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을 말하다

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 (Spiritual Friendship)을 말하다

《조지폭스의 일기》와 친우회의 '명료화위원회' 





불신-자(不信-者)로 채워진 교회


    우리는 지금 불신(不信)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배를 탄 승객이 선장의 말을 믿을 수 없고, 환자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은 나랏님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는 자(信者)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다른가? 최근 이름 있는 대형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존경의 대상이었고, 신앙의 모델이었던 목사님이 돈 문제, 사생활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처음에는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알고 신앙을 지키려 했는데, 여러 가지 풍문들이 사실들로 밝혀지면서 자기 믿음의 근거마저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친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추문들과 사건들을 통해 성도들은 그들의 목회자를 ‘성직자’라기 보다는 가운이나 강대상 뒤에 숨은 ‘위선자’로 보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감추지 않는다. 목회자는 또한 어떠한가? 새벽기도회로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 등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성도, 굳어진 그들의 마음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신천지 같은 이단의 출현은 성도들 사이마저도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2015년 한국 교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불신-자(不信-者)들이 모여 단지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인지 모르겠다. .


    '영적 우정'? 불신자의 교회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에 있어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혹은 교우들 서로 간의 수평적인 영적 우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친밀함과 더불어 영성 목회에서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소중한 가치이다. 12세기 영국의 시토회 수도자였던 리보의 에일레드(Aelred of Rievaulx, 1109-1167)는 그의 저서 《영적 우정에 관하여》(On Friendship)[각주:1]에서 영적 우정은 영적 완숙(Spiritual Perfection)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라고 말한다. 그는 요한복음 4장 21절[각주:2]과 15장 15절[각주:3]을 묵상하면서 영적 우정은 “두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우정을 통해서 경험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정이다(God is Friendship).”라는 과감한 주장을 했다. 에일레드의 책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죽은지 500여 년 후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영국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또한 친구다.”라고 주장하며 영적 우정에 기초한 친우회(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각주:4] 의 시작을 알렸다.   



1.  조지 폭스와 친우회


당시 폭스는 침묵에 관해 가르쳤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증거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하였으며, 각자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도록 참고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 그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신조와 예배에 억지로 순종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내면의 빛을 통해 영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데, 이 영적인 연합이란 동일한 원칙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2), 47. 윌리엄 펜의 증언.



    퀘이커 영성의 기초자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의 일기는 실제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며 영어로 기록된 가장 위대한 자서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폭스와 같은 세대로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미국 땅에 필라델피아(형제애)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던 윌리엄 펜 (William Penn, 1644-1718) 은 《조지 폭스의 일기》 서문에서 조지 폭스는 신앙인들을 기존의 신조나 교회의 교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썼다고 증언한다. 왜 폭스는 교리와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신앙인을 만들려했을까?


    그것은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직자들을 의존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오히려 신앙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국사회는 기존의 왕정이 쇠퇴하며 공화정이 등장하는 격변기였다. 왕정이 약화되자 왕실의 보호를 받던 영국 국교회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청교도, 재세례파, 급진파, 분리주의자등 수많은 교파와 그룹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들의 교리와 신앙을 주장하며 쏟아져 나왔다. 성도들은 교회를 떠났고, 성직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며 이윤을 탐했다. 말로는 정의와 정통을 외쳐대며 속으로는 탐욕에 젖어가는 성직자들을 바라보며 조지폭스는 “그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귀머거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랬다. 폭스는 당시의 교회를 “뾰족집”이라 불렀는데 이는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보다는 성경을 수단으로 설교를 통해 성공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흉물스런 괴물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적인 방황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구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해답을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러한 영적인 고통의 정점에서 그는 그의 일생뿐만 아니라 친우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경험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 아!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 분만이 네 상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리스도는 나를 깨우치셨으며 자신의 빛을 내게 주어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 속에서 직접 희망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내게 그의 영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71-73.


