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가 지닌 다양성 내의 통일성 (닛사의 그레고리)

성부 없이 성자를 생각할 수 없고, 성자로부터 성령을 나눌 수도 없다. 세 위격 사이에는 인간의 말이나 이해를 초월하는 공유(sharing)와 구분(differentiation)이 있다. 위격들 사이의 구분은 본질의 하나니됨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공유하는 본질의 통일성 때문에 각 위격들의 특성들이 혼동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신성은 통일된 것인 동시에 분화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통일성 내의 다양성과 다양성 내의 통일성이라는 이 기이하고 역설적인 것을 수수께끼를 사용하여 직시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c.335-395), On the Difference between Essence and Hypostasis 

그레고리는 삼위일체의 교리가 역설적이며 언어와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그것을 넌지시 암시할 수는 있지만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의 추리력은 하나님 주신 은사이며,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사용해야 하지만, 그것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접근함에 있어서, 논증이나 분석이 말 없는 기도에 양보해야 하는 지점에 이른다. “모든 유한한 육체여, 잠잠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서라”(The Liturgy of St, James).  (칼리스토스 웨어, 《정교회의 길》,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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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결새김

선을 선택할 힘이 없다고 여길때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한 줄 묵상 2015.03.03 06:50

악이 매우 강해서 우리가 선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연약하다고 느낄 때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가능한 한 빨리 위대한 신비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 그 싸움터에서 도망쳐야만 한다. 

-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c.335-395), 《모세의 생애》.


악을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악에게 지게 되는 연약함의 순간들이 있다. 선은 커녕 악을 선택하지 않는 것마저도 힘겨운 때가 있다. 악인가 선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름 자체가 싫어지는 때가 있다. 그런 순간 악을 이겨내고 선을 선택하려고 하다가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이겨내고 선을 선택한다고 하는 데,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다. 

그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은 악을 선택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도망쳐 신비이신 하나님을 향해 달리는 것이다. 인생에서 시간적으로 촌각을 다투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마음의 불편과 조급을 견디다 못해 이 정도쯤은 해결하겠지하는 마음으로 선택하고 더 괴로워지게 된다. 하나님의 부름을 따를 힘이 없거나 그것을 발견할 수 없거나 발견하기도 싫을 때 신비이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야한다. 신비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금 선을 향한 부름에 응답할  내적 준비가 이루어진다.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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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정한 열망

하나님께 전달되는 목소리 (닛사의 그레고리)

한 줄 묵상 2014.09.27 00:36

만약 지도자가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없는 자라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에만 관심을 두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은밀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기를 내도록 권유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전달되는 목소리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순수한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묵상을 통해서 나온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St. Gregorius Nyssenus, 335-395), 고진옥 옮김, 《모세의 생애》, (은성출판사, 2003), 111.


설교를 위해 강단에 올라가기 전 습관마다 행하는 일이 있다.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다. 넥타이는 잘 매어져 있는지, 머리는 잘 빗기어져 있는지, 강대상에서 성도님들을 만나기 전에 마지막 점검을 하는 것이다그리고 그 날의 본문에 맞추어서 설교를 한다.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기도 한다. 기도하라고, 말씀 좀 읽으라고…. 마치 어렸을 적 어머님께 들었던 잔소리를 하는 것 같다. 소리치는 사이로 슬며시 나 자신을 숨긴다. 그러고선 내가 드러나지 않고 말씀만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닛사의 그레고리 때도 나 같은 설교가, 나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나보다. 모세의 생애를 읽다가 이 구절에서 뜨끔했다. 지도자가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없는 자라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난 거울은 바라보고 성도들에게 목소리는 높이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백성들을 권면했는가? 모세는 백성 앞에서 온유했고, 하나님 앞에선 간절했다. 절규했다점점 더 하나님 앞에선 조용하고 성도들 앞에서 시끄러워지는 나를 볼 때마다 때가 묻는 것 같다. 그래. 하나님께 전달되는 목소리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순수한 양심에서 나오는 묵상을 통해서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소리를 드리려 조용히 성경책을 편다. / 소리벼리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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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멈출 수 없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한 줄 묵상 2014.06.27 04:47

하나님을 보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욕구를 결코 만족시키거나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성장 과정에서 그 과정을 멈출 수 있는 한계란 없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of Nyssenus, c.335-395), 《모세의 생애》, II 239.


우리 교회에는 다섯 분의 아주 은혜로우신 권사님들이 계시다. 그런데 그 분들이 하나님을 경험한, 혹은 회심한 경로는 각각 너무나도 다르다. 그래서 어떤 이는 통성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한 것 같지 않다고 하고, 어떤 이는 소리 질러 기도하면 하나님이 귀가 먹었냐고 하신다. 찬양을 하실 때도 그 분들이 좋아하는 특정한 곡을 하지 않으시면 금방 요청을 하신다. 그 분들에게 가장 은혜로운 예배는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 어느 순간의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다. 첫 사랑, 첫 은혜의 경험은 그 분들에게 그토록 강렬하다. 

