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귀고 2세에게 배우는,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영성 목회’

6. 귀고(Guigo) 2세에게 배우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통한 ‘영성 목회’



한국교회 안에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이제 그리 생경한 단어가 아니다. 라틴어 '렉시오(lectio)'는 ‘모으다’, ‘필요한 것을 선택하다’, ‘눈으로 모아들이다’라는 뜻의 'legere'에서 온 명사형으로, ‘기록된 본문을 눈으로 훑어보아 마음에 모으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렉시오 디비나는 ‘거룩한 말씀을 눈으로 훑어 마음에 모으는 영적훈련’이다. 그러나 아직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렉시오 디비나를 QT(경건시간)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여 교회 내 대안적 프로그램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고대 사막의 수도자들에 의해 시작되어 12세기 카르투시오 수도회에서 윤곽을 갖게 된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아, 고전에서 주는 풍성한 깊이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렉시오 디비나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귀고(Guigo) 2세의 책, 《수도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Monks)를 근거로, 수도자들이 어떻게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Union with God)를 추구했는지를 살펴 볼 것이고, 이러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하나님 경험이 어떻게 목회 현장에 새로운 힘을 넣어줄 수 있는지 다루고자 한다. 


귀고(Guigo) 2세의 《수도승의 사다리》

엄밀히 말하면, 렉시오 디비나는 12세기 귀고(Guigo) 2세의 것도, 6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것도, 사막의 구도자들의 것도 아닌 하나님의 것이다. 일찌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렉시오 디비나의 형태를 받아들인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고백하면서 말씀으로 삶을 조명 받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성경읽기, 즉 머리로만 분석하고 지적 만족을 주는 접근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이 곳에서’ ‘내 것으로’ 삼는 ‘전유화’(appropriation)를 의미하는 '렉시오 디비나'라는 단어는 서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네딕트 (Benedict of Nursia, 480-547)가 처음 사용하였다. 베네딕트는 그의 책 《베네딕트 규칙서》 48장에서,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영성 깊은 독서(lectio divina)뿐만 아니라 육체 노동을 위한 구체적인 시간을 배정해야 한다.”[각주:1]라고 말하며, 'lectio divina'라는 단어를 처음 소개하였다.

그 후 아직 뚜렷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던 렉시오 디비나는 카르투시오회(Carthusian Order)의 귀고 2세에 의해 전형화된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귀고 2세의 생애에 대해 뚜렷히 알려진 바는 없다. 프랑스 그르노블 근처에서 1084년 창설된 카르투시오회의 초기 회원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 1173년 공동체의 책임자의 자리에 있다가 제 9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1180년 이 소임을 끝낸 후, 1188년 소천했다는 것 정도가 그에 관해 알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렉시오 디비나의 전체적인 윤곽이 그의 책 《수도승의 사다리》에 잘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귀고 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에서, 구도자들이 마치 사다리의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듯,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를 향해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에 대해 네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 이 네 단계를 자세히 뜯어보자. 그가 말하는 렉시오 디비나는 무엇인가?

먼저, 독서(lectio)는 치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것인데 특히 자신의 에너지를 성경에 집중하는 것이다. 음식 먹는 것에 비유하자면, 이 단계는 음식을 입에 넣는 단계이다. 귀고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을 치밀하게 이해하기를 소망하면서, (이 독서의 단계에서는) 영혼이 달콤한 포도송이를 한 입 베어 물고 씹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마치 포도를 포도즙 짜개에 넣듯이 말이다. 이제 이 독서의 단계에서 (잠자고 있는) 지성의 모든 힘을 불러 일깨운다.”[각주:2] 이 단계는 렉시오 디비나의 첫 번째 단계로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그러나 집중해서 성경을 읽는(lectio) 단계이다. 

