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과 식별

영성학 논문 2017.07.31 12:29

소명과 식별



    필자가 영성지도를 하다가 만난 신학생 가운데에는, 목사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가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학생은 소명이 없이 신학교를 다니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또 어떤 신학생은 번듯한 직장 생활을 갑자기 그만 두고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에 차서 신학교에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런 신학생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어 사역을 활발하게 잘 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사회생활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소명은 개인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기에, 소명을 잘 식별하는 일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식별을 잘 안내해주는 커리큘럼을 한국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든 실정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소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소명 식별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1. 소명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자 윌리엄 플래처(William C. Placher)에 따르면,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각주:1]은 성경과 교회사에서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다.[각주:2] 먼저 성경은 소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부르심”(call) 또는 “소명”(vocation)이라는 낱말은 신앙으로의 부르심, 또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된 특별한 과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각주:3]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을 일깨우는 말씀이고, 더불어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말씀이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의 소명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기에서 부르심(klesis)은 기독교인으로 부르심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이 되어 기독교인임을 세상에서 드러내며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것 자체를 소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교회사를 통틀어 소명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플래처는 교회사를 네 시기로 나누어서 각 시기별로 소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첫 번째 시기인 초기 교회는, 기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을 소명으로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소수(minority)였다. 기독교인이 되면 수시로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게 된다. 체포되어 고문당하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두 번째 시기인 중세 교회는, 신부나 수도자가 되는 것을 위주로 소명을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 전까지 기독교인을 위협했던 박해가 사라졌다. 누구나 쉽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구체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일상생활을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사제나 수도자가 될 것인가가 소명을 식별하는 주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 시기인 종교개혁 이후에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만인제사장설’과 ‘직업소명설’에 잘 나타나 있듯이,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사제나 수도자로 사는 것만을 기독교인의 중요하고 특별한 소명으로 여기던 것에서 벗어나, 모든 직업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 부르심(klesis)을 직업(Beruf)으로 번역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루터에 따르면, 결혼과 자녀양육을 포함해서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현대다. 우리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다종교 사회일 뿐만 아니라, 직업과 삶의 모양이 분화되고 다양화되어서, 직업과 소명을 동일시하기 힘들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은 더 이상 기독교 사회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비기독교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초기 교회 시대에 기독교인이 했던 질문이 다시 현대 기독교인에게 적용되는 시절이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진행된 분업화로 인해 우리는 직업을 전통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공장에서 부품을 만드는 일부 과정에만 참여하는 노동자가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아울러, 직업만을 소명으로 생각하면, 실업자나 은퇴자는 소명 담론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성경과 교회사를 살펴볼 때, 현대 기독교인을 위해서, 소명은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첫째, 소명은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둘째, 소명은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셋째, 소명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 또는 사역자가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명은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또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소명들은 경우에 따라 한꺼번에 적용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셋째 소명과 넷째 소명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2. 소명 식별 방법: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소명을 식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방법은 대체로 기도, 말씀 묵상, 자신이 지닌 능력과 욕구를 성찰하기,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보기 등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한국 교회에서 여전히 기독교인 개인에게 맡겨져 있고, 한국 교회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소명 식별 방법을 알고 적용하기 위한 첫걸음은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이용하는 것이다. 영성고전에는 식별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소명을 식별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자료는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 1491-1556)의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각주:4]이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교회의 내부에서 개혁을 이끈 영성가 중 한 명이다. 영신수련은 이냐시오가 자신의 영성훈련과 식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영성훈련 안내 책자 즉 매뉴얼이다. 이 책을 쓴 의도는 기독교인이 자신의 소명을 잘 식별하여 선택(election)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냐시오는 당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영성훈련 방법을 통합하여 네 주에 걸친 영성훈련을 제시하였는데, 이 영성훈련은 말씀묵상과 양심성찰, 기도, 식별,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소명 식별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소명을 식별하려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 묵상이다. 영신수련에서 영성훈련 참가자가 네 주에 걸쳐 참여하는 말씀 묵상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주 주제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둘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따르고 싶은 마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셋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수난의 자리까지 따르며 함께 머무는 인내와 용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주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경험하고, 세상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투신할 결심과 용기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성훈련 참가자는 먼저 죄가 정화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맑은 마음과 질서 잡힌 마음으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을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욕구 즉 영적 갈망이 생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또는 왕으로 여기며 그분의 편에 서서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을 선택하려는 용기가 생긴다. 그러므로 소명을 식별하려면 가장 먼저 말씀 묵상을 깊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려고 하는 영적 갈망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소명을 식별하려면 자신의 내면의 경험을 살펴보고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부록에서 식별을 위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규칙을 이해하고 있으면 소명을 식별하기 위한 영성훈련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구분할 때 도움이 된다. 이 규칙에서 이냐시오는 내면의 경험을 다음과 같은 두 종류로 구분 한다. 영적 위로(spiritual consolation)와 영적 실망(spiritual desolation). 영적 위로의 경험은 식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을 때 성령으로부터 오는 경험으로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영원한 것, 즉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증가되는 경험이다. 영적 실망의 경험은 반대로 식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영적으로 퇴보하고 있을 때 하는 경험으로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 감소되는 경험이다. 영적 위로의 경험이라고 해서 모두 긍정적 감정의 경험인 것은 아니며, 영적 실망의 경험이라고 해서 모두 부정적 감정의 경험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영적 위로의 경험과 영적 실망의 경험은 영성훈련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교대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식별하는 사람의 내면이 정화될수록 그리고 성령 충만할수록 영적 실망의 경험은 줄어들고 영적 위로의 경험이 늘어난다. 이것을 경험적으로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소명을 식별할 때 좀 더 쉽게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해당할수록 영적 위로의 경험이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식별 과정을 도와주는 영성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영성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과, 영성지도자가 피지도자(directee), 즉 영성훈련 참가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소명 식별을 개인이 혼자서 하는 것은 자신과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 공동체와 영성지도자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성경과 교리에 맞게 객관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개인은 공동체와 영성지도자를 신뢰하며 자신의 경험을 함께 식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영성지도자는 개인이 소명 식별 과정에서 지나치게 개입하기보다는 성령님만을 의지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영성지도자가 수도원장이라면 소명을 식별하는 영성훈련 참가자가 수도자가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또 영성지도자가 담임목사라면 소명을 식별하는 청년이 목회자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피지도자의 식별 과정에 영성지도자가 자신의 바람을 바탕으로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3. 현대 기독교인을 위한 소명 식별 방법


     소명 식별을 주제로 하는 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는 아마도 프레드릭 뷔크너(Frederick Buechner)가 한 말일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시는 곳은 당신의 깊은 즐거움과 세상의 깊은 굶주림이 만나는 곳이다.”[각주:5] 다시 말해서, 소명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가장 깊은 욕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에서 가장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뷔크너에 따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위의 두 가지가 만나는 접점 또는 교집합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182-1226)는 회심한 후에 가장 큰 기쁨을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사는 삶에서 발견했다. 동시에 그는 이웃에 사는 한센병 환우들이 가장 가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한센병 환우들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현대 개신교인을 위한 소명 식별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 가운데 하나가 지티유(Graduate Theological Union) 및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의 기독교 영성학자인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의 《영적 분별의 길》[각주:6]이라고 할 수 있다. 리버트는 이 책에서 식별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 할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 결정을 내릴 때 사용하면 도움이 될 영성훈련을 체계적으로 안내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내릴 결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정은 소명을 인식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리버트가 제시하는 영성훈련을 소명 식별에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 절차는 다섯 단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영적 갈망과 영적 자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 더 분명해진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선택하기가 더 쉬워진다. 


