대한 참고도서 소개는 머튼 입문자들에게 유용한 정보임에 틀림 없습니다. 또한 번역자와 편집자는 친절하게도 국내에 번역된 머튼 참고도서에 대한 소개까지 추가해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외 이 책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은 각 장의 주제와 관련한 성찰을 위한 질문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서에서는 각장의 마지막에 질문이 달려 있지만,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각 장의 처음에 질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먼저 그 장의 본문을 읽은 후에, 그 질문을 가지고 숙고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한다면 글을 마음에 새기는 데에 매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키스 제임스가 이 책에서 머튼의 선교 이해를 밝히는 데에는 그리 성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저자는 '선교와 영성'에 대한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미셔널(또는 미션얼) 처치(Missional Church)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영국의 "미션 쉐이프드 처치 운동"과 비슷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해외 선교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갱신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각주:2] 이와 관련하여 선교와 영성, 또는 교회 갱신과 영성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논의가 보다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 외에도 출판사 '비아'에서는 헨리 나우웬(Henry Nouwen: 1932-1996)이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등에 대한 짧은 입문서들을 시리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찾아 보니 모두 영국 국교회 출판사인 Grove Books의 영성 시리즈를 번역 출간한 것이네요. 이런 이유로 비아에서 머튼의 입문서로 키스 제임스의 책을 선택한 것이겠지만, 굳이 Grove의 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면, 역시 성공회 작가인 전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의 A Silent Action: Engagements with Thomas Merton(Fons Vitae, 2001)을 번역 출간하는 것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훨씬 유익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은 수도자와 사회 비평가로서의 토마스 머튼을 정교회 신학자 파울 에브도키모프(Paul Evdokimov: 1901-1970)와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혹시 비아에서 머튼에 관한 책을 한 권 더 출간할 계획이 있다면, 윌리엄스의 이 책을 고려해 준다면 고마울 것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1. "Mission-Shaped Movement"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했습니다. Angus F. Stuart, review of Mission-Shaped Hermit: Thomas Merton, Mission and Spirituality, The Merton Seasonal 35 no. 4: 40. [본문으로]
  2. 2. 참고. http://goo.gl/5GjlxI; http://goo.gl/SyCFSB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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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폐지는 교회의 의무이다 (토마스 머튼)

한 줄 묵상 2015.08.16 16:53

따라서 우리의 의무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서 교회가 진정으로 전쟁을 폐지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 토마스 머튼 지음, 조효제 옮김《머튼의 평화론》(분도, 2006), 272.


며칠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일명 "킬러 로봇(Killer Robot)"이라 불리는 공격용 전투 로봇 도입에 관해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다양한 찬반 의견들이 있었는데, 공통된 것은 모든 패널들이 '전쟁이 필요하다'는 대전제 위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오늘날 전쟁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세상 속에 들어와 있다. 국제적, 민족적 분쟁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서 전쟁에 대한 '인기가 식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오락(entertainment), 곧 영화나 게임, 심지어 아이들의 장난감 속에도 전쟁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토마스 머튼에 의하면 전쟁은 폐지되어야 한다. 특히 핵무기와 화화무기 등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로 인해 인류가 대재앙 속에 빠질 위험이 현존하는 오늘날, 교회는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해서 전쟁 폐지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간에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다. 


최근 광복 7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남북이 분단되어 휴전선에서 지뢰가 폭발하는 오늘날, 일본이 평화헌법을 수정해 동북아에서 무력 행사를 정당화하려는 이 때에, 우리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해야할까? 분명한 것은 '민족정신' 또는 '애국심'이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를 유발하여 전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왜곡되지 않도록 교회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반도에서 휴전(休戰)을 넘어 종전(終戰)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동북아에서 전쟁이 폐지되도록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모든 힘을 다해 구체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 권혁일


<상생의 손>, 포항 호미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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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절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손양원)

한 줄 묵상 2015.06.16 13:21

밤마다 꿈속에 당신의 마음의 근심과 몸이 불안한 것을 보았는데, 아마 근심 걱정에 눌려 병이 된 모양 같습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은 절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이랑 병 중에 병이요, 죄 중에 큰 죄가 되는 것이외다.