두 번째로 묵상(meditatio)은 말씀 안에 숨겨진 진리를 찾기 위해 이성의 도움을 받아 행해지는 적극적인 단계이다. 귀고는 이 단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묵상을 치밀하게 할 경우, 묵상은 영혼 밖에만 머물지 않고, 덜 중요한 것에 묶여있지 않고, 오히려 이 묵상으로 인해 내 영혼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며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철저히 내 마음을 식별하게 된다.”[각주:3]

성서를 통해 영성을 고취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을 마련한 샌드라 쉬나이더스(Sandra Schneiders)에 의하면, 이 묵상의 단계는 성경 본문을 내면화하는 단계로써 그것의 의미를 반추하거나 말그대로 묵상하는 단계라고 소개한다. 더 나아가 쉬나이더스는 중세 성서 주석들은 영적 깊이나 풍부한 상상의 폭(넓이)을 가지면서 이 묵상의 단계에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단계는 성경 본문의 연구를 넘어서 독자가 자신만의 상황(삶과 경험)속에서 본문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각주:4]

세 번째로 기도(oratio)는 묵상에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서, 독자가 성경 본문 안에서, 혹은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귀고는 이 단계에서 우리의 영혼은 우리 스스로 지성과 감성의 감미로움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겸손하게 그리고 철저히 기도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렉시오 디비나는 이 기도의 단계를 통해 절정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 주님, 당신이 성경의 양식을 쪼개주셔야만, 당신이 그 속에서 당신 자신을 내게 보여주십니다. 그 때, 내가 더 당신을 보기 원할수록, 더욱 내가 당신을 보기를 사모할수록, 당신은 내게 성경의 글이 아닌, 그 껍데기의 의미가 아닌, 글 안에 숨겨있는 의미로, 그 깊은 말씀 안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각주:5]

마지막으로 관상(contemplatio)은 온 마음과 뜻이 하나님께 올려져서 그분에게 잠겨있게 되어 영원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앞의 단계의 깊이있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도하고 그것이 바로 영적 삶의 꼭짓점이자 본질의 영역인 관상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말씀을 연구하는 식의 시도, 즉 무엇인가는 알아가는 모든 시도를 내려놓고 독서와 묵상과 기도의 단계에서 만난 하나님과의 일치를 누리는 단계이다. 귀고는 이 관상의 단계에서 하나님은, 

“아주 달콤하고 감미로운 하늘의 이슬을 흩뿌려주시고, 가장 고귀한 향수로 기름부어주시고, 지치고 지리한 영혼을 회복시켜주시고, 갈급한 심령을 만족시켜주시고, 배고픈 영혼을 먹여주시고, 이 땅의 모든 염려를 잊게하시고,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다.”[각주:6]고 설명하고 있다. 쉬나이더스 역시 이 관상의 단계를 “완전히 만개한 꽃으로서, 어떤 그림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단계”[각주:7]라고 설명한다.   

또한 귀고는 이 네 단계는 분리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로의 연관성을 설명하고 있다.

“독서(lectio)는 이 모든 단계의 기본이며, 묵상을 위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묵상(meditatio)은 찾아야 할 것을 더 주의 깊게 고려하면서 숨겨진 보물들을 파내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 보물을 꺼내는 것은 묵상의 힘으로는 안 되며 이것은 기도의 힘이다. 기도(oratio)는 전심으로 기도 자체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이 보물을 간구하는 것인데, 이 보물은 바로 관상의 감미로움(The sweetness of contemplation)이다. 관상(contemplatio)은 이전 세 단계의 상급으로, 하늘의 감미로움으로 갈망하는 영혼을 촉촉이 적시는 것이다.”[각주:8]

이렇게 귀고 2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렉시오 디비나를 사다리의 이미지로 전형화해서, 각각의 단계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지 보여주었으며, 많은 구도자들을 말씀으로 초대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다.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영성목회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 귀고 2세의 렉시오 디비나를 목회 현장에 적용할 것인가? 성경의 권위가 강한 한국의 개신교는 19, 20세기 유럽과 미국의 대부흥을 거치면서 검증된 다양한 성경 프로그램을 가지고있다. 그 중에 ‘QT’는 제자훈련의 입문단계로 인식되어 개 교회의 성경공부반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귀납법적 성경연구’식 프로그램은 좀더 지적 접근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갈급함을 해결해주고 있다. 이 얼마나 소중하고 풍성한 영적 유산이란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훈련을 받아도 왜 우리는 변하지 않는가! 이 거대한 담론을 제한된 지면에 소개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할 수 없다. 단, 성경의 절대성이 강한 개신교가 이제까지 수많은 성경 프로그램을 해왔지만 삶에 깊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면, 지금까지의 접근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아닐까?