  2) 소명이라고 추측하는 주제를 명료한 질문 형태로 만들어본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영성지도자로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간호사로 부르시는가? 또는 하나님은 나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부르시는가? 등이 있다. 


  3) 다양한 정보를 모으고 기도한다. 리버트는 네 종류의 정보를 모아보도록 제안 한다. (1) 개인 내적(intra-personal) 정보, (2) 상호 관계(inter-personal) 정보, (3) 구조(structural) 정보, 그리고 (4) 자연 환경(natural, environmental) 정보. 개인 내적 정보란 내가 지닌 지적, 정서적, 신체적, 영적 고유한 특성들을 모두 포함한다. 상호 관계 정보란 내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모든 경험을 포함한다. 구조 정보란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의 역할과 권력과 관련된 경험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자연 환경 정보란 내가 자연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정보들을 모은 후에, 나의 소명이라고 추측하는 주제를 이 정보들에 대입해 보고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기도한다.  


  4) 다양한 영성훈련을 시행하고 기도한다. 리버트는 일곱 가지의 영성훈련을 제안 한다. (1) 떠오르는 기억 경험하기, (2) 상상력을 사용하기, (3) 직관을 사용하기, (4) 몸의 신호를 알아차리기, (5) 이성을 사용하기, (6) 감정을 식별하기, 그리고 (7) 자연 묵상에서 일어나는 경험 사용하기 등. 이 모든 영성훈련은 영적 갈망과 영적 자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 후에 시작한다. 또 이 영성훈련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전제로 실시한다. 영성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명 식별 주제에 대해 가부간의 임시 결정을 내린다. 


  5) 마지막으로 일곱 가지 영성훈련의 결과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서 확증(confirmation)을 받는다. 확증을 위해 사용하는 식별 기준들을 리버트는 시금석이라 부른다. 식별 시금석들은 성령께서 일으키신 경험들의 예로서, 대체로 내가 경험한 것과 비교해보기 위해 사용하는 성경의 경험들과 영성고전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제시한 경험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앞에 언급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의 경험이라든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의 경험을 들 수 있다. 


     영성고전에서 제시된 시금석 경험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냐시오의 식별 규칙에 나오는 영적 위로의 경험이 있다. 그리고 18세기 미국 영적 대각성 운동의 중심 인물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s)[각주:7]에서 제시한 바 있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정서의 신뢰할만한 열두 가지 표지들 역시 식별의 시금석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 열두 가지 표지들은 다음과 같다. (1)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원천에서 옴, (2)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들에 그 자체의 탁월성 때문에 이끌림, (3) 거룩한 일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경험에서 옴, (4)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수반함, (5) 깊게 자리한 확신을 수반함, (6) 겸손을 수반함, (7) 본성의 참된 변화를 수반함, (8)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을 수반함, (9) 부드러운 마음과 영의 온유함을 수반함, (10) 균형과 조화를 수반함, (11)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커짐, (12) 기독교적 실천들이 증가함. 


     필자는 이상에서 소명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그리고 소명을 식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훈련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소명을 식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지닌 두 가지 특징을 기억하자. 첫째,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자유롭게 와서 보고 선택하게 하신다. 소명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싹트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 없이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식별하는 것은 한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 그러므로 조급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너무 앞서거나 너무 뒤떨어지거나 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면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에 기독교인의 소명 식별을 도와줄 목회자와 영성지도자가 많이 준비되기를 기도한다. / 아우의 마음 이강학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36-43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1. 1. 이 글에서 '소명'과 '부르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본문으로]
  2. 2. William C. Placher, ed., Callings: Twenty Centuries of Christian Wisdom on Vocation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5). [본문으로]
  3. 3. 한글 성경은 모두 '개역개정판'을 인용한다. [본문으로]
  4. 4. 이냐시오 로욜라, <영신수련>, 정제천 역 (서울: 이냐시오영성연구소, 2010). [본문으로]
  5. 5. Frederick Buechner, Wishful Thinking: A Theological ABC (New York: Harper and Row, 1973), 95. [본문으로]
  6.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본문으로]
  7. 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과 정서》, 서문강 역 (서울: 지평서원, 20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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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영적 분별이란 무엇인가 : 개념과 유형들

영성학 논문 2017.06.28 08:36

우리의 삶은 분별과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성경은 분별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서 자신들의 잘못된 욕망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여,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치명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수천 년 후 예수는 사탄의 유혹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했지만, 정확한 분별과 자기희생적 선택을 통해, 첫 남자와 여자의 실패로 죽음의 어둠 속에 빠진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다. 그래서 분별과 선택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영적 분별 또는 식별(spiritual discernment)은 폭넓게 정의하면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들)이 체험한 어떤 영적 경험이나 현상, 또는 내면의 생각과 정서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또는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선택을 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되는 영적 분별에 대한 실천과 가르침들을 하나의 정의로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 매우 다양한 상황 속에서 분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실천되는 만큼,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되는 영적 분별은 다양한 모습과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영적 분별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과 실천들을 각각 짝을 이루는 몇 가지 유형들로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미리 언급해야 할 것은 각각의 대극들은 상반된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곧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다양한 형태의 영적 분별들에는 각각의 특징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1. 분별의 대상에 따라 : 영들을 분별함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시간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또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영적 경험이나 현상에 초점을 두는 유형과 미래의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이 독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자가 후자를 위한 과정으로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먼저, 첫 번째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어의 어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분별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동사 ‘discern’은 ‘다른 것으로부터 어떤 하나를 구별하다, 가려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라틴어 ‘discernere’[디스케르네레]에서 왔다. 그래서 어원적으로 분별이란 섞여 있는 것들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행위 또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섞여 있는 것들, 곧 분별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으로 영적 분별을 지칭하기 위해 ‘영분별’(discernment of spirits)[각주:1]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알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때의 분별의 대상은 영들(spirits)이다. 곧, 어떤 영적 경험, 현상, 생각 등을 일으키도록 영향을 주는 영적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언적 전통이 발전하면서 어떤 특정한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진리의 영으로부터 받은 것인지 거짓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분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일으키실 선지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반드시 들어야 하지만,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고 가르친다(신 18:18-22). 이렇게 단순하게 말의 성취 여부로 그 메시지의 영적 출처를 분별하는 원칙은 신약 시대에 이르게 되면 보다 세밀하게 발전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할 것을 말하면서,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원리를 분별 기준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열매”라는 결과를 보고, 그 열매를 맺은 이가 “좋은 나무”(참 선지자)인지 “못된 나무”(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한다는 원리는 모세가 제시한 원칙과 비슷하다. 그러나 열매의 유무가 아니라 질을 보고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분별한다는 점에서 분별의 기준이 보다 세밀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심화된 분별의 원리가 필요한 이유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는 설명한다(마 7:15-23). 비슷하게 사도 바울도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사탄의 일꾼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후 11:13-15)고 경고하는데 이 구절은 이후에 분별에 관한 문헌들에서 자주 인용된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는 사도 요한의 편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요일 4:1-6). 그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이미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옴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메시지와 “적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 메시지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시험하라”(δοκιμάζετε)[도키마제테]고 권고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한이 제시한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의 여부라는 점이다. 곧,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와의 논쟁 속에 있던 요한 공동체를 위해, 진리로 간주되는 교리를 예언자의 참됨과 거짓됨을 분별하는 시금석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영적 분별의 기준이 공인된 텍스트(성경)와 교회의 가르침(교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최소한 그것들에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전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영분별에 대한 논의들의 바탕에는 인간 외부의 영적 존재들이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3세기 초의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 c.184-c.254)는 『제일 원리에 대하여』(De Principiis)에서 이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천사들) 또는 사탄(의 천사들)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게 하거나 유혹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 생각들을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어서 외부에서 주입되는 생각들을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제일 원리』, 3.2.4). 