-손양원 (1902~1950), "부인 정양순 사모에게 보낸 편지 2," 《손양원》(홍성사, 2009), 131.


손양원 목사님이 1942년 10월 14일 옥중에서 쓴 편지의 일부이다. 매달 정해진 날에 면회를 오던 아내가 찾아오지 않자, 그는 밤마다 꿈속에서 불안과 걱정 가운데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사모님의 불안이 목사님께 전해졌다기보다, 목사님 당신의 마음속에 걱정이 자라났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편지에서 아내에게 절대 걱정하지 말라며 당부하는 말씀은, 곧 당신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기도 할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에 의하면, 걱정은 "병 중에 병"이며, "죄 중에 큰 죄"이다. 왜냐하면 걱정 우리의 자비로운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기도할 때에 걱정(care)을 하나님께 내어 던지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를 돌보시기(God do take care of us) 때문이다. 머튼은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도 중에 걱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자신이 직접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손양원 목사님도, 뛰어난 영성가 토마스 머튼도 모두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 그들에게도 걱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그 걱정에 휘둘리거나 정복 당하지 않았다. 걱정을 하나님께 내어 던졌다. 혹시 오늘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았을 때 근심과 염려가 먼저 떠오른다면, 또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거나 안절부절하게 된다면,  그 걱정들을 하나하나 주님께 아뢰자. 그분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아 주실 것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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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투명합니다 (토마스 머튼)

한 줄 묵상 2015.05.12 12:08


저는 모든 것들이 투명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불투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삶은 이것처럼 단순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완전히 투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항상 빛나고 계십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Solitude: Breaking the Heart (Kansas City, MO: Credence Cassettes, 1988).


영성이 깊어 진다는 것은 세상을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상처, 이기심과 교만, 재난과 사고 등 우리의 눈을 가려 하나님을 숨기는 것들을 넘어서 이 세상 가운데 항상 밝게 빛나고 계신 주님의 현존을 뵙고 그 가운데 사는 사람이 깊은 영성의 사람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세상이 지금 우리의 세상과 달리 평온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투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은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으로 세계 곳곳에 화약냄새와 비탄이 가득했던 때였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외치기도 하였지요


또는 그가 '세상과 분리된' 수도원 안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한가한'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젊은 시절 머튼은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그는 수도원의 깊은 고독 속에서 자신 안에 있는 세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자신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세상의 비극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머튼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완전히 투명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아마도 '고독'과 '침묵'일 것입니다. 고독은 우리의 눈을 덮고 있는 '비늘'(행9:18)이 드러나게 하고, 그것을 벗기시는 주님의 은총의 빛에 우리를 노출 시킵니다. 침묵은 우리의 틀에 갇힌 생각과 말들을 잠잠하게 하고, 직관의 눈을 뜨게 하여 사람의 언어에 제한되지 않는 주님의 현존을 보게 합니다. 고독과 침묵은 깜깜한 밤에도 사방을 덮고 있는 어둠이 아니라 그 속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빛을 발견하고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면 점차 어둠이 투명해지고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항상 충만하게 빛나고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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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존재의 뿌리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한 줄 묵상 2014.12.28 10:19

영적자아는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 자아는 존재하는 것 자체로 만족합니다. 존재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묵상의 능력》(The Inner Experience)(서울: 두란노)


세속적인 것을 얻어서 만족을 얻는 사람은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을 얻어서 만족하면 영적인 사람입니까? 꼭 그렇다고 말할 수 만은 없습니다. 세속적인 열망과 집착이 영적인 것으로 포장만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분을 향한 열망, 교회 안에 힘있는 부서를 향한 암투, 신앙생활로 인해 개인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영적인 것 속에 숨겨진 세속적인 야망을 보여줍니다.