    이렇게 해서 "내면의 빛(Inward Light)", "씨(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친우회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다. 마치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가 자기 감각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을 의심한 후, “ego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치며 전통에만 의존하던 중세를 떠나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것과 같이 조지 폭스는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형상, 내면의 빛을 붙잡은 것이다. 또한 서로의 신앙인들 안에는 동일한 내면의 빛이 있어서 그 빛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 안의 ‘내면의 빛’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이를 위한 ‘침묵의 예배’는 영국 방방곡곡과 영국을 넘어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이들 친우회의 영성적인 특징들을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라는 그들의 특별한 분별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다.



2. 명료화위원회[각주:5]


    명료화위원회는 초기 친우회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사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의 영적인 분별을 돕기 위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나 나아가서는 전체 공동체의 중요 안건을 위해서도 적용되었다. 이 모임 이면에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내면에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교사, 즉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문제에 처한 각 개인이나 그룹은 여러 종류의 내적, 외적 간섭으로 인해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방해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위원회로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 안의 방해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스스로가 자기 내면의 빛에 집중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질문과 경청, 침묵을 통해 격려하고 분별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먼저 개인의 분별을 위한 명료화위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가진 '중심 인물(focus person)'과 모임의 진행을 인도할 '인도자(clerk)' 그리고 중심 인물에게 질문을 통해 분별을 돕는 '4-6명의 분별을 돕는 사람들(discerners)'자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을 돕는 사람들의 질문이다.[각주:6] 이들은 충고나 설득을 통해서 중심 인물에게 영향을 주려 하기 보다는 중심 인물이 스스로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부드럽게 도와주어야 한다.  사회자는 분별자들의 질문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너무 길면 적절히 조절하거나 끊어주어야 한다. 침묵은 이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가장 역동적인 대화의 공간이다. 침묵을 통해서 중심인물이나 분별자들은 그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친우회는 이러한 개인적 명료화위원회를 공동체적 분별을 위한 의사결정위원회로 확장시켰다. 각 교회나 교단의 총회와 같은 이러한 모임은 여러 가지 첨예한 안건들이 상정될 수 있지만 사회자(clerk)는 개인적 명료화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나 이기적 욕구 때문에 ‘내면의 하나되게 하는 빛’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회의의 처음과 끝, 그리고 각 개인들의 발언 사이에 침묵을 통해서 방해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한다. 이들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이 아닌 완전 합의 (consensus)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반대하는 소수가 존재한다면, 결정을 유보하고 다수라는 힘의 논리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는 개인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다리며 침묵한다. 이러한 분별의 과정은 느리고 힘들고 더디지만 우리가 내면의, 혹은 외부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빛’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 초기 미국 퀘이커교도였던 존 울먼(John Woolman, 1720-1772)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후 이와 관련된 안건을 퀘이커 공동체에 내어 놓아 자그마치 20년의 긴 시간을 통해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하였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노예해방 선언보다 8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3. 나서는 말

    책으로만 접했던 친우회의 모습을 글로 쓰기가 부끄러워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보았다. 아무런 찬송도, 어떤 의식도 없이 그냥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앉아서 마냥, 차분히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빛의 소리. 그렇게 침묵 속에서 내면에 들려오는 빛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서 자기가 들은, 혹은 경험한 것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나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진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헤어졌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아쉬운 반응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기다리는데 익숙해 보였고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의 설교에 따라 ‘오늘 은혜 받았어요’, ‘오늘은 설교가 별로였어요’하며 설교에 따라  예배를 평가하는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친우회의 예배와 그들의 영성은 대다수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낯설고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안팎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우리에게는 똑같이 내면의 빛이 있어서 독립되지만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 조지 폭스의 믿음,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함께 모여 가만히 앉아, 참고, 기다리며, 경청하는 친우회의 침묵의 영성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영적 우정은 결국 나와 서로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를 위한 따뜻하고 조용한 기다림의 여정이 아닐까.



글쓴이 : 정승구. 미국 프리몬트의 로고스교회 담임.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중 (기독교 영성학)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9월 호에 실린 아홉 번째 글입니다.