     또한 요한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360-435)는 『담화집』(Conferences)에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을 그 기원과 원인과 저자를 추적함으로써” 현명하게 분별하고, 누가 그 생각을 제안했는지에 따라서 그 생각을 적절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구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성령의 불로 정화된 것인지, 미신의 일부인지, 세속 철학의 교만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세히 조사하고 시험해야 한다고 말한다(『담화집』, 1.20.1-2).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영적 분별의 대상이 한 사람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 실체들(선한 영 또는 악한 영)로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에 대해 체계적인 분별 원칙을 제공한 이는 16세기의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다. 그는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의 말미에 두 가지 묶음의 식별 원칙들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첫 번째 묶음(313-327)은 수련의 첫째 주(단계)에 있는 초보자를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묶음(328-336)은 둘째 주(단계)에 있는 보다 진보한 수련자에게 적합한 규칙이다. 이냐시오는 내면의 움직임들을 크게 영적 위로(consolación)와 영적 실망(desolación)으로 분류하는데, 위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정서적 움직임을 말하고, 실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정서적 움직임 지칭한다. 그는 첫째 주간을 위한 규칙에서는 영적 실망 중에 있을 때에는 이미 내린 선택을 변경하지 말고, 인내 중에 위로를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반대로 영적 위로 중에 있을 때에는 교만하지 말고 실망이 올 때를 대비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둘째 주간을 위한 규칙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영적 위로 같으나 그 안에는 마귀의 속임수가 숨겨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바탕은 물론 생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모두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안내한다. 

     “참된 믿음은 대체로 거룩한 정서(affection) 안에 있다.”고 믿은 개신교 목회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또한 인간 내면의 정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을 경험한 그는 “부흥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에 거짓된 신앙도 함께 성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감정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각주:2] 그래서 그는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에서 인간 내면의 정서들이 성령의 체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믿을 만한 표지(reliable signs) 열두 가지와 믿을 수 없는 표지 열두 가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 철학자였던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 존재들보다는 정서 자체에 초점을 두고 상당히 이성적인 분별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영적 분별에서 이성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냐시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영적 분별의 두 번째 유형, 곧 미래의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경우들을 살펴보자. 구약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확인하기 위해 양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 그를 “큰 용사”라 부르시며, 그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기드온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부를 확실히 분별하기 위해서 양털을 가지고 두 번이나 “시험”(האנ)[안세]했다(사 6:38). 이때 기드온이 사용한 히브리 단어 “נס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실 때(창 22:1), 그리고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할 때(왕상 10:1)와 같은 다양한 상황들에서 사용되는데, ‘실험적으로 시도해 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드온의 이와 같은 실험은 자신의 내면의 생각이나 움직임보다는 외적인 표징이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시도하는 사례의 모델이 되었다.

     신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보다 분명한 표현이 등장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 하라.”(롬 12:2).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δοκιμάζω”[도키마조]도 히브리어 “נסה”와 기본적으로 비슷한 뜻을 갖고 있는데, 위에서 사도 요한이 영들을 시험하라(요일4:1)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한 분별의 대상은 영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당시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이 세대”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여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몸, 곧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롬 12:1) 드릴 것이 요구되었다. 비슷하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이 없기를 기도한다(빌 1:10).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려는 바람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지만, 특히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급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구체적인 길을 찾는 이들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3세기 초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c.1181-1226)가 회심 후 성 다미아노(San Damiano) 교회에서 드린 “십자가상 앞에서의 기도”(The Prayer before the Crucifix)는 그가 십자가 위의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 곧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분별력(discerning heart)을 구하는 청원이다. 

     앞서 언급한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제시한 식별 규칙 또한 그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는 『영신 수련』의 첫째 주를 시작하는 「원리와 기초」(23)에서 ‘질병과 건강’, ‘가난과 부’, ‘불명예와 명예’, ‘단명과 장수’ 중 어느 한 쪽을 더 원하지 않는 초연한 마음(indifference)을 가지는 것을 선택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셋째 주간의 말미에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169-188)를 구체적으로 제공하는데, 우리가 창조된 목적,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자신의 영혼 구원에 가장 도움이 되는 수단을 선택해야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2. 분별의 주체에 따라 : 개인 분별과 공동체 분별

다음으로 영적 분별을 행하는 주체에 따라 개인 분별과 공동체 분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개인 분별은 말 그대로 한 개인이 자신에게 일어난 영적인 경험이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을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특별히 4세기 이후 사막의 수도자들을 시작으로 흘러온 수도 전통은 개인적 차원의 분별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개인이 고립된 상태에서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교만이나 독선, 또는 뒤틀린 욕망이나 무지로 인해 분별에 실패하고 잘못된 선택을 내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담화집』, 2.5.1). 이런 점에서 영적 분별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어둠이 빛 아래에서 즉시 사라지는 것처럼, 악한 생각이 원로 앞에 드러나게 되면 그 즉시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자는 경험이 많고 덕이 높은 원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겸손히 고백하고 그의 조언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압바 모세(Moses)는 “참된 분별은 참된 겸손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담화집』, 2.10.1). 분별의 전제로 겸손과 순종을 강조한 것은 7세기의 수도자 요한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 c.579-649)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수도승의 사다리』(Ladders of Divine Ascent)에서 ‘겸손’에서 ‘분별’이 나오고, ‘분별’에서 ‘통찰’이 나오며, ‘통찰’에서 ‘예지’가 나오는데, “이렇게 자신 앞에 예비된 복들을 보고서도 이 온당한 순종의 길을 따르지 않을 이가 누가 있느냐?”라고 묻는다(『사다리』, 4.105). 