렉시오 디비나 소개는 이 지점에 방점을 찍고 한국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성경을 읽되 본문이 주는 의미보다는 독자의 삶의 정황에 더 큰 관심을 갖는 QT식 성경읽기가 아닌, 혹은 성경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삶에 적용하기 보다 본문 자체를 알아가는 정보적 관심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귀납법적 성경연구식 성경 읽기가 아닌, 본문을 철저히 읽고, 묵상하고, 기도로 올려드리며, 기도 중에 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해서 그 말씀이 철저히 삶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렉시오 디비나는 영성 목회에 중요한 시작이라 하겠다. 

이렇게 성경을 기반으로 한 영성을 추구하는, 앞서 이미 언급한, 샌드라 쉬나이더스는 우리에게 좀 더 많은 들을거리를 제공한다. 쉬나이더스는 어떻게 크리스찬이 성경을 통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쉬나이더스는 성경의 역사적, 문학적 방법을 통해 얻은 정보들은 변화를 가져오기가 힘들고 오히려 성경 안으로 들어가서 성경의 세계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독자가 그 말씀 안에 자신을 완전히 열었을 때,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하고 그 때, 비로소 변화를 경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각주:9] 즉, 쉬나이더스 역시 귀고처럼 정보적(informative) 접근이 아닌 변화적(transformative) 접근으로 성경을 경험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성서읽기는 백화점식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머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렉시오 디비나는 정보 생산에 헐떡이던 모더니즘적 접근에 매여있는 한국교회에 큰 방향을 바꿀 영성 목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할례된 성도와 다음 세대는 더 이상 지식을 더하는 제자훈련식 프로그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은 ‘변화’에 있다. 내가 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변하느냐? 이런 도전적 토양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영성 목회는 우리의 신앙 체질을 바꿀 수 있는 건강한 시도가 될 것이다. 말씀 안에 자신을 완전히 열어(lectio, meditatio), 말씀의 세계 안에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oratio), 그분 안에서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을 경험하는 것(contemplatio) 그래서 옛 삶을 벗고 새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영성의 진수라 하겠다. 


글쓴이 : 이경희.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새크라멘토 시온장로교회 목사, GTU 기독교 영성학 Ph.D Candidate.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6월 호에 실린 여섯 번째 글입니다.


  1.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지음, 권혁일·김재현 옮김, 《베네딕트의 규칙서》(KIATS, 2011), 91. [본문으로]
  2. Guigo II, Ladder of Monks and Twelve Meditations, trans. Edmund Colledge, O.S.A. and James Walsh, S.J, (Kalamazoo, MI: Cistercian Publication, 1981), 69. [본문으로]
  3. Ibid., 70. [본문으로]
  4. Sandra Schneiders, “Biblical Spirituality,” Interpretation 56, no. 2 (April 1, 2002): 140. [본문으로]
  5. 주: Guigo II, Ladder of Monks and Twelve Meditations, 73. [본문으로]
  6. Ibid., 74. [본문으로]
  7. Schneiders, “Biblical Spirituality”: 140. [본문으로]
  8. Guigo II, Ladder of Monks and Twelve Meditations, 79. [본문으로]
  9. Schneiders, “Biblical Spirituality”: 1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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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의 ‘기도’ (귀고 2세)

한 줄 묵상 2015.05.17 09:47

오 주님, 주님이 성경의 양식을 쪼개 주실 때, 그 말씀에서 주님 자신을 제게 보여주십니다. 그 때 제가 주님 보기를 더 원할수록, 주님을 보기를 더욱 사모할수록, 주님은 제게 성경의 글이 아닌, 그 껍데기의 의미가 아닌, 글 안에 숨겨있는 의미로, 그 깊은 말씀 안으로 저를 인도하십니다.


- Guigo II(?-1188), Ladder of Monks and Twelve Meditations, trans. Edmund Colledge and James Walsh (Kalamazoo, MI: Cistercian Publication, 1981), 69.


