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영성 관련글

왜 지금 자존감인가?

왜 지금 자존감인가?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왔던 성민(가명)이를 기억한다. 그는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업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 또한 또래의 왕따 문화에 피해자가 되어 고육지책으로 미국에 유학 오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성민이는 주눅 들어 있었다. 미국이란 낯선 곳에 처음 도착해서 그런지 몰라도, 성민이는 수줍음을 탔고, 말수도 적었고, 사교성도 없어서, 그 아이가 외톨이처럼 혼자 지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목회자로서 영적 돌봄 사역의 차원에서 성민이의 적응과정을 오랜 기간 주의 깊게 지켜 보았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성민이가 무척 활발해지며, 밝아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교회 및 학교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며 중고등부 사역에 리더로서까지 섬기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1년여가 지난 후 성민이와 성공적인 적응과 변화의 비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대뜸 이 친구가 했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선, 절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되더라구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오히려 개성을 존중해 주니까 맘이 편해지고,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그는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자신의 꿈을 준비해가는 자신만만한 청년이 되어 있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이민 목회 현장에서 이런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동일한 청소년이 한국의 학교 문화에서는 주눅 들고 힘들어 했는데, 미국 학교에 출석하면서 말과 행동에 자신감을 갖게 되고 변화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교육철학을 살펴보니, 미국 교육이 지향하는 핵심적인 가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되어 있었다. “너는 누구니?” 그리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첫 번째 질문은 교육의 궁극적 목표를 담아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돕고, 자신이 타인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왔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와 문화에 영향을 받아왔는지를 인식하도록 도와 자신만의 꿈과 비전을 찾아가도록 안내한다. 두 번째는 주어진 문제와 상황 속에서 문제 해결 능력과 사고력을 기르며, 창의력을 배양시키는 질문으로 수업시간에 다양한 관점과 견해를 나누는 토론과 질문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 교육철학과 방법론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한국 유학생들의 얼굴에 여유가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된다. 어찌 보면, 그들의 자신감과 여유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존감은 한 인간의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근간일 뿐 아니라, 인생의 비전과 소명을 찾고 실현해 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내적 가치이며 원동력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자존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지만,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닌, 사회적 동의와 관심이 무르익어가는 과정 속에 나타난 증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움 받을 용기’란 베스트셀러의 연속선상에 있는 심리학적 관심이며, 근성, 배짱, 맷집(grit)이란 자기계발 프레임의 확장된 형태로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이 자존감이란 프레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구체적인 삶의 변화와 성숙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반가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자존감인가?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엄청난 정보의 양에 압도되면서, 요즘 사람들이 가지는 내면의 질문은 “남들은 직장도 갖고, 아이도 잘 기르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지?”로 시작해서, 결국엔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이 길이 맞긴 맞을까?”로 귀결된다. 내 삶의 목적과 이유, 방향과 비전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 떠오를 때, 대답을 찾는 과정 중에 등장하는 본질적 가치와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자존감이란 인생의 엔진이다.


윤홍균 박사에 의하면, 자기효능감, 자기조절감, 자기안전감 등이 자존감의 바탕이 된다(“자존감 수업”).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느끼는 것,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자신 스스로에 대해 편안하게 느끼는 정도와 능력을 자존감의 구성요소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념적으로는 자신감, 자만심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내가 해야 할 일에 비해 내 능력이 월등하다 느끼면 자신감이 상승하지만, 내 능력에 비해 주어진 일이 부담스러우면 자신감이 떨어진다. 반면, 자만심은 내 능력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인해 주어진 과업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에 대한 생각’이 자존감이라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대우를 받을 때 느끼는 상한 감정을 자존심이라 한다. 자존감은 경우에 따라 상하 곡선을 그릴 수 있지만, 자존심은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때 주로 쓰는 표현이기에 감정적 자존감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것도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목표다. 이렇듯 건강한 자존감은 인간이 자신을 수용하는 방식이며,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방법이기에 정신 건강 향상과, 조화롭고 건강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다.  