     영적 분별이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영적 분별은 고립된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대일의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대다의 관계로 확장되면 개인적 분별이 확실히 공동체의 영역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오늘날 친우회(Quakers) 전통의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가 그렇다. 이 위원회는 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분별하기 위해 공동체 내의 신뢰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꾸려진다. (또는 피정 중에는 제3자에 의해서 모임이 꾸려지기도 한다.) 여기서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는 이는 초점 인물(focus person)이 되고 그를 돕는 이들은 위원들이 된다. 이때 주의할 것은 위원들은 초점 인물이 분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질문들을 하는 것이지,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리도록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명료화위원회는 분별 과정에서 공동체가 관여하기는 하지만, 분별의 주체가 개인이며, 분별의 대상도 개인적 사안이라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공동체 분별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공동체 분별은 공동체가 공동의 사안을 놓고 함께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앞서 언급한 성서의 여러 사례들은 개인적 차원에서보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행해진 또는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로마의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권면할 때, 그는 확실히 공동체를 분별의 환경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신약학자 로버트 쥬엣(Robert Jewett)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분별의 주체가 “너희”라는 복수인 점과, “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이라는 동사가 보통 공적 영역에서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의 초점은 공동으로 결정 내리는 것에 놓여 있다고 주석한다. 그에 의하면, “로마서의 경우, 분별되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공동체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실천하기 원하시는 특정한 행동을 말한다.”[각주:3] 

     기독교 역사에서의 공동체 분별의 예를 들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냐시오와 여섯 명의 그의 동료들은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정말 하나의 수도회로 결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기도하고, 대화하고, 분별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들은 일정 기간 동안 낮에는 일상적인 사역을 행하고, 밤에는 모여 함께 분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것은 공동체 분별의 좋은 모델을 제공해 준다. 더불어 친우회에서 공동체의 사안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월회(monthly meeting) 중에 대화와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 또한 공동체 분별의 좋은 사례다. 이들은 의견의 불일치가 있으면 침묵 가운데 내면의 신성한 빛을 관조하고, 만장일치를 이룰 때까지 수년이 걸리더라도 결정을 보류한다.


3. 기타 : 분별력의 출처에 따라 그리고 오늘날의 경향

마이클 벅클리(Michael J. Buckley)는 분별력의 출처에 따라 다음의 네 가지 유형을 구별한다. (1) 성령에 의해 부여된 은사, (2)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타고난 감각, (3)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 (4) 이 세 가지의 혼합.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첫 번째 출처, 곧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현대로 올수록 세 번째 출처, 곧 학습과 훈련을 강조한다.[각주:4] 

     (1)과 (2)의 경우에는 영적 분별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이들, 또는 분별 감각을 타고난 이들에게로 제한되지만, (3)에서는 예언자와 같은 신적 매개자를 의지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영적 지도자 또는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영적 분별을 행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소명의 발견과 같은 인생의 굵직굵직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도록(갈 5:16-24) 장려한다. 『영적 분별의 길』(The Way of Discernment)의 저자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는 “분별은 하나님이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고, 또 우리를 개인과 공동체로 부르시는 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게 된다.”라고 정의하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지속적인 과정을 강조한다.[각주:5] 이 책에서 그녀는 이성뿐만이 아니라, 기억, 통찰, 몸, 상상력, 감성, 자연 등을 활용한 다양한 분별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오늘날 증대되는 사회적 의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시대적 차원에서 분별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이천여 년 전, 날씨는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의 탄식이(눅 12:5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대의 징표들을 읽는 것”으로 다시 강조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사회적 차원의 분별(social discernment)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취해야할 행동과 실천을 분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나 문화 속에 내재된 불의나 부정 등을 분별함으로써 변혁을 추구하는 것까지 목표로 삼는다.  


     지금까지 기독교 전통에서의 다양한 영적 분별의 개념과 유형들의 윤곽을 개략적으로 그려보았다. 분명한 것은 이 오래된 영적 훈련 또는 실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에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선배들의 경험들, 곧 그들이 분별에서 실패하거나 성공한 이야기들과 값진 조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소중한 과정으로 매순간 우리를 초대하고 있으실 뿐만 아니라, 안개로 뒤덮인 그 길을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안내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처럼 우리가 그 온당한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바람연필 권혁일


참고문헌

권철우.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목회와신학」 318 (2015년 12월), 182-185.

리버트, 엘리자베스. 『영적 분별의 길: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결정 내리기』,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s.v. “Discernment of Spirits.”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7.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26-35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이 용어는 헬라어 ‘διακρίσεις πνευμάτων’[디아크리세이스 프뉴마톤], 라틴어 ‘discretio spirituum’[디스크레시오 스피리툼]을 번역한 것으로서,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2. 권철우,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목회와신학」 318 (2015년 12월), 183. [본문으로]
  3.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7), 733-734. [본문으로]
  4.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s.v. “Discernment of Spirits.” [본문으로]
  5.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결정 내리기』, 이강학 역(서울: 좋은씨앗, 2011), 4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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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상처

     사순절, 주님의 성흔을 묵상하는 때입니다. 

 

     성흔(stigmata)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말하지요. 예로부터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 성흔을 묵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예수의 상처까지도 닮기 원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stigmata)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말했고, 예수를 닮기를 추구했던 성 프란체스코(Fransis of Assisi: 1181-1226)는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베르나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몸에 오상(五傷)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실제로 육체에 성흔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두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고난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고백을 그들은 정말 급진적인 삶으로 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에 실제로 성흔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흔이나, 나의 성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성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흔(聖痕)



누가 풀잎을 자르는가

누가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을 칼로 찌르는가

누가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가


이슬의 피가 흐른다

이슬의 붉은 피가 풀잎을 적시고

하늘과 땅과 모든 인간을 적신다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으나

나는 내 상처가 성흔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이슬의 손에 못을 박았으므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으므로


-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80.



     시인은 성화 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거리나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려진 풀잎에서, 그리고 풀잎 위의 이슬에서 성흔을 봅니다. 나아가 이슬의 붉은 피가 하늘과 땅의 모든 인간을 적신다고 말합니다. 보통 민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신비하게 여겨져 온 해·달·별이 아니라, 또는 소나무나 백로처럼 지고하게 여겨져 온 동식물이 아니라, 하찮고 흔하게 여겨져 온 풀잎과 이슬에서 거룩한 상처와 붉은 피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서울의 예수〉(1982)에 나온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라는 표현을 생각나게 합니다.


     풀잎은 인간의 욕심에 훼손된 자연 세계일 수도 있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권력자들의 폭압에 짓밟힌 민초(民草)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은 이슬처럼 맑고 죄가 없으심에도 붉은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이슬처럼 연약한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가장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5:40, 45).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라는 3연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이처럼 시인은 소위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상처에서, 특히 풀잎과 같이 낮고 흔한 사람들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성흔을 봅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당신이 상처 입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사53:4), 인간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시인은 다른 이들의 상처는 성흔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상처는 성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는 1연에서 누가 풀잎을 자르고,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었는지 물었지요. 그런데 3연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 이슬의 손에 못을” 박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죽인 죄보다 주님의 사랑은 더욱 크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요(눅23:34). 그러므로 시인의 고백은 그의 신학적 이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연민에 빠지면, 다른 이들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에, 만약 우리가 성화나 영화 속의 그리스도의 상처만 보고, 세상의 풀잎들과 이슬들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제대로 묵상하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만 아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3년 전 고난 주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세월호는 이 사순절에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몸에 많은 상처들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마치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희망과 기쁨을 잃었던 이들의 상처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었던 모든 이들의 상처가 그리스도의 성흔, 거룩한 상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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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연의 모든 생명을 형제자매로 부르다