귀고 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에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읽기(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Contemplatio) 네 단계로 정형화해서 알려 준다. 그 중 어느 단계라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기도(Oratio)의 시간은 읽기를 통해 얻은 정보적 앎이, ‘묵상의 단계를 통해 뿌리내리고, ‘관상’의 단계에서 꽃피기 위해, 꼭 거쳐야하는 숙성의 시간이다.


기도의 시간은 성서의 문자가 정보를 감싸고 있는 포장지가 아니라 나의 숨은 존재를 깨워주는 생명임을 더 간절히 알아가게 한다. 기도의 시간은 나를 하나님과 관상의 세계 속으로 이끌어, 하나님과 나의 구분이 없는 연합의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 그 속에서 나의 지리하고 곤한 영혼은 새 의미 앞으로 나아가며, 척박한 영혼은 하늘에서 흩뿌려 주시는 잔잔한 은혜를 맛보게 된다.


오라티오! 

"주님, 앎을 바꾸어, 주님과 만남의 경험을 통해, 변화로 나아가게 하소서!"/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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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영성 훈련의 병증 (귀고 2세의 <수도승의 사다리>)

한 줄 묵상 2014.09.12 12:19
  • 대부분의 영성훈련이 일회성의 깨달음으로 그치기 때문에 아쉽지요~^
    지속하는 것이 중요한데~~

    BlogIcon 이기연 2014.09.12 18:31 신고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습니다. 정성들인 기도는 관상을 얻게 해주며, 기도 없는 관상의 선물은 드물고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귀고 2세(Guigo II: ?-1188), <관상 생활에 대해 쓴 편지>, 

엔조 비앙키 지음, 이연학 옮김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왜관: 분도, 2010), 154-55에서.



귀고 2세는 12세기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원장을 지낸 분이다. 카르투지오 수도회는 베네딕트 규칙서를 엄격하게 지키기 위해 11세기에 설립된 수도회이다. 몇 년 전 개봉되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는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은 이 수도회의 일상을 다룬 것이다. 봉쇄 수도원의 깊은 침묵이 분주한 현대인들의 영적 갈망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


귀고 2세가 쓴 <관상 생활에 대해 쓴 편지(The Letter on the Contemplative Life)>는 우리에게 <수도승의 사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조 큐티(QT)라고 할 수 있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유명한 영성 고전이다. 귀고 2세는 렉시오 디비나를 네 단계, 즉 독서, 묵상, 기도, 관상으로 설명한다. 렉시오 디비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각각의 단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각각의 단계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독서와 묵상이, 묵상과 기도가, 그리고 기도와 관상이 어떻게 체험적으로 흘러가는지를 알면 영성 생활에서 어느 한 요소도 소외되지 않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빨리빨리 읽기만 하고 묵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은 읽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묵상은 하지 않고 기도부터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묵상만 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기도를 마음을 다해 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해치우듯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기도의 체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관상의 경험을 자신의 영적 경험에서 아예 배제시켜버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영성 생활에서 이런 병증을 습관화시킨 사람들은 기도에 결코 맛들일 수 없다. 성경을 읽다가 기도로 흘러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훈련의 기본이다. 위에 인용한 귀고 2세의 말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영성 훈련에 병증은 없는지 다시 돌아보게 해준다. / 이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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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과 윌리엄 쉐넌 (4) : '파라다이스 여행'과 '내적 체험'

2014년 8월의 추천 도서


토마스 머튼 윌리엄 쉐넌 (4)

'파라다이스 여행' '내적 체험'




* '토마스 머튼과 윌리엄 쉐넌' 시리즈

   (1) 고요한 등불(Silent Lamp)  http://spirituality.co.kr/258

   (2) 토머스 머튼: 생애와 작품(Someting of a Reble) http://spirituality.co.kr/282

   (3) 머튼 백과사전 (The Thomas Merton Encyclopedia) 외 http://spirituality.co.kr/288

   (4) 파라다이스 여행과 내적 체험 (Paradise Journey & Inner Experience) 


이 달은 <토마스 머튼과 윌리엄 쉐넌>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내적 체험과 이 책에 대한 해설이 담긴 윌리엄 쉐넌(William H. Shannon, 1917-2012)의 토마스 머튼의 파라다이스 여행를 소개합니다. 