 

그렇지만 난 또 그 분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또 다른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그 분들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을 경험하기를 기도한다. 그 분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성장과정은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소리벼리/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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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하나님을 보는 삶이란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한 줄 묵상 2014.04.23 17:39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를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갈망 안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Nyssenus, c.335-395), 《모세의 생애》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는 것, 기도하고 싶고 그런 갈망이 가득해지는 것은 영적으로 긍정적인 신호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더 시간을 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한다는 사실만이 경건의 증거로 오해되기도 한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만족이 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놓치게 된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은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는 지를 등 뒤에서 계속 보며 따라가는 삶이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보는 데 나의 시간과 삶의 지향을 끊임없이 헌신하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삶이다.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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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정한 열망

삶의 파고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한 줄 묵상 2013.08.23 05:27

분별력과 선견지명이 있는 부모는 그들의 사랑하는 아이를 인생의 큰 파고에 내어 놓을 때, 그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방주에다가 안전하게 둔다(출 2:3). 각양각색의 나무판들로 짜여진 그 방주는 서로 다른 다양한 교육을 뜻하는데, 이것은 삶이란 파도 위를 떠다니게끔 붙들어 준다.   


-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395) , 《모세의 생애》, 2권 7.


온실의 화초는 사계절이 없다. 

제한되고 짜여진 환경을 맛볼 뿐이다.

겉으로 매끈해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손에 쥐어 보면 줄기가 허약하고 향내가 빈약하다.


산전수전, 

야생화를 보라.

비바람을 견딘 인고가 묻어있다. 

각양각색 벌과 나비들을 환대했던 온화함, 넉넉함이 스며있다. 

줄기는 단단하고 코를 쏘는 향내가 몸을 둘렀다.


가시를 세워 다가오는 삶이란 거친 파도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줄 신앙은 무엇으로 엮여질까? 


기쁨, 슬픔, 걱정, 희망, 안전, 외로움

다양한 얼굴로 다가오는 삶의 조각들을

마음을 열어 환영해 보자.

내가 싫고 힘들어 하는 것들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 달라고 소리칠 일 아니다.

대신 양식으로 삼아보자.


이제 이틀 후면

19년간 함께 있었던 큰 딸이 기숙사로 떠나간다.

처음 집을 떠나 생소한 환경을 잘 견뎌낼까?


이 아이가 삶의 파고를 즐길만한

교육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도록 두 손을 모은다. 


/ 임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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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처럼

어둠 속에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한 줄 묵상 2012.12.19 16:09
  •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지혜와 감각으로는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셔서 어둠을 견디게 하시니 감사하네요.

    BlogIcon 바람연필 2012.12.20 02:50 신고
모세가 어둠 속으로 들어간 연후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첫번 째 나타나심과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빛 가운데 보이셨던 하나님이 그러나 지금은 어둠 가운데서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크고 더 철저한 근면을 통하여 영혼이 전진하다가 보면 그 실체를 알게 되는데, 즉 그 영혼이 관상(contemplation)[각주:1]에 거의 다다르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온전히 인식될 수 없는(uncontemplated) 분임을 더욱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of Nyssenus, 335-395), 모세의 생애 (The Life of Moses) book 2.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우리가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분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도 이런 하나님일까? 


종종 눈을 떠 하루를 맞이하는 일이 두려우리 만큼 지금의 견디기 힘든 고통 앞에 Why me?를 외쳐 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속시원한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나의 영적 싸움은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함 이라기 보다는 이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지금 붙들고 있는 셈이다.


손을 살짝 잡아주는 딸 아이를 통해 피곤에 지친 나를 감싸주는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하는 친구에게"라는 이메일 속에 담긴 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와 가슴이 울컥하기도 한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따뜻한 시선과 다가가서 함께 하여 주실 때, 어느 순간 내가 삭개오가 되어 감사와 감격이 복받쳐 오른다. 


시인이 이렇게 노래를 한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34).



완전히 알아챌 수 없는 하나님을 이 고통의 와중에 왜 붙들고 있는걸까?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다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손을 덮석 잡고 길을 나서고 있다. 내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 그 속살을 조금씩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이 여정을 불안함으로 이끌기 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씨앗으로 자리잡고 있다.   / 오래된 오늘



  1. 여기서 쓰인 "관상"이란 말은 "영적 인식"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 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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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래된 오늘

구름, 영성 생활의 인도자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을 때도
    그 안개가 실은
    하나님의 임재 구름이라고 믿고 걸아가야겠습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11.14 07:08 신고


"어떤 이가 이집트에서 달아나 국경선을 벗어났는데, 유혹의 공격을 받아 겁에 질리게 되면, 그 때마다 인도자는 높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원수가 그를 추격하여 군대로 포위할 때마다 인도자는 바다를 변화시켜서 그가 건널 수 있도록 만든다.

 

이렇게 바다를 건널 때에 구름이 인도자로 섬겼다. 우리보다 앞선 이들은 구름을 성령의 은혜로 바르게 해석하였다. 성령은 합당한 이들을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Good)께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성령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 물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왜냐하면 그 인도자가 그를 위해 물 사이로 길을 내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 그는 '자유'로 안전하게 인도되어지며, 그를 속박하기 위해서 추격하던 이는 물속에서 파멸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c.335-395), The Life of Moses, bk. 2, ch.120-121. 



※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모세의 생애를 (1)빛에서 출발하여 (2)구름을 지나 (3)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적 여정으로 해석하였다. 위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죄된 삶(이집트)을 떠난 이후에 유혹(이집트군의 추격)을 받아 다시 죄의 속박에 빠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구름'을 통하여 바다를 건너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에서 구름(영적 황량함, 건조함, 침체 또는 불명확함 등)은 물리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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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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