자연의 모든 생명을 형제자매로 부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



숲, 힐링, 그리고 생명

    몇 해 전부터 한국 사회는 웰빙(well being)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힐링’(healing)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책, 먹거리, 여행, 방송 프로그램 등 ‘힐링’ 아닌 것들이 없을 정도다. 웰빙 시대가 유기농 식품이나 슬로프드(Slow food) 등 먹거리가 이끈 시대라면, 힐링 시대는 숲이 이끄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에는 이름도 몰랐을 동네 뒷산에 올레길, 둘레길, 비렁길 등의 멋진 이름을 붙이는 것도 숲의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 7월22일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는 숲 속을 걷는 것이 우리 뇌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도시생활이 사람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그레고리 브랫맨(Gregory Bratman)은 서른여덟 명을 대상으로 사람이 걷는 환경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을 했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90분 동안, 한 그룹은 한적하고 녹음이 우거진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를 걷게 했고, 다른 한 그룹은 복잡한 팔로알토 시내를 걷게 했다. ‘걷기’가 끝난 직후에 정신 건강 설문지와 뇌 정밀검사를 해보니 한적한 숲길을 걸었던 그룹에서만 모든 검사에서 걷기 전보다 향상된 결과를 보여주었고, 혈압도 더 안정되었다. 숲과 힐링의 인과관계를 증명한 하나의 예인데, 숲의 치유능력은 숲이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난 8월 초에 교회의 청장년 그룹과 함께 2박 3일의 일정으로 킹스 캐니언 국립공원(Kings Canyon National Park)을 다녀왔다. 겨우 삼 일이지만 ‘휴대폰 없는 삶’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숲의 멋에 흠뻑 빠져갔다. 숲은 생명 아닌 것들로 상처 받은 우리의 눈과 귀를 치유하고 회복시킨다. 숲에는 생명 아닌 풍경도, 생명 아닌 소리도 없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잠들고, 이름 모를 새소리가 알람을 대신한다. 바람에 흘러가는 옅은 구름들과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은 침침해진 눈을 씻어주고,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 소리며 시원한 물소리는 막힌 귀를 뚫어준다. 숲의 멋은 곧 ‘생명의 멋’이다. 그래서 숲에서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수다와 끊임없는 질문들도 온통 생명에 대한 것뿐이다. 그 멋을 즐기며 인간은 한 생명으로서의 신비롭고 멋진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숲은 창조주를 닮은 생명의 멋으로 충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이후로 사람들은 피조 세계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인간은 오랫동안 여타의 피조 생명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과 짐승의 생명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사람에게 불어 넣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창2:7). 여기서 생령(개역개정)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말 네페쉬 하야’는 인간 외에 ‘생물’로 번역된 다른 동물계를 가리킬 때에도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창1:20, 21, 24, 2:7, 19).[각주:1] 사람이나 생물이나 모두 똑같은 네페쉬 하야(생명)다. 또한 인간의 창조 과정이 좀 더 하나님과 친밀했다고는 하나, 재료는 사람이나 생물이나 같다. 사람이 흙에서 왔듯이, 하나님은 땅에게 온갖 종류의 생물과 짐승들을 내어라고 명령하셨다(창1:24-25). 

    창조 신앙은 자연숭배라는 이교 사상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얻어낸 신학이기는 하지만, 자연을 정복과 파괴의 대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덴은 하나님-인간-자연이 화목한 가족처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곳이었고, 종국에 주님이 통치하실 나라는 인간과 자연이 숭배, 정복, 혹은 갑을의 관계를 이루는 곳이 아니라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뒹굴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는(사11:6-8) 온 생명이 더불어 형제자매가 되는 가정 공동체이다.  


형제 해와 자매 달의 찬양

"Francis and the Wolf" by John August Swanson. Image from www.johnaugustswanson.com

     낮의 해와 밤의 달을 숭배 혹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스런 형제와 자매로 칭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했던 분이 있었다. 가난의 성자로 많이 알려진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다. 그의 저작은 주로 수도자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수도회를 위한 짧은 교훈들로서 남겨진 글이 많지는 않다. 그 중에서 그의 문학적 기질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을 고르라면 단연 태양의 노래〉(The Canticle of Brother Sun)다. 태양의 노래〉는 1225년부터 1226년 사이에 프란체스코가 임종하기 직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총 14절로 이루어졌다. 첫째 부분은 1-9절로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관을 잘 담고 있으며 ‘피조물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둘째 부분은 10-11절로 불화를 겪었던 아씨시 시장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으며 ‘용서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마지막 부분인 12-14절은 ‘죽음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조차도 ‘자매’로 부르는 그의 초월적 영성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지면상 주제와 관련된 첫째 부분만을 소개한다.   


1.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며, 선하신 주여

  찬양과 영광과 존경과 모든 은총이 당신의 것입니다.

2. 지존이시여, 이 모든 것은 오직 당신께 속한 것이오니

   사람은 누구나 당신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3.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친애하는 형제 해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는 낮이며, 그를 통해 당신은 우리에게 빛을 주십니다,

4. 그는 아름다우며, 위대한 광채로 빛을 내며

   지극히 높으신 당신을 닮았습니다. 

5. 내 주여, 자매 달과 별들의 찬양을 받으소서.

   당신은 저들을 맑고 귀하고 아름답게 하늘에 조성하셨나이다. 

6. 내 주여, 형제 바람의 찬양을 받으소서

   공기와 구름과 화창한 날씨, 그리고 모든 날씨의 찬양을 받으소서

   저들을 통하여 당신이 만드신 것들을 기르시나이다.

7. 내 주여, 자매 물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녀는 매우 유용하고 겸손하며 귀하면서도 고상합니다.

8. 내 주여, 형제 불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로 인해 당신이 밤을 밝혀 주십니다.

   그는 아름답고 활동적이며, 굳세고 강합니다. 

9. 내 주여, 우리의 자매이자 어머니인 땅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녀는 우리를 기르고, 다스리며

   알록달록한 꽃과 식물들, 그리고 온갖 과일을 내어줍니다.[각주: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감각적 경험에 의지해 자연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한다. 반면에 이 노래는 프란체스코가 죽기 1년 전, 병약하고 거의 장님이 된 상태에서 극심한 병고에 시달리던 때에 작성됐다. 즉, 그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젖어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싹튼 그의 형제사랑이 다른 피조세계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태양의 노래〉를 ‘자연에 대한 찬가’로 오해할 수 없는 것은 피조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기준이 이 작품 안에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본문의 1-2절은 오직 지극히 높으신 주님만이 찬양의 대상이며, 창조된 모든 피조세계는 주님께만 절대적으로 종속됨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이어지는 3-9절의 노래는 모든 피조세계가 오직 지극히 높으신 주께만 절대적으로 종속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그 절대적 종속의 표현으로 드리는 찬양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프란체스코의 자연관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그는 고난당하시는 예수(Crucified Christ)를 온 삶을 다해 사랑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그의 생애 말년에는 주께서 그의 양 손에 예수님의 못 자국(聖痕, stigmata)을 주실 정도였다고 후대 사람들은 전한다. 프란체스코가 그토록 십자가의 예수를 사랑했던 것은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 된 피조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는 친히 자신을 낮추어 우리의 형제가 되어 주셨는데,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과 하나로 이어주는 맏형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따라서 프란체스코는 인간과 자연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형제 관계라고 이해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토록 강조했던 형제 사랑, 특히 가난한 형제들의 사랑을 철저히 실천하면서 ‘가난한 형제’의 범주를 자연세계까지 확장하였다. 평생을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했던 프란체스코에게는 숲을 거닐며 만나는 모든 생명들도 사랑하고 친교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제자매였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영성을 통해 그는 모든 생명을 수직적인 위계질서로 분류했던 기존의 세계관을 탈피할 수 있었다. 