  1. 1) 이 작품은 에일레드가 20여 년간 집필하여 1167년 경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Aelred of Rievaulx, Spiritual Friendship: Classics with Commentary Series, (Notre Dame, Indiana: Ave Maria Press, 2008). [본문으로]
  2. 2)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문으로]
  3. 3)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본문으로]
  4. 4)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에 몸이 떨렸다고 해서 흔히들 퀘이커 (Quaker)라고 더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친우회 (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다. 우리 기독교계의 어른인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로서 알려져 있듯이 퀘이커들의 예배 및 영성은 오랜 전통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한다. [본문으로]
  5. 5) 영어로는 ‘The Clearness Committee’로 알려진 퀘이커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분별과정은 한국말로 해석이 용이치가 않다. 정화 위원회, 해명 위원회, 혹은 명료화 위원회로도 불리지만 본문에서는 퀘이커 서울 모임에서의 자문을 받아 명료화 위원회로 부른다. [본문으로]
  6. 6) 구체적인 질문이나 대화법은 본 시리즈/연재 지난 2월호에 실린 이주형 목사의 글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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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 (조지 허버트)

영성 목회 2014.11.18 13:28

목사는 여가 시간에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 그는 거기서 양떼를 생각하며 두 종류의 악과 두 종류의 악한 사람들을 발견한다.


- 조지 허버트 (George Herbert: 1593-1633), 《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 제24장.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지만 보통 지역 교회(교구)를 섬기는 목회자는 참 바쁘다. 특히 조지 허버트가 살던 17세기 영국의 지역 목회자들은 종종 자신의 교구에서 의사 또는 법률 대리인의 역할도 담당해야 했기에, 그들이 '해야할 일 목록'에는 참 많은 것들이 올라가 있었다. 허버트에 의하면 이런 바쁜 일상 중에도 목회자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분주한 매일의 생활 공간을 벗어나 "언덕 위에" 서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 사이에 있는 은밀한 악을 성찰해야 했다. 


허버트는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악덕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탐욕'과 '식탐'은 그 시작이 불명확하고 속이는 성격이 있어서 자세히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탐욕에 대한 설교를 듣고 탐욕을 정죄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불명확한 악덕들에 대한 정확한 식별 기준을 익히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사가 불필요하게 넓고 사치스러운 집을 산 교인의 집에 이사 예배를 드리러 가서, 그 교인에게 좋은 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집을 '축복' 함으로써 그 사람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무엇보다 목회자가 먼저 자신의 내면을 엄밀하게 성찰하고 정결한 상태를 지켜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은밀한 악덕에 지배당하는 목회자가 '양떼'를 바른 곳으로 인도할 수 없다. 심한 경우에는 에스겔 선지자가 경고한 것처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양떼를 잡아 먹는 거짓 목자가 되고 말 것이다(에스겔 22:23-31).


허버트가 성찰과 식별을 위해 제시한 공간은 '언덕'이다. 언덕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의 '거리'가 형성된다. 낯익은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하고, 이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들도 발견하게 한다. 허버트가 말한 언덕 위는 이런 '창조적인 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연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는 공간이다. 또한, 언덕 위에 오르면 자신이 목회하는 교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도 얻을 수 있어, 목회자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언덕 위에 서는 이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내면의 생각과 움직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조지 허버트의 책 The Country Parson에서 말하는 목회자는 주로 지역의 교구를 섬기는 목사들이다. 당시 영국의 지역들은 대부분 전원적인 환경 속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고, 지역에 대한 조망을 얻을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허버트의 조언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목회자는 '각자의 언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여가 시간을 게으르게 보내거나, 개인적으로 또는 동료 목회자들과 몰려 다니며 자신의 즐거움을 좇는 데에 사용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바쁜 목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언덕' 위에 올라야 한다. 그곳에서 자신과 교인들과 하나님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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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의 동행 (로욜라의 이냐시오)

한 줄 묵상 2014.09.18 02:50

 1544년 2월 6일. 수요일

미사 시작 전부터, 헌신과 눈물을 드릴 때, 고정된 수입 없는 공동체에 대한 (나의) 마음이 더 공고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보다 뚜렷해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방식과 다르게, (예수회 공동체를 위해) 고정된 수입을 추구하는 선택은, 혼선을 일으키고, (공동체 일원) 모두에게 불명예일 수 있으며, 우리 주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가난을 경시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 "the Procedure of Election" in Selection from the Spiritual Diary (New York: Paulist Press, 1991), 239. 