1. 내적 체험 (The Inner Experience: Notes on Contemplation. Maryknoll, NY: HarperOne, 2003.)

 

    관상(contemplation)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머튼이 수도 생활 초기부터 가져왔던, 그리고 글과 강연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대답해 왔던 중요한 질문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질문을 다루고 있는 그의 첫 번째 작품은 《관상이란 무엇인가What is Contemplation?》(1948)라는 책이고, 마지막 작품은 이 책을 개정한 《내적 체험》(1968)입니다.[각주:1] 사실 전작의 개정판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 내용과 분량에 있어서 관상에 대한 머튼의 성숙한 사상 이 《내적 체험》에 담겨져 있습니다. 머튼은 이 책에서 이전보다 넓은 관점에서 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그동안 동양 종교를 연구하거나 현대 과학기술 사회에 대해 숙고하며 얻은 통찰들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머튼은 선불교의 사토리(satori)를 언급하며 자연 질서 안에서 거의 "임상적으로 완벽한" 내적 자아 실현의 예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토리는 "영혼의 내핵이 폭발하듯 열려서 가장 깊은 자아를 드러내는 영적 깨달음"이라고 이해합니다(7). 그에 비해서 기독교의 신비 체험은 "내적 자아를 인식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초자연적인 믿음의 강화에 의해서 우리의 내적 자아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12). 다시 말해 기독교적 관상은 내적 자아의 깨어남을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을 넘어서 말입니다(42).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향유도, 즐거움도, 행복도, 평화도 아닙니다. 그것은 최상의 사랑 그리고 해방된 영적 사랑의 활동 안에서 진리와 실재를 초월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만족이나 안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깨달음과 생명과 창조성과 자유입니다. 사실 관상은 사람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영적 활동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신의 아들됨을 가장 창의적으로 그리고 역동적으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 그것은 사람이 그의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 아들(the Son)이 그의 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깨어나는 것이며, 우리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나' 안에 있는 진리(the Truth)와 신적 자유(the Divine Freedom)의 승리입니다. 그 가장 깊은 '나' 안에서 아버지가 아들과 하나가 되십니다. 믿는 자에게 주신 성령 안에서 말입니다. (34)


    또한 흥미롭게도 머튼은 TV시청자와 관상가를 비교하며, 신비한 매력에 끌려 수동적인 상태에 이르는 것은 서로 닮았지만, 사실은 무비판적으로 TV에 흡수되는 시청자의 모습은 욕망과의 치열한 싸움 뒤에 수동적인 연합(또는 infused contemplation)에 이르는 관상가의 삶의 정반대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참된 관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과 감정과 의지를 물질적 또는 일시적 수준에 묶어 두는 모든 것들과 아주 활발하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투쟁해야 합니다. 관상의 삶보다 활동적이고 강력한 형성(formation)을 요구하는 삶은 없습니다. 관상의 삶보다 외부적 요소들에 대한 의존에서 가차 없이 벗어나기를 강하게 요구하는 삶은 없습니다(126-27). 머튼에 의하면 관상은 삶의 일부가 아닙니다. 관상은 삶을 하나로 묶고 통합하게 합니다. "관상의 삶은 단순히 인간적 기술과 훈련이 아니라 우리 가장 깊은 영혼에 계시는 성령의 삶입니다"(45). 


      사실 이 책은 머튼이 출판을 보류해 놓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타계하였기 때문에,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2003년에야 윌리엄 쉐넌의 편집으로 정식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토머스 머튼의 묵상의 능력》(윤종석 옮김, 두란노, 2006)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번역판은 제목과 용어뿐만 아니라 장(chapater) 순서도 원서와 다르게 편집됨으로써 적지 않은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번역판이 출간되기 전에 대학원 수업 중에 이 책의 일부를 번역한 것이 있어서 개인 블로그에 올려 두었습니다. 제가 번역을 막 시작하던 때에 한 것이라 서투른 부분이 많지만, 책을 구입하기 전에 만약 《내적 체험》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다음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내적 체험》 제13장 죄의식 http://nephesh.tistory.com/336.