숲과 목회

    지난 6월 18일 가톨릭교회에서는 프란체스코 교종이 역대 교종으로는 처음으로 생태 문제를 다룬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회칙을 발표했다. 특히 이번 회칙의 제목이 태양의 노래〉의 반복하는 구절 찬미(양)를 받으소서(Praised be You)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의 자연관과 영성은 전체 가톨릭교회 사역의 지침이 될 것이고, 작은 지역 교구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회는 어떤가? 매 년 급격한 기후 변화에 따른 피해가 늘어나면서 이미 ‘자연과 환경’은 신학의 주된 토론 주제가 되었지만, 교회에서는 여전히 목회사역의 끄트머리에도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사실 성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는 우리에게 꽤 친숙한 작품이고, 심지어 자주 즐겨 부르기까지 한다. 어쩌면 가톨릭 신자들 보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노래일지 모른다. 새 찬송가 69장 〈온 천하 만물 우러러〉가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찬송은 야외예배의 애창곡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찬송을 프란체스코의 것으로 쉽게 연결 짓지 못하는 이유는  온 천하 만물 우러러〉가 제목부터 가사까지 원작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새 찬송가에 실린 이 곡은 1927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출판한 《장로교 찬송가》(The Church Hymnary)에서 번역된 것으로, 윌리엄 드레퍼(William Draper)가 어린이 성령강림절 찬송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번역이 아쉬운 것은 자연에 대한 프란체스코의 태도와 관점을 제대로 옮겨내지 못해서인데, 그는 형제(Brother)자매(Sister)를 모두 그대(Thou)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연의 피조물들도 마땅히 존중할 생명들이나, 그들을 형제와 자매로는 수용할 수 없었던 그의 자연관이 번역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한국 교회는 100년 가까이 〈태양의 노래〉를 불러왔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자연관은 한 세기 전과 비교하여 그리 진일보(進一步)하지 못했다. 물론 교회들도 숲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회중이 많이 모이는 집회형 기도원보다 조용한 숲 속의 영성센터를 선호하는 이들이 꽤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로는 교회가 숲(자연과 환경)을 목회와 연결시켰다고 말 할 수 없다.  

    앞으로 자연을 통한 영성 훈련과 생태 문제에 참여하는 목회사역들이 계속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숲에 대한 ‘목회 감각’을 살려내는 일이 시급하다. 목회자의 자연관은 설교와 사역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체스코 영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목회 감각’은 숲을 이루는 온 생명을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숲에 관심을 갖고 좋아한다는 것과, 그것을 같은 생명의 형제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얼마든지 숲의 생명들을 쉼, 치유, 혹은 묵상의 도구로서 좋아할 수 있다. 혹은 보호와 관리의 대상으로 내려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숲의 충만한 생명력을 지나치게 우러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는 인간과 숲이 서로 형제자매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어졌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 심겨져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숲 속에서 온전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고, 숲의 생명들도 인간 형제의 따사로운 손길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태양의 노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의지하는 모든 생명들이 한 교회의 성도가 되어 찬양하며 예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적 감각을 갖출 때 숲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최고의 영성 훈련 장소로,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하고 치유하고 선교해야 하는 목회지로 서서히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 김종수,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 담임목사, D.Min Candidate(Pacific School of Religion, 기독교 영성)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0월 호에 실린 열 번째 글입니다.


  1. 1. 녹색의 눈으로 읽는 성서, “예수의 환경 친화적 가르침” 소기천(대한기독교서회, 2002) p.129. [본문으로]
  2. 2. Regis J. Armstrong and Ignatius C. Brady 가 공동 영역한 Francis and Clare: The Complete Works (Paulist Press, 1982)에서 필자가 번역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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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산을 부활의 터널로 (김금남)

한 줄 묵상 2015.08.13 10:17

제가 살고 있는 이 한국 땅의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직행하려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사이에 있는 장성 갈재 때문에 그 태산을 넘을 길이 없어서 그 태산 속에 터널을 뚫어서 고속도로를 연결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갈 때 터널이 뚫려있는 길을 신기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산 앞에 서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으므로 가 볼 수 없었던 것을 터널을 뚫[음으로써] 가서 보고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므로 내세가 저희들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 이제는 광주에서 서울을 간 사람이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 없이 가는 것처럼 주님이 부활하시고 천상으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사람이 금세에서 내세를 가는 길[에] 죽음이라는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 김금남, 《동광원 사람들》, 217-8.

헨리 나우웬이 말한 “죽음과 친해지기”(befriending with death)는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얼른 떠오르는 분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Brother Sun)를 보면,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죽음을 “자매”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맞이하셨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 토착 개신교 수도원인 동광원의 김금남 원장의 글을 읽다가 ‘아, 이분도 죽음을 초월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원장은 고속버스를 타고 터널을 통과하다가 부활이 죽음이라는 산을 통과하는 터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사실 김 원장의 스승인 이현필 선생, 그리고 이현필 선생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성의 맥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이현필 선생이 돌아가시자 류영모 선생이 그 무덤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선생, 얼마나 시원하오. 얼마나 시원하오. 이 선생 잘했소. 부럽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이 부활 신앙의 기개가 죽음의 권력 아래서 답답하고 어두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면 좋겠다. / 이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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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형제로 찬양 받으소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5.07.29 16:26
바람 형제와 공기, 흐리거나 청명한, 모든 종류의 날씨로 인하여 

나의 주님, 찬양 받으소서. 그들로 인하여 당신의 피조물들이 

그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각주:1]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2-1226), "태양의 찬가" (The Canticle of the Sun) 중에서

 


'도시 문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신학적 사상 중에 하나이다. 동생 아벨을 죽인 에서는 부모를 떠나 에돔이란 민족의 아비가 되고, 에돔인들은 철을 다루는 전문가들로서, 도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영화 "노아"는 이 대목을 영상화하는데 탁월한 면을 보여준다) 

인간 탐욕의 상징물이 되었던 바벨탑도 타락학 욕망들이 도시라는 공간을 통해 정당화하고 확장되고 구현되어 가는 과정속에 세워진 구조적 상징체였다. 바벨탑의 붕괴는 도시 문명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인생의 여정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다면, 그 첫 걸음은 도시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 안에서, 자연의 순리와 이치에 순응하며
생과 사의 순환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배워나갔던 것이 믿음의 선조들이 걸었던 영적이 여정이었다. 

도시는 인간 탐욕의 집합체이며 끝없는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탐욕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문화적 생산 행위의 산물이다.
 
그 도시에서의 삶은 한 영혼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살아내기에 턱없이 버겁고 힘겨운 영적 전쟁터이다. 물질적 풍요로 포장된 성공에 대한 허황된 이상은 탐욕과 욕망을 불러 모으고, 경쟁과 생존의 몸부림을 감내하도록 강요한다. 창조적 질서가 녹아 있는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소생시키며 본연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자연에 대한 열망은 등한시하도록 부추기는 세속적 욕구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도시의 삶에 적응하다가 "이명"이란 낯설고 괴로운 질환을 얻고 돌아본다. 