수많은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을 고용환경과 삶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내몰리고 있다. 신자본주의(Neo Capitalism) 혹은 세계화(Globalization)란 거창한 시대적 요구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세대는 가진자의 풍요와 그 독점을 정당화하는 반면,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더욱 가난을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길 강요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은 고정된 수입이 가져다주는 오늘의 안정감을 박탈당하고, 언제 올지 모를 빈곤의 삶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오늘의 생존을 삶의 목표로 삼고 분투하고 있다. 내게도 그렇게 가난이 찾아왔다. 내일 당장 필요한 자식들의 먹을 거리를 걱정하고, 다음달 월세를 어떻게 내야할지, 막막한 고민을 안고, 들지도 않는 잠자리를 청한다. 전혀 원치 않는 삶의 조건이기에, 가난은 불청객이며,  피해야할 시련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영적 성숙을 위한 최선의 삶의 조건으로 가난을 선택해왔다. 사막교부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도원 규율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삶의 형태로 가난을 사모하고, 삶의 일부분으로 선택해왔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도 가난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자의 필수적 조건으로 여겼고, 예수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가장 주요한 계율과 가치로 세워나가려고 노력했다. 영성 분별의 전문가 답게 이냐시오는 이 문제를 놓고 오랜 기간 분별의 기도를 드렸고, 그의 일기 한 부분엔 그 영적 과정 중에 깊은 고뇌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난한 삶의 형태를, 최소한의 고정된 수입으로 공동체를 운영하고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마저도 포기하고, 매일 공급해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공동체의 삶을 꾸리는 규율을 세울 것인가?"

예수회 최초 구성원들은 그의 분별과 그로 인한 공동의 결정에 따라 고정된 수입을 포기하고, 매일 채워주시는 은혜로 살기로 선택한다. 가난은 그렇게 삶의 필수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두려움과 절망의 대상에서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삶, 하나님만을 향한 갈망의 불길을 더욱 태우기 위한 영성적 삶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물질적 곤핍을 통해 나의 원초적 필요를 내려 놓고, 그 부족함이란 경험 속에서 오직 주님만으로 빈곤함의 공간을 채워겠다는 오늘의 영적 결단이 가난이다. 

내 삶의 조건이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것이 사회 구조적 문제, 혹은 형평성의 문제이든, 나는 오늘 내게 이미 주어진, 가난 가운데 주님의 풍성함을 누릴 준비가 되었는가? 가난을 영적 은사로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가난을 통해, 돈과 재물에 더 갈증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을 더 갈망하게 되었는가? /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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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위 햇살

영적 분별을 위한 규칙 1: 쾌락은 위안인가 유혹인가 (로욜라의 이냐시오)

한 줄 묵상 2014.09.04 14:00

규칙 1: 대죄(mortal sin)에서 대죄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원수는 노골적인 쾌락을 제시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상상하도록 하여서 악덕과 죄들을 유지하고 더욱 키워가게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선한 영은 이성의 분별력으로써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 등 정반대의 방법을 쓴다. 

-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 지음, 정제천 옮김, 《영신 수련》, no. 314.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수많은 영적 경험들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우리 영성 생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분별(discernment of spirits)의 원칙을 정립했다. 영적 분별이란 우리의 “심정의 여러 변화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느끼고 알아차려서 선한 것들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들을 배척하는” 일을 말한다.(《영신수련》, no. 313). 

