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영적 여정으로서의 교육:

교사들의 멘토, 파커 파머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의미를 묻는, 교회 안팎의 진지한 교육자들이 경청하는 교육사상가가 있다. "교사들의 교사"라고도 불리는 파커 파머(Parker J. Palmer: 1939-)다. 파머는 1998년 미국 교육자 1만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리더십 프로젝트')에서 과거 10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서른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중요한 "어젠다 상정자" 열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 11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미교육언론협회가 주는 특별상을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종교교육협회(REA)에서 종교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 지도자에게 수여하는 ‘윌리엄 레이니 하퍼 상’을 받았는데, 이 상의 과거 수상자로는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 엘리 위젤(Elie Wiesel), 파울로 프레이리(Paolo Freire) 등이 있다.


교육사상가로서의 파머의 공헌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는 ‘영성’이다. 파머는 기독교 안팎의 교육자들로 하여금 교육의 영성적 차원에 눈뜨고 그에 관해 진지한 성찰과 모색을 하게끔 만든 사상가요 운동가다. 파머는 전형적 ‘종교교육자’ 범주에 들지 않는 인물이다. ‘교육과 영성’을 논할 때 파머가 뜻하는 바는 교육의 ‘목표’로서의 영성이 아니라, 교육의 ‘원천’으로서의 영성이다. 다시 말해, 파머의 주장은 단순히 ‘종교교육’을 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교육은, 무엇을 가르치는 교육이든, 이미 그 뿌리(radix)와 본질에서 영(성)적인 행위이며, 그 뿌리를 알아보고(re-cognize) 되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위기에 처한 교육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고등교육계에 일대 사건(a phenomenon)”과 같은 책이라고 평한 바 있는, 파머의 주저 「To Know As We Are Known」(「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이종태 옮김, IVP)는 “영적 여정으로서의 교육”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파머는 단순히 기도로 시작하고 마치는 수업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주장은 보다 급진적(radical)이다. 파머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 자체가 그대로 기도인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보다 더 큰 무엇과 연결되고자 하는 추구로서의 기도 말이다. 파머에게 영성은 자기초월성을 뜻하며, 자기를 초월해 타자와 관계를 맺는 용기로서의 영성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 즉 교육의 혼 자체다.


파머는 가르치는 일을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진리에 대한 순종”이니 하는 다분히 종교적인 어휘, “공간 창조”니 하는 다소 모호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정의이지만, 많은 이들이 이 정의에서 그간의 사회학적, 심리학적 접근만으로는 다가가지 못했던 교육의 깊은 본질을 새롭게 발견하고, 위기에 봉착한 현대교육을 파국에서 건져낼 귀중한 통찰과 영감을 얻고 있다. 이 정의를 비롯해 파머의 교육사상 전체의 근저에 자리하는 것은 앞서 언급된 책 제목 “To know as we are known”이 말해주듯, 그의 인식론(epistemology)이다. 파머는 잘 가르치는 교육자이기 이전에, 먼저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더 나아가 “진리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깊이 천착한 철학자다. 파머의 철학적 교육학은 “객관주의”를 주적(主敵)으로 상정한다. 객관주의란 한마디로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며, 따라서 진리를 알자면 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이론(理論)이나, 기실 (탈)현대 철학계에서 ‘객관주의’는 여러 각도에서 비판과 반성의 대상이 되어 왔다. 파머는 객관주의를, 이제는 넘어서야할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일환, 혹은 그 인식론적 토대로 본다. 객관주의는 주체인 ‘나’가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the others)을 ‘대상’(object)으로 보는 눈이다. 사실, ‘눈’이라기보다는 ‘손’이다. 왜냐하면, 객관주의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를 상정하는 사상가들이 지적하듯, 결국 인식의 주체가 인식의 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무언가를 파악(把握)하려 하는 것은 그것을 장악(掌握), 즉, 내 손아귀(掌)에 넣고(握) 주무르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인식과 지배의 대상이 된 존재들은 내 손바닥 위에 놓일 수 있을 만큼 축소(reduction)된 존재들이다. 즉, 객관주의는 대상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 파머는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은 그들 앞에 놓인 주제(subject)를 ‘마스터’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대화를 나눌 상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파머에게 진리는 “인격적”이다. 내가 대상을 알기를 추구할 때 또한 그 대상이 나를 알기를 추구한다. 파머에 따르면, 진리는 숨어서 우리를 피하고 있는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숨어서 진리를 피하고 있다. 우리는 진리의 변화시키는 힘을 피해 숨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목소리를 듣고 순종하는 훈련(askesis), 지식(information)이 아닌 영(성)적 변화(transformation)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공부다.


이쯤 되면, 눈 밝은 독자들은 파머의 인식론과 또 교육철학이 얼마나 깊이 기독교 신학과 영성에 뿌리를 박고 있는지를 알아보게 된다. 결국 파머의 말은 위대한 신학자이자 영성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 성인(聖人)은 말했다,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amor ipse notitia est/love itself is a form of knowing).” 참된 앎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 안으로 이끈다. 우리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는 신학적, 영적 진실을 깨닫게 되고, 그 관계의 신비를 우리 삶으로 살아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가르치고 배우는 일, 즉 교육은 그 알면 알수록 놀라운 신비에 이끌리는 여정, 다시 말해, 영적인 여정이 된다.


이종태, <기독공보> 2016년 5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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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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