우리는 왜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는 삶은 
도시에서 가능한가?

성인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가뭄 속에 천지를 깨우는 천둥처럼 이 세상에 울린다.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으로 메말라 버린 호수와 밭에 
단비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바람과 비구름의
치유와 생명력을 당신들은 아느냐고!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느냐고! 
창조의 질서를 누리며 사느냐고!

 / 이주형

 


 


  1.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Brother Wind, and Through the air, cloudy and serene, and every kind of weather through which You give sustenance to Your creature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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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와 책망을 겸손히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5.06.18 00:30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충고와 책망과 꾸지람을 마치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인내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은 복됩니다…. 변명하는 데 빠르지 않고 본인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수치와 책망을 겸손되이 참아 견디는 종은 복됩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의 글(분도출판사, 2004), 영적 권고 23.

얼마 전에 지인에게 충고 한마디를 들었다. 아니, 충고라고 하기엔 동정과 호의가 가득한 조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하루 종일 마음이 평화롭지 못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이 뭔데', '뭘 안다고' 같은 단어들이 내 안에서 하루 종일 춤을 추었다. 형제 자매들에게 듣는 책망과 충고들은 신앙과 인격을 성숙시키는 좋은 거름이 된다. 그러나 그 거름은 입에 달지 않은데, 나이가 들수록 더 쓰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이 들수록 더 옹졸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 옹졸함이란 다름 아닌 교만의 결과다. 교만이 사람을 좁게 만든다. 인내심은 줄고, 화가 늘어난다. 듣는 일은 줄고, 말은 많아진다. 웃음은 줄고, 호통은 커진다. 부끄러움은 줄고, 뻔뻔함은 늘어난다. 사죄는 줄고, 변명은 늘어난다. 그래서 나이들수록 더 기도가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겸손 훈련'이 절실해진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도망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참담할까? 그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위로가 필요한 다윗에게 오히려 저주를 퍼붓는다. 다윗의 신복 아비새는 “이 죽은 개가 어찌 왕을 저주합니까? 제가 머리를 베어오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그냥 나둬, 저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야.”라고 답한다. 사람의 저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겸손이 얼마나 대단한지, 더 엎드려 겸손을 훈련해야겠다.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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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과 

누르시아의 베네딕트의 규칙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2천년의 역사를 넘어서 지금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들 중 하나는 교회가 공동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교회는 교회가 공동체인가라는 질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목회자들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성경적 공동체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와 동시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열두 명의 제자공동체를 세운 일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서 열두 명의 제자들이 형성한 공동체가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공동체가 지닌 특징은 무엇인가? 공동체와 관련해서 신앙의 선배들이 영성사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참고한 두 개의 본문은 복음서에서 ‘열두 제자 파송’(마태복음 10:1-15)과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초대교회의 모습’(사도행전 2:42-47, 사도행전 4:32-37)일 것이다. 


  먼저, ‘열두 제자 파송’ 본문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제자공동체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이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7). 둘째,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에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주신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 셋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여행하는 공동체였다. 넷째, 제자공동체는 복음 전도 여행 시에 돈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롭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8). 또 여행과 숙박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9-11). 다섯째, 병행본문인 마가복음 6:7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둘씩 둘씩 보내셨는데 이 역시 전도 여행의 공동체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부가적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은 일차적으로 제자공동체에 주어진 기도문이라는 사실 역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주기도문에서 제시된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제자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고 환경을 마련해달라는 요청이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간구들은 제자공동체의 비전과 방향을 기억하고잘 따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고,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그리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는 제자공동체가 그 비전을 잘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이고 외적인 환경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하는 기도제목들이다.


  두 번째 본문인 사도행전 본문들은 ‘오순절 초대교회’ 모습에서 어떤 공동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믿는 무리”의 공동체였다. 둘째, 초대교회 공동체의 영적지도자들인 사도들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영적 능력(“기사와 표적”(2:43)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신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셋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함께 교제, 성만찬 및 공동식사, 기도에 참여했다. 넷째, 초대교회 공동체는 공동소유와 나눔을 실천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 4:32-35 참고). 성경적 공동체는 위에서 살펴본 두 개의 본문 외에도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제자공동체의 대표적인 특징은 위에서 열거한 항목들 안에 잘 담겨져 있다.


영성고전에서 공동체 배우기

  교회의 역사는 성경적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가깝게 실현한 공동체는 12세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1181-1226)가 이탈리아에서 세운 탁발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난 영성을 가장 잘 따른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프란치스코는 마태복음 10:1-15의 제자공동체를 본뜬 탁발수도회의 설립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3-5세기 사막의 수도공동체와, 그 영향을 받아 설립된 6세기 유럽의 정주수도회 베네딕트 수도회들을 비롯해서, 한참 후인 근대에 설립된 메노나이트(Mennonite) 공동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우리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한국을 포함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지역교회들 가운데에도 나타났을 것이다.


  영성고전 가운데 공동체를 잘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책으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의 《베네딕트 규칙서》[각주:1]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1906-1945)의 《신도의 공동생활》[각주:2]을 들 수 있다. 《규칙서》는 서방교회 대부분의 정주수도회가 사용하는 규칙서가 되었고, 다른 수도회 및 공동체의 규칙서에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 독일 고백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본회퍼가 쓴 《공동생활》은 현대 개신교 교회의 교회론 연구 및 공동체 운동에서 필독서가 되었다. 이 두 권의 영성고전이 천착하는 제자 공동체의 특징들 가운데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참고할만한 내용들을 요약해 보자.



공동생활이 왜 필요한가?

 

첫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왜 공동생활이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는 수도원에 입회한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을 모은 책이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학교(schola)”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수도자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그리고 단번에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진정한 왕이신 주님 그리스도를 위한 전투에 임하기 위해 순종이라는 강하고 빛나는 무기로 무장”한 사람이다. 《규칙서》에 나오는 규정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룩한 순종이라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영성 훈련들이다. 베네딕트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그 훈련장으로서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순종은 《규칙서》 총 73장의 내용 중 가장 앞부분인 다섯 번째 장에 배치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에 의해 순종이 남용될 가능성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2장 수도원장의 자질”에서 수도원장에게 다음과 같은 자세를 특별히 주문한다. “수도원장은 결코 주님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거나, 결정하거나, 명령해서는 안 된다.” 수도원장은 “제자들에게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들을 말보다는 행실로 보여주어야 한다.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제자들에게는 말로써 주님의 명령을 알려주고, 고집스럽거나 어리석은 제자들에게는 삶의 모범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또 “수도원장은 수도원에서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베네딕트는 “제3장 조언을 얻기 위한 형제들의 소집”에서 수도원장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반드시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을 소집해서 그 사안에 대해 설명한 후에, 형제들의 조언을 듣고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순종을 요청하는 수도원장과 순종해야 하는 형제들 사이에는 이처럼 상호 책임과 상호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칙서》는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로서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지역교회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 제자공동체인가? 이 질문들이 경감식을 일깨운다고 느끼는 목회자들에게, 《규칙서》는 순종을 배우고 훈련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지침들을 많이 담고 있다.