먼저 이 첫 번째 규칙은 신앙 생활의 많은 국면에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규칙은 우리 삶에서 쾌락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삶의 즐거움과 기쁨은 분명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우리를 큰 영적 어두움과 위험으로 빠뜨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규칙은 이런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 신앙 생활에서도 —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으로서 쾌락을 추구하는 일은 그 즐거움이 영적이든 육적이든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삶의 방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향성 여부에 따라 쾌락은 우리의 삶에서 정반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참으로 복된 길을 가고 있는 중에 그 길을 더 열심히 가게하려고 성령께서 내려 주시는 위안(treat)일 수 있다. 하지만 혹여 내가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면, 쾌락은 내가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미혹(迷惑, illusion)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이 현재의 나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와 관계를 점검하게 하고, 내 삶의 방향성이 그분께 점점 더 가까워 지는 쪽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점검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필자는 요한 복음서의 첫 장,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첫 만남에 관한 보도를 떠올리게 된다. 거기서 제자들은 주님께 이렇게 묻는다. ”주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1:38). 이 질문은 영적인 삶을 시작하려는 이들, 사람으로서 궁극적이고 올바른 길을 가려는 이들이 던지게 되는 첫 질문일 것이다./ 새결새김 남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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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아>: 리더의 분별과 실존의 갈등



     영화 <노아>가 상영되었을 당시 한국의 기독인들 사이에 대략 두 가지 반응이 공존하는 듯했다. 우선은 성경의 '노아 이야기'로부터 너무 멀리 온 듯한 낯설음으로 출발하여, 성경 이야기를 곡해 혹은 왜곡하고 있다는 불편함으로 표출된 반응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종교적 경직성 속에 갇혀 있던 노아 이야기를 상상력과 기술력을 통해 현대인들의 오늘의 이야기로 표현해 준 좋은 작품이라는 견해이다. 영화 <노아>를 성경의 '노아'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로서의 <노아>가 하나의 예술적 장르로서, 그 자체로 본문이 될 수 있으며, 해석을 통해 대화와 소통의 도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기독인들이 영화 <노아>를 감상하고, 해석하는데 있어 염두에 둬야 할 사실은, 감독 Aronofsky가 유대인이며,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왔고, 영화화하려는 계획을 오래도록 세워왔다는 사실이다. 감독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노아 이야기를 영화화하려는 감독의 접근 방식이 탈무드적 해석이라는 힌트를 얻게 된다. 유대인 회당이나 교회에서 랍비나 사제, 목회자를 통해 오늘의 현실 속에서 노아 이야기가 재해석되듯이 감독 Aronofsky는 영화라는 예술 장치를 통해 현대인들의 시각과 언어 속에서 성경의 노아 이야기를 재해석(appropriation)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대하는 기독인들이 염두에 둘 만한 대목이다. 탈무드적 해석으로서의 영화 <노아>는 성경의 '노아'가 말하지 않고 있는 영역들을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메꾸고 다듬어서, 그 자체가 본문으로 취급되길 지향한다. 영화 <노아>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재창조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한 리더의 영적 여정이야기라는 접근으로 감상하게 될 때,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프레임을 발견하게 된다.


<리더의 영적 분별>

     영화는 노아의 관점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새창조 계획을 확인해 가는 과정을 세 단계로 그리고 있다. 각 과정은 노아의 영적 분별의 세 단계이기도 하다. (1)외적 표식(external signs), (2)내적 표식(internal signs), (3)확인(confirmation). 첫째,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가지 외적 표식으로 드러난다. 가인의 후예로 묘사되는 도시 인간들의 육식에 대한 탐욕과 그를 위한 살육이 첫 번째이며, 두 번째 외적 표식은 하늘에서 내린 빗방울이 식물이 되어 꽃을 피우는 사건이다. 이 두 외적 표식은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확인해주는 영적 분별의 근거가 된다. 외적 표식은 노아의 내적 영역에서 일관성 있게 확인되며, 노아의 내면과 영혼의 영적 분별력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인도한다. 