2. 토마스 머튼의 파라다이스 여행 (Thomas Merton's Paradise Journey. Cincinnati, OH: St. Anthony Messenger, 1981

     《내적 체험》에 대한 아주 훌륭한 안내는 윌리엄 쉐넌의 《토마스 머튼의 파라다이스 여행》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관상에 대한 머튼의 주요 저작 9권에 대한 해설서입니다. 각 작품들의 집필과 출판에 관한 배경 이야기들은 매우 흥미롭고 각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리고 탁월한 머튼 학자 쉐넌은 책의 핵심 내용들을 아주 정확하고명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니다. 이 책에 포함된 머튼의 저작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1장 : What Is Contemplation?

제2장 : Seeds of Contemplation

제3장 :  The Ascent to Truth

제4장 : Thoughts in Solitude and "Notes for a Philosophy of Solitude"

제5장 : The Inner Experience

제6장 : New Seeds of Contemplation

제7장 : The Climate of Monastic Prayer

제8장 : Zen and the Birds of Appetite

제9장 : Is the World a Problem?


이 작품들에 대한 해설이 시기적으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관상에 대한 머튼의 사상이 발전해 가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는데 이전에 대학원 수업 때 동학들과 함께 나누어 번역했던 것들 중 제가 맡아서 번역한 일부분을 역시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려 두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부족하나마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http://nephesh.tistory.com/333. 이것으로 <토마스 머튼과 윌리엄 쉐넌> 시리즈를 마치며, 그동안 재미 없는 글도 관심을 갖고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권혁일


  


  1. 실제로 머튼이 개정작업을 한 때는 1959년 여름이지만, 최종으로 수정한 것은 1968년 그가 아시아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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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죽음과 부활 (발타자르)

한 줄 묵상 2014.07.30 02:34

우리의 감각들은 우리가 가진 이미지들, 사상들과 함께 반드시 그리스도를 따라 죽어야 하고, 지하 세계에 깊이 묻혀야 한다. 먼저 그 이런 과정을 겪은 후에야 그 감각들은 고양(高揚)되어,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인,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 The Glory of the Lord: A Theological Aesthetics, vol. I, 245.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그 에스카톤(eschaton, 종말)의 날이 이르기 전에는 우리는 그분을 단지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발타자르가 말하는 감각의 죽음과 부활은 그 거울에 관한 것일 것이다. 우리 마음의 거울, 즉 우리의 감각들은 여전히 지상적 욕망에 의해 과민하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죄와 인간적 한계가 남긴 얼룩과 상처들을 그 표면에 가지고 있다. 이런 우리의 감각들을 말끔히 닦아야 한다. 이는 몸을 가진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께 다가가 그분을 감지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실천이 아닐까? 또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형상에도 하나님을 얽어 매지 말아야 한다'는 하나님 계명을 온전히 준행하는 일이 아닐까? / 새결새김 남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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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한 줄 묵상 2012.12.19 16:09
  •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지혜와 감각으로는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셔서 어둠을 견디게 하시니 감사하네요.

    BlogIcon 바람연필 2012.12.20 02:50 신고
모세가 어둠 속으로 들어간 연후에 그 속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첫번 째 나타나심과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빛 가운데 보이셨던 하나님이 그러나 지금은 어둠 가운데서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크고 더 철저한 근면을 통하여 영혼이 전진하다가 보면 그 실체를 알게 되는데, 즉 그 영혼이 관상(contemplation)[각주:1]에 거의 다다르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온전히 인식될 수 없는(uncontemplated) 분임을 더욱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Gregorius of Nyssenus, 335-395), 모세의 생애 (The Life of Moses) book 2.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우리가 열심을 내어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그분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도 이런 하나님일까? 


종종 눈을 떠 하루를 맞이하는 일이 두려우리 만큼 지금의 견디기 힘든 고통 앞에 Why me?를 외쳐 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속시원한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나의 영적 싸움은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함 이라기 보다는 이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지금 붙들고 있는 셈이다.


손을 살짝 잡아주는 딸 아이를 통해 피곤에 지친 나를 감싸주는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하는 친구에게"라는 이메일 속에 담긴 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와 가슴이 울컥하기도 한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따뜻한 시선과 다가가서 함께 하여 주실 때, 어느 순간 내가 삭개오가 되어 감사와 감격이 복받쳐 오른다. 