 

다음으로, 본회퍼의 《공동생활》은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믿는 무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보이게 모일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이 은총에 참예하는 것은 아닙니다.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홀로 서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사귐(fellowship/koinonia)이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서 히틀러를 주님처럼 섬기고 협력하는 교회들을 잘못되었다고 용기 있게 비판하는 고백교회를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핑켄발데(Finkenwalde)라는 시골에 세워진 한 신학교에서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3년여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공동생활》을 기록하였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사귐을 갖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대표적인 경험이었다. 공동생활처럼 기쁘고 은혜로운 것은 없다. 본회퍼의 핑켄발데 신학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시편 133:1의 말씀을 경험하는 현장이었다. “보라, 형제끼리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고!”(공동번역). 또한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공동생활은 자연인의 사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영의 사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자연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마는, 영적인 사랑은 그리스도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사귐은 반드시 나와 남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연적 욕망이 어느 틈에 스며들어와 기독교인의 사귐에서 “영의 힘을 박탈하고 교회에서 활동력을 거세해 버림으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 본회퍼는 공동생활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그리스도를 통과한 사귐만이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동생활》은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예배와 교제를 포함한 공동체 만남의 기회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자연적인 욕구에 기초해서 서로를 직접 만나려고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사이에 둔 만남을 지향하고 있는가? 



공동체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영성 훈련들

  둘째, 규칙서와 공동생활은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영성 훈련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규칙서》가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규칙서는 형제들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원칙들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제8장에서 제20장까지는 “성무일도”와 관련된 규정들을 다룬다. 성무일도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다. 시편 119:164,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하루 일곱 번씩 기도했다. 새벽기도(Lauds), 제1시(Prime), 제3시(Terce), 제6시(Sext), 제9시(None), 저녁기도(Vespers), 그리고 마지막 기도(Compline). 그리고 새벽 2시 또는 3시 이후에 일어나서 드리는 야간기도(Vigils)까지 합하면 하루 여덟 번의 기도를 드렸다. 기도 시간에는 다수의 시편을 암송하고 성경을 봉독했으며 중간 중간에 찬송을 부르고 다른 기도문들도 사용했다. 제48장은 육체노동 및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위해 배정된 시간과 방법을 안내한다. 규칙서  따르면 형제들의 일상은 계절에 따라 시간 분량이 다르긴 하지만 크게 여덟 번에 걸친 기도, 여섯 시간 가량의 노동, 그리고 두 시간 이상의 독서로 이루어져있었다. 규칙서에 나오는 일상생활 규칙들은 일차적으로 6세기에 봉쇄 수도원에서 정주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일상 속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준수할 영성 생활 규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메조리 톰슨(Marjorie J. Thompson)이 《영성훈련의 이론과 실천(Soul Feast)》에서 영성 생활 규칙을 리듬으로 이해한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자라가는 데 필요한 영성 훈련들을 시간과 결부시켜서 리듬화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본회퍼가 《공동생활》에서 제안하는 영성 훈련들을 살펴보자. 그는 영성 훈련들은 다음과 같은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1)공동생활 훈련, (2)개인적인 훈련, (3)섬김의 훈련, 그리고 (4)죄의 고백과 성만찬. 제2장 “남과 함께 사는 하루”라는 제목 아래에 제시된 공동생활 훈련에는 아침 경건회, 식탁 교제, 노동, 정오기도, 그리고 저녁기도가 있다. 특히 아침 경건회 또는 아침 예배의 구성 요소들인 시편 기도, 성서 읽기, 찬양, 그리고 공동 기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제3장 “홀로 있는 날”에서 제시된 개인적인 훈련에는 고독과 침묵, 묵상, 그리고 중보기도가 있다. 제4장 “섬김”에서는 혀를 다스리기, 자기를 낮추기, 경청, 적극적으로 돕기, 서로 참고 용납하기,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기, 그리고 참다운 권위의 근거는 섬김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등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제5장 “죄의 고백과 성만찬”은 죄고백의 중요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죄의 고백이 어떻게 성만찬을 준비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본회퍼의 영성 훈련은 20세기 초반에 그가 실천한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더욱 우리 시대에 가정과 교회, 그리고 신학교 공동체에 적용하기가 용이하다. 특히 한국 교회 목회 현장에 도전이 되는 부분은 시편 기도, 침묵, 경청, 죄의 고백과 성만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성경과 영성고전에 나타난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마다 우리는 대단한 도전을 받는다. 철저하게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소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동체의 모습은 인간의 노력으로 설립한 공동체들 안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따르는 무리들 안에서만 가능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본회퍼의 《공동생활》을 자주 읽고 목회자 자신과 목회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교회에 공동체의 본질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글쓴이 : 이강학.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co.kr) 대표연구원이며, 횃불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영적 분별의 길》이 있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4월 호에 실린 네 번째 글입니다.



  1.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김재현 역 (서울: KIATS, 2011). 이하 《규칙서》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2. 이하 인용은 다음의 번역서를 사용하였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이하 《공동생활》,이라고 표기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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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문자에 죽어가는 설교자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5.03.04 06:46

하느님의 문자(성서)의 정신을 따르기 원치 않고 말마디만을 배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를 열망하는 수도자들은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의 글, 영적 권고 7(분도출판사, 2004), 39.

 

점점 설교하기가 버겁습니다.
회중석보다 딱 세 칸 위에 있는 설교단이
왜 그리 높아 보이는지요?

말을 잘 하려니 말이 두려워집니다. 
말씀의 잔치가 아니라 말 잔치로 끝나니 괴롭습니다.
말(문자)에 치여 죽어가는 설교자들이 애처롭습니다.

말씀의 정신을 따르지 않으니 정신 나간 말들이 쏟아집니다.
한 마디를 해도 정신을 살리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말 잔치는 파하고, 이제 말씀의 잔치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정신 차린 삶이 앞서고, 말은 한 발치만 뒤로 물러가면 바랄게 없겠습니다.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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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다 달팽이

빛이시기에 사랑이시기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4.07.12 14:57

주님, 당신은 빛이시기에

당신을 알아보도록 그들을 비추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도록 그들을 불태우시나이다.


- “주님의 기도 묵상”, 《아씨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글》, (서울: 프란치스코 출판사, 2014), 83.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주님의 기도를 잘 이해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하였다. 위에 인용한 것은 프란치스코의 주님의 기도 묵상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묵상 글 중 일부인데 우리는 묵상 글 역시 그 자체로 기도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빛이신 주님이 빛을 비춰주시면 우리에게 주님을 아는 지식이 생긴다. 사랑이신 주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불태우시면 우리는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주님을 아는 지식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구하는 영적 갈망이 잘 느껴지는 기도문이다. 태양이 우리에게 빛과 함께 열을 전달해주듯이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 안에 지식과 사랑을 전달해주신다.


지식과 사랑은 우리가 한 영적 경험이 균형 잡힌 것인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오늘도 다음의 질문으로 나의 삶을 성찰해 본다. 주님께서 오늘 나를 지식과 사랑 안에서 어떻게 만나주셨는가? 공부는 많이 했어도 내 안에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실천했지만 올바른 지식이 없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간 것은 아닐까? / 이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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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우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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