     첫 번째 내적 표식은 그의 꿈을 통해 드러난다. 물 속에서 죽음의 고통 가운데 헤매는 피조물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영적 경험들이 얼만큼 타당한지에 대해 질문을 가지게 될 때,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를 찾아간다. 이 만남을 통해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확인되며, 노아에게 주어진 사명과 계획이 뚜렷해지는 환상과 함께 보다 더 선명해진다. 여기서 므두셀라는 노아의 영적지도자(spiritual directdor)의 역할을 맡으며, 두 가지 영적 분별의 지침들(guidelines)을 제시해준다. 첫째는, "네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믿어야 한다!" 둘째는, "기억해라, 하나님이 너, 노아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에 따라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영적 자산으로 절대적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다른 이가 아닌, '노아'라는 특정인을 선택하신 이유를 분별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노아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노아 이야기는 므두셀라로부터 전해진 두 가지 분별의 지침들 사이의 긴장감과 갈등을 통해 드라마적 갈등 요소를 증대시킬 뿐 아니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실존으로부터의 도전>

     실존이란 한 사람의 존재를 규정하는 현재적 위치이다. 영화, <노아>에서 노아가 지닌 실존적 특징은 무엇일까? 그의 인생은 최초의 인간 아담으로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형상을 선한 양심과 거룩한 삶을 바탕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살아내려는 굳은 의지로 뭉쳐져 있다. 그의 역사적 인식에서 인간은 악의 근원이며,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노아가 생각하는 새로운 에덴에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느다. 이런 인식적 극단성은 그의 무결하고 선한 영적인 삶속에서, 실존적 일관성을 보인다. 그러나 인류심판에 대한 노아의 확신 그의 가족들로부터 도전을 받기 시작한다. 첫 번째 장애물은 외부가 아닌 노아 가족의 자녀세대에서 움트고 있었다. 셈의 아내인 일라의 걱정이 첫 번째요, 둘째 아들 함의 실존적 고민이 두 번째이다. 일라는 자신이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자녀 생산을 통해 가족을 일구고자하는 셈의 본능을 채울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둘째 아들 함은 '여인과 하나되고자 하는 남성의 욕망'을 표출하며,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아버지의 무모한 계획에 반발한다.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의 노아의 실존은 도전을 받으며, 고뇌와 내적 갈등속에서 노아의 고민은 점점 깊어져간다. 

     때가 이르러 일라는 쌍둥이 여자 아이들을 출산하였으나, 이는 곧 축복이 아닌 저주로 받아들여져 그녀는 절망감에 쌓이게 된다. 노아가, "여자 아이들은 죽어야 한다"며 잔혹한 모습을 보일 때, 노아의 아내 나아메의 모성 본능은 그 가부장적 리더쉽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여기서 이 영화의 명장면이 연출되는데, 나아메는 노아의 말 중에, 부사 "just"를 반복적으로 되받아치며 맞서고, 절규와 반복을 통해 그 의미를 어느새인가 명사 "just"로 전이시킨다. 노아가 지키고자 하는 정의가 진정 무엇인지를 따져묻는 나아메의 절규는 이 영화의 갈등과 긴장 구조를 극대화하는 명장면으로 탄생된다. 또한 자신에겐 여인과 가족을 허락하지 않은 아버지 노아를 이해하지 못한 함은 결국 인간의 세계로 뛰쳐나가 두발가인의 수하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 두발가인이 방주에 승선하여 다친 몸을 치료할 때, 두발가인이 노아를 죽이려는 순간에 함은 노아의 대척점에 서서 아버지 혹은 리더의 부당함에 맞선다. 아버지를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한 함의 반인륜적 모습과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고자 했던 아들의 본능을 무시한 노아의 강박성이 극대화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영화 관객은 노아의 폭력성에 수긍하면서도 동시에 함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노아의 의지만큼이나 함의 본능은 실존적이고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소명을 이루려는 리더의 노력과 주어진 삶의 실존 사이의 간극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며 갈등을 증폭시킨다. 