시인이 이렇게 노래를 한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34).



완전히 알아챌 수 없는 하나님을 이 고통의 와중에 왜 붙들고 있는걸까?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다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손을 덮석 잡고 길을 나서고 있다. 내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 그 속살을 조금씩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이 여정을 불안함으로 이끌기 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씨앗으로 자리잡고 있다.   / 오래된 오늘



  1. 여기서 쓰인 "관상"이란 말은 "영적 인식"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 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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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독서를 위한 조언 5 : 화살 기도(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2.11.07 17:07
  • ejaculation을 '화살 기도'라는 용어로 옮긴 것이 흥미롭습니다. 짧은 문구로 독서 가운데 주신 은혜를 요약하고, 하루 종일 그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영적 독서의 경험을 삶에 녹여 내는 데에 도움이 되는 듯합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2.11.08 17:14 신고
  • "영적 독서를 위한 조언" 시리즈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독서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다면, 영적 독서가 영적인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더더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11.11 05:20 신고

"마지막으로, 항상 주님께 드리는 화살기도로 영적 독서를 마무리하십시오. 그리하여 …… 그대의 마음 밭에 뿌려진 좋은 씨들이 주님의 복을 받아, 자라고 열매 맺고, 나아가 그 열매가 영원한 삶을 낳게 하십시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Part of the “Preface” to his Abridgment of Thomas à Kempis’ Treatise of The Imitation of Christ (1735)




화살 기도(ejaculation)아버지, 예수님, 하나님, 저를 도와 주소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 영광!, 하나님 찬미받으소서! 와 같은 짧은 경구로 간결하지만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영적 독서를 마무리하면서, 신자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유지하는 컨템플레이션(contemplation)의 상태에 머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와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사도직을 수행하는 해 나간다.

 

이상 다섯 가지로 정리된 '웨슬리의 영적 독서에 관한 조언'은 성서 읽기와 영성 고전 읽기에 적용하면 영성훈련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기독교 역사의 거의 모든 시대에서 영적 독서는 중요한 기도 실천 중의 하나였다. 이 기도[영적 독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뜻과 열망을 깨달아 그것을 받드는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실천일 것이다. 웨슬리의 영적 독서에 관한 가르침은, 이런 기도 실천을 심화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리리 확신한다/ 새결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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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는다는 것 (바질)

한 줄 묵상 2012.10.26 17:42

"육욕으로 가득 찬 사람은 관상(contemplation)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훈련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진흙과 같은 육체의 정욕 속에 깊이 파묻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진리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빛을 쳐다볼 수 있는 힘이 없다. 세상도 마찬가지로 ……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가르침으로 생명의 순수함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바라볼 수 있는 힘과 관상할 수 있는 힘을 모두 주신다."


가이사랴의 바질(Basil of Caesarea, ca. 329-379), De Spiritu Sancto, Ch. XXII, 53.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는 것' 또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면 고대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는 성령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4세기 카파도시아(Cappadocia)의 교부 바질은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떠나야 성령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Ch. IX, 23) 그는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요한복음 14:16-20)을 언급하며,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과 세상은 성령을 보지도 받지도 못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바라 볼' 수 있는 힘과 '관상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말한다. 


바질이 성령을 '본다'는 복음서의 말씀을 '관상'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관상하다(contemplatio)'라는 말에 기본적으로 '보다'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점에 착안한 듯 싶다. 그러나 고대 기독교 전통에서의 관상은 단순히 대상을 보고 지적으로 아는 것 이상이다. 관상은 대상을 내적인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경험하고 나아가서 그 대상과의 깊은 일치 또는 연결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바질은 성령을 '바라보는 것'(인식하고 지적으로 아는 것)과 '관상하는 것'(경험하여 하나되는 것)을 구분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받는다'는 개념을 '성령을 관상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질에 따르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열정으로 뜨거워지며 어떤 카리스마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깨끗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경험하고 그분과의 깊은 친밀함과 일치 속에 거하는 것이다. / 바람연필


* 바질의 De Spiritu Sancto(성령에 관하여)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 신성을 가진 삼위의 한 분이라는 신학의 토대를 놓은 중요한 논문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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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주님을 바라봄 2 (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2.09.26 04:00
  • "가장 먼저 그리고 끝까지"!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생각 속에 있으라는 뜻인 것 같네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살전 5:17)도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겠네요.