자존감이 사회적인 열풍을 일으키며 담론화되는 이유에는 우리 한국인의 심리상태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대한 성찰이 존재한다. 한국인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있어 열등감은 가장 보편적이고 두드러진 현상이며 마음의 병들 중에 하나다.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이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건, 경제적 부를 누리는 사람이건,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을 더 혹독하게 대하거나, 자신의 열등감을 자녀나 배우자 혹은 주변인들에게 투사시켜 갈등과 문제를 증폭시키는 경우들을 상담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교회 내에서도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리더의 자리에 있으면, 주변인들이 불편해하거나 곤란에 처하게 되고, 공동체의 화합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왜 쉽게 열등감에 노출되며, 원치 않는 상처와 갈등, 관계문제를 재생산할까? 물론 한 인간의 비루한 성품, 혹은 온전하지 못한 인격성장을 거론하며,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축소시킬 수도 있지만, 열등감, 혹은 낮은 자존감은 한국인들에게서 유독 정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에, 사회구조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열등감에 쉽게 공격당하고 피해자가 되는 이유는 몇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동양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특징이 집단주의인데(최상진, “한국심리학”; 정수복,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집단 내에 다른 구성원들과의 비교의식이 한국인들의 열등감에 주요 원인으로 진단된다. 대표적인 현상으로, “엄친아,” “부친남 (부인 친구 남편)”이 있는데 특정하지 않은 선망의 대상, 혹은 부러움의 대상을 가상으로 상정해 두고, 그와 비교하여 자신의 아들이나 남편의 부족함을 한탄하고 자조하는 형태로 열등감을 생산해 낸다. 안타까운 사실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형태로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조장하거나, 가족의 자존심마저 해치는 상황을 한국인들은 유난히 많이 경험하고 있다. 존재의 특성을 계발하고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공동체 일원과 유사하거나 비슷해지는 것을 심리적 안정감으로 삼는 것이 집단주의의 심리적 특징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타인과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비교함으로써 자신과 가족들의 자존감을 뭉개고 열등감을 재생산하는 행위는 한국인들이 극복해야 할 잘못된 마음의 습관이다.  


둘째는 수치심을 자극하는 문화가 자존감을 낮추고 열등감을 고착시킨다. 유교문화권의 윤리는 마음 수양을 통해 개인의 양심을 고양시키는 데에 목표를 두며,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계도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옛적에 어린아이들이 밤새 오줌을 싸면, 머리에 키를 씌우고 동네를 돌며 소금을 받아오게 하는 풍습이 수치심의 자극을 통한 교육의 전통적 일례이다. 이 정신문화가 변질된 형태로 변형되어왔는데, 자율적 수치심이 아닌, 타율적 수치심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거나 욕보이는 악습이 형성되었고, 중고등학교와 직장 내에서 “왕따” 문화가 형성되면서, 수치심을 자극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열등감의 주요 원인으로 작동한다. 이 교육방법이 가족이나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관습적으로 활용이 되는데, 이웃과 군중 앞에서 개인을 훈계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의 정도가 심하게 되면 건강한 양심을 구비한 인간을 양성하기보다는, 권위주의적 리더에 복종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나,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그로 인한 내면의 상처와 갈등관계를 재생산하게 된다. 이 방식은 특히 요즘 젊은이들에게 부작용이 더 큰 경우가 많다. 조언과 코치를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경쟁우위를 추구하는 세계관을 주입시키기보다는, 개인의 개성과 특별한 은사를 계발하여, 자신의 삶 안에서 소명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 자존감을 향상시키는 영적 돌봄 사역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환경에서는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스스로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완벽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학교나 직장의 사회화 적응 과정 속에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요구받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심리적으로 고통받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 자살률과 청년의 우울증이 높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럴 경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거나, 관대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인색하고 호되게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형성된다. 엄격한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책임감과 성실함에 과도한 초점을 맞춘 교육을 받다 보니,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신을 존중하며 돌보는 방법을 습득하기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훈육한다. 자존감이 향상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이런 열등감이 자신의 내면에만 작동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회생활에서 외연화가 되면, 가족, 친구, 직장, 및 교회 내에서 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양산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열등감이 위협적인 이유는 자신의 내면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 공동체 구성원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주변인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게 되는 심리적 이유를 잘 살펴보면, 시기와 질투가 열등감의 부정적, 파괴적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고, 이웃을 존중하지 못하고, 자식이나 타인의 개성과 차이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의 습관이나 성품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어린 시절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주요 원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열등감의 치유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존감은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할까? 낮은 자존감의 회복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무너진 자존심은 어떻게 치유를 시작해야 할까? 자존감의 시작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현재 나의 재산 가치, 직장 수입, 사회와 공동체 내의 지위나 영향력에 내 자존감의 뿌리를 둔다면, 바람 앞의 촛불과 같고, 사막에 핀 화려한 꽃과 같이 금방 사그라질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자존감이야 말로 내 인생의 가장 경쟁력 있는 능력이며 내적 가치라고 믿는다면, 보다 근원적인 곳에서 찾아야 한다. 타인과 이웃이 아닌, 내게 소중한 가족, 부모님, 아내, 남편, 자식이 아닌, ‘나’ 자신이 내 자존감의 주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할 때,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영적 어른이나 멘토가 성공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주면 큰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물질의 풍요가 인생의 성공과 행복의 척도처럼 여겨지는 현대사회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며, 각자의 인생이 추구할 수 있는 주관적 행복과 성공의 기준을 세워가도록 안내하는 것은 영적 스승과 멘토의 중요한 역할이라 할 것이다.