<가족, 인류의 재탄생>

     노아의 하나님 뜻 분별과 인간적 실존 사이의 내적 갈등은 며느리인 일라가 쌍둥이 여자 아이를 출산하고, 함이 노아를 죽음의 자리로 초대하면서 고조된다. 일라는 태어난 두 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시아버지 노아를 기다린다. 노아는 자신의 사명과 현실 인식에 충실하고자 여자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달려든다. 쌍둥이 딸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어머니로서의 일라의 모습을 보며 노아의 내적 갈등은 극에 달하지만, 창조주 계획의 신실한 실천자로서의 사명감과 아버지의 실존 사이의 갈등은 노아가 칼을 거두면서 수그러진다. 홍수가 멈추고 방주가 마른 땅에 안착하였을 때에도 노아는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괴로움과 자책감 속에 피폐한 삶을 살아간다. 감독은 이 괴로움과 갈등의 외연적 사건을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 벗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한다. 둘째 아들 함은 노아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순간에 두발가인으로부터 아버지를 구해내고, 장자권으로 상징되는 뱀의 허물을 손에 쥔다. 하지만 뱀의 허물이 여인과 가족에 대한 자신의 원초적 본능과 소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아버지의 세계관으로 상징되는 노아의 가족을 떠남으로서 그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포스트 가인의 모습으로 두 번째 에덴에서 떠난다. 

     방황하던 노아가 일라를 만나 나누는 대화는 드라마적 갈등요소들이 어떻게 변증적으로 해소되며, 노아의 가족이 어떻게 인류의 새로운 출발이 되는지를 묘사하는 결정적 장면이 된다. 일라는 노아의 내적 갈등이 쌍둥이 손녀들을 살려냄으로써 이미 해소되었음을 일깨워준다. "당신은 (아이들을 죽이지 않음으로) 자비를 선택했어요. 자신과 가족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줌으로써 아버지로서 이 가족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죠!” 노아는 자신의 내면에서 서로 모순관계라고 여겨졌던 소명 완수와 아버지라는 실존은 사실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노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데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아의 사명 실패(인류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한)를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인류를 노아의 가족과 자손 안에서 이미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금, 노아에게 므두셀라가 제시한 영적 지도의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떠올리게 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창조주의 말씀을 믿어라!", "노아, 너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 노아의 선한 양심, 아이들을 죽일 수 없는 선한 본성과 양심을 하나님이 사용하셨기에, (노아의 입장에선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노아의 가족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노아 본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과 실존이 갈등과 대치의 대상이었지만, 하나님의 초월적 뜻 안에서는 인류의 재탄생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노아는 쌍둥이 여자아이들을 축복하고, 장자권을 통해 새로운 인류를 이어간다. 


<영화, 노아의 영적 통찰 >

     영화로서 <노아>를 그 이야기 안에서 충실하게 감상하고 해석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영적인 삶에 풍성한 의미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소명을 분별하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 소명 의식은 때에 따라 인간의 인식적, 경험적 한계 안에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그 충돌과 갈등을 영적 리더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적 분별을 실천하는 리더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우리 인간에겐 알려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역, 신비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하도록 선택받은 리더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노아에게 있어서 가장으로서의 실존 안에 자신도 인식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지만, 이 한계 또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사용되었다. 노아의 내면 안에서 갈등요소였던, 한 인간으로서의 인식적 한계와 아버지로서의 실존적 한계 모두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뤄내셨다. 나아가 영화 <노아>는 갈등 해소의 열쇠를 '자비를 통한 용서와 화해'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가족'이라는 인류 공동체 안에 새로운 시작의 씨앗이 자리잡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삶의 영적 여정 속에서 우리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소명과 사명을 이뤄내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리더의 영적 분별의 기준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라는 질문에 영화 <노아>는 넌지시 대답하는 듯 하다. "하나님의 영역,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영역을 인정할 때, 그분에 대한 절대적 신뢰 속에서 내 삶에 주어진 고유한 독특성을 발견해 갈 때, 사랑과 용서라는 영적 여정을 가족 안에서 세워갈 때,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사명은 이미 새롭게 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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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위 햇살

겸손을 훈련할 때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한 줄 묵상 2013.11.05 18:06

겸손의 네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이 [상급자]에게 순종할 때에 그것이 어렵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일이라 할지라도, 또는 심지어 어떤 종류의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마음으로 잠잠히 고통을 품고, 약해지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옮김, 제7장. 35-36. (서울: KIATS, 2011), 43.