    BlogIcon 바람연필 2012.09.26 04:29 신고

나는 가장 먼저 그리고 끝까지 그리스도를 생각하였는가?”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Monday Morning” in John Wesley’s Spirituality: A Collection of Forms of Prayer for Every Day in the Week, (1733). 




웨슬리는, 월요일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렇게 자문해보라고 권한다. “나는매사에 임하면서 그리스도를 맨 먼저,” 가장 최우선 순위에 두어 생각하고,” “끝까지그분만을 생각하려고애썼는가? 웨슬리가 제시한 이 질문은, 나는 늘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목하고있는지를 점검해 보게 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것에서 마음을 돌이켜이것의 회개의 기본 의미이다하나님을 바라보는 상태로 되돌아 오도록 도와준다.


이집트의 수도자 마카리우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자기 점검을 통해 주님을 사랑하며 주목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속에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더 많이 그려질 것이다. 그러면 나의 욕심도, 감정도, 생각도 주님의 그것들을 닮아갈 수 있으리라. 이와 함께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점점 더 올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가 가르치는 자기 점검을 실천하면서,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에 언제나 승리할 수 있기를 소원해 본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주기도)에서 내 소원이 아니라 하늘 아버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하신 의미를 새삼 깨달으면서. / 새결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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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주님을 바라봄 1 (마카리우스)

한 줄 묵상 2012.09.19 05:25
  •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와 화가를 주목하여 바라보는 사람,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인 우리,
    기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아주 탁월한 비유인 것 같네요.

    BlogIcon 바람연필 2012.09.19 05:31 신고
  • '나'(I)를 바라보는 '님'(Thou)을 바라보는 것이 기도라는 말씀이네요. 고개를 들어야겠습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09.19 13:47 신고
  • 고개를 든다는 언급이 의미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굽은 몸" 유비를 염두에 두신 표현이신것 같네요. 사람은 본래 똑바로 서서 앞을 보고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창조되었는데, 그만 죄로 인해 그리고 우리 잘못된 감각 사용으로 인해 우리의 몸이 "굽어져" 땅만보게 되었다고 말했지요. 이제 우리가 다시 고개를 들어 주님을 보고 하늘을 노라면 우리의 인식과 감각이 회복될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담을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logIcon 새결새김 2012.09.20 02:05 신고

"내가 잘 그려진 내 초상화를 얻고 싶다면, 나는 나를 그리고 있는 화가에게 눈길를 집중하고 그에게 주목하며 그 앞에 움직이지 않고 오래 앉아 있는 일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화가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을 믿고 끊임 없이 그분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숭고한 인간을 그려주십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담은 그림을 우리 영혼 속으로 보내주시도록 다른 일은 모두 내던지고 주님께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님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한 이승에서도 확신과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마카리우스(Macarius of Egypt, ca. 300 – 391), “설교 30,” 신령한 설교, 은성. §4,


 영혼이 하나님의 모습(the image of God)과 닮은 모습(the likeness of God)을 회복하게 되는 것은 오직 기도(proseuche)를 통하여 하나님께 주목함(prosoche) 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목하는 것’ (loving attention to God)은 기독교 기도 전통의 근간이다.** 이 점은 우리의 기도 실천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 말의 기도는 빌 기()’ 빌 도()’가 합하여 된 말이다. 이는 우리가 기도를 기본적으로 ‘…에게 빌다라고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기도 이해가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도 실천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비는 기도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도의 실천에서 기독교의 기도의 근간이 하나님/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주목함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 실천은 더 깊어질 것이다. / 새결새김

 

* 앤드류 라우스, 《서양 신비사상의 기원》 (분도), 181.

** 칼리스토스 웨어, “기도와 관상의 길: I. 동방,” 《기독교 영성 I》 (은성), 63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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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결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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