자존감의 출발이 자아로부터 시작된다면, 그 자아는 어떤 내면의 상태를 지향해야 할까? 자존감 향상의 궁극적 목표는 나의 일과 나의 소명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현재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일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때, 근본적인 내적 원동력과 동기부여, 나아가 높은 자존감이 형상된다. 내가 행하는 과업이 내 인생의 존재이유와 결부되어 있다고 확신할 때, 자존감의 향상과 더불어 자신감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자존감의 근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 거룩함과 존엄함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수용하는 영적 태도가 우리 크리스천의 궁극적인 자존감의 근원이다. 이 자의식 안에 우리의 자존감의 뿌리를 둘 수 있다. 더불어 내게 주신 소명, 오늘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일, 혹은 직업은 내 인생의 존재 이유를 깨닫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자존감은 반석 위에 세워질 것이다. 영혼이 기도할 때, 우리의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이 어떠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저주하거나 불평하거나, 열등감을 조장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냉혹한 현실세계, 치열한 경쟁사회, 열등감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크리스천이 관심을 가져야 할 영적 가치는 영적 초연의 자세다. 우리의 자존감의 뿌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 영혼은 삶의 주도권과 자존감의 주인의식을 내려놓도록 요청받는다. 나의 자존감이 향상되었다고 우쭐되지 않으며, 자존심이 뭉개졌다고 내 삶의 목적과 이유를 부정하거나 저주하지 않는 영적 상태를 말한다. 사업이 큰 이익을 내었다고 해서 우쭐대지 않으며, 직장을 잃었다고 해서 상실의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자식이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해서 자존심이 상할 필요도 없으며, 남편이 회사에서 승진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자존감의 근원될 수는 없다. 삶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여전히 나는 숭고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영적인 자유로움과 초연의 자세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우리 자존감의 첫 번째 토대이다.


두 번째 영적 가치는 욕망에 대한 영적분별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을 자세히 성찰하고 살펴보면, 그 안에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리의 마음이 돈,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 물질에 쉽게 현혹되어 있다면,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자존감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 어렵다.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를 욕망의 실현으로 상정한다며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적은 금새 돈과 명예와 세상적 부요에서 만족하게 된다. 이제 영적 분별을 통해 우리의 욕망이 지향하는 방향을 바르게 고치거나 교정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사랑만으로 우리의 열망이 만족할 때, 우리의 자존감은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라고 성 어거스틴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욕망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자존감은 든든하게 설 수 없습니다!” 이런 영적 초연과 욕망의 순화를 통해 우리의 자존감은 영적 토대 위에 세워지게 되며,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의 자존감은 자유와 해방,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구름위 햇살 이주형


(이 글은 기독교세계 2017년 6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