베네딕트의 규칙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겸손의 열두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 제7장이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수도자가 높으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녀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리고 그 겸손을 훈련하는 방법이 바로 공동체 안에서의 상급자와 동료 수도자들에 대한 '상호 순종'이다. 특히 겸손의 네 번째 단계는 비록 상급자가 자신에게 맡긴 일이 어렵고, 자신의 소원과 반대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일을 통해서 어떤 피해를 입게 된다고 할지라도 도망치지 않고 잠잠히 그 고통을 품고 감내하는 것이다.


베네딕트의 이러한 가르침은 윗사람의 명령이 부조리하고 불법적이어도 무조건 복종하고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기본적으로 수도 공동체(monastic community)를 배경으로 한다. 수도 공동체에서는 '아버지(abba)' 또는 '어머니(amma)'라고 불리는 수도원장이 수도자들의 영혼을 책임진다. 그(그녀)는 수도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구성원들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간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의 자질과 역할에 대해서 여러 번 그리고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간의 신뢰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무조건적인 순종과 인내'의 이상적인 환경이다.


하지만 이 규칙이 수도원 밖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전혀 관계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나 가정, 직장, 삶의 환경 등에서 상급자(연장자)에게 또는 서로에게 순종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겸손을 훈련하기를 원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어려운 일,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일, 또 (스스로의 눈에는) 자신에게 별 이익이 되지 않는 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방법을 찾는 데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혹시 주님께서 지금 내가 겸손을 훈련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라. 겸손하며 인내해야 할 때인지, 아니면 요나처럼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방향 전환을 해야 할 때인지 주님께 여쭈어 보고 깊이 생각하라. 혼자서 기도만 하기보다는 신뢰하는 영적 지도자와 상의하는 것이 '기도의 행위'로 자신의 욕망과 뜻을 합리화하는 것을 피하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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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분별력을 구하는 기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3.02.06 19:00

지극히 높으신 주님,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제 마음의 어둠을 밝혀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 

저에게 바른 믿음과, 확실한 소망과, 완전한 사랑과,

감각과 지식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제가 주님의 거룩하고 참된 명령을 수행할 수 있게 하소서.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 of Assisi, 1182-1226), 

"The Prayer Before the Crucifix" (십자가상 앞에서의 기도)



청년 프란치스코는 원래 세상에서 명성 있는 기사와 귀족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전쟁과 질병, 그리고 신비 체험 등을 통해서 회심을 경험한다. 이후에 그는 성 다미아노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다가 십자가 위의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재건하거라. 네가 보듯이 그것은 거의 다 무너져가고 있다." 


이 말씀을 듣던 당시 프란치스코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건축재료를 들고와서 자신이 기도하고 있던 성 다미아노 교회를 보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 그는 그 명령이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당시 쇠퇴해가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임을 알고,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고 주님의 교회를 재건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위에 인용한 기도문은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받은 명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하는지 알 수 있도록 주님께서 분별력(discerning heart)을 주시도록 구한 기도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사명(소명)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분별력도, 힘과 지혜도 모두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분별력이 필요할 때마다, 힘과 지혜가 필요할 때마다 이 기도문을 가지고 진실하게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은총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시지 않을까? /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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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바른 목적은 바른 수단을 통해서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2.10.10 06:09
  • 효과적 수단이라도 잘못된 것이면 취하지 않는 것--이 또한 '가난의 영성'이군요.

    BlogIcon 산처럼 2012.10.14 02:40 신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당신이 볼 때에 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발자국과 가난을 따르는 데에 최선의 길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행하세요. 내가 순종한 것처럼 당신도 이것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Francis of Assisi, c. 1182-1226), "A Letter to Brother Leo," 3.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말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프란치스코는 리오 수사에게 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수단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행하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그 바른 목적이란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발자국과 가난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과 '부정의(injustice)'와 '폭력' 같은 잘못된 수단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주님의 발자국과 가난'을 따른다면 절대 자신의 욕망을 섬기며 다른 이들의 생명과 권리와 재산을 빼앗지 못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발자국을 따르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면 결코 잘못된 수단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아씨시의 가난한 성자의 단순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과 '바른 목적은 바른 수단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하려는 일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발자국과 가난을 따르는 최선의 길인지 질문해보자. /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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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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