머튼은 영적이든 세속적이든 무언가를 얻는 것에서 만족하는 삶의 방식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참된 자아를 찾는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에서 만족하는 대신 존재 자체로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뿌리가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한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하나님이 좋아하시기 때문에 참는 게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한 하나님께 뿌리가 박혀 있기에 무엇을 소유하는 것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을 따름입니다.

영적인 만족과 소유를 영적 성숙의 지표로 생각하다가는 우리는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오늘 예배하고 찬양하고 만나고 가르치고 배우는 주일에 우리가 하는 모든 신앙적, 영적 활동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결과이며 만족입니다.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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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아니고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한 줄 묵상 2014.11.25 07:10

그리스도교 사랑의 뿌리는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아니고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새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사람 사이에 생기는 불일치에 대해 우리는 미움과 증오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책이 아닌 것을 알기에 우리는 미움과 증오를 싸워서 이겨내려고 한다. 계명을 지키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다. 불일치를 일으킨 상대방이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 미움과 증오는 뽑아도 피어나는 여름의 잡초처럼 계속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머튼은 사람이 가치가 없고 보잘것없어도 하나님에게 사랑받는다는 믿음으로만 미움과 증오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참된 해방을 경험하고 재일치의 고통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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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마법과 예언 (토마스 머튼)

한 줄 묵상 2014.09.15 10:25

'말의 마법'을 독실하게 믿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 상인과 선전원(propagandist)과 정치인입니다. … 우리 [시인들도 그들처럼] 이 마법을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갖가지 변종[표현]들로 조롱하고 패러디합시다. 만약 원한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조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예언하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현실을 붙잡는 것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새로움을 향한 최상의 기대와 긴장의 순간 속에서 말입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Message to Poets" 

in The Literary Essays of Thomas Merton (NY: New Directions, 1981), 473.


머튼이 말하는 "말의 마법(the magic of words)"이란 분별력이 약하고 연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말을 난해한 표현들로 축소시키는 것을 말한다. 소비 심리와 환상을 충동하는 상업 광고의 문구들과 국민들을 속이려는 정치인들의 뜬구름 잡는 듯한 말들을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삶에 대해 말을 짜내고, 자신들의 말에 삶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실제로 세상에는 "말의 마법"이 가득하다. 정치인의 말에도, 상업 광고에도, 언론 기사에도, 판사의 판결문에도, 심지어 목사의 설교에도.


머튼에 의하면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먼저는 상인, 선전원, 정치인과 비슷하게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로 그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지만 머튼은 '조롱'이 아닌 '예언'을 하자고 촉구한다. 이때 예언(prophecy)이란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현실의 가장 높은 가능성과 긴장을 파악하고 확고하게 붙드는 것이다. 매일의 현실에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동시에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세력으로 인한 긴장도 존재한다. 머튼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상대편을 조롱하기보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붙들자고 말한다. 곧, 예언이란 현실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순수한 예측과 희망이다. 이러한 예측과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 머튼이 생각하는 시(詩)이다. 이러한 희망을 볼 수 있는 이가 시인이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1964년 2월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 '새로운'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과 북아메리카 젊은 시인들의 모임에서 낭독된 "시인들을 향한 메시지"라는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1차적인 독자는 '시인들'이다. 그러나 폭넓게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메시지도 된다.[각주:1]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언적이어야 하며, 시적(poetic)이어야 한다. 시적인 삶이란 것은 낭만적이거나 난해한 말을 사용하는 삶이 결코 아니다. 시적인 삶은 오늘의 삶 속에 숨겨진 새로운 내일을 향한 가능성과 긴장 속에서 내일을 희망하는 삶이다. 순수한 희망을 오염시키고 마비시키는 "말의 마법"을 간파하고 저항하는 삶이다. 성서의 예언자들의 존재와 그 삶 자체는 당대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말의 마법"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세상, 저열한 조롱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그 자체로 새로운 미래를 예견하는 희망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 권혁일



  1. 이 글은 이후에 잡지 Americas(1964년 4월)와 단행본 Raids on the Unspeakable(1966)을 통해서도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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