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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묵상

죽음의 산을 부활의 터널로 (김금남)

제가 살고 있는 이 한국 땅의 광주에서 서울까지 고속버스로 직행하려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사이에 있는 장성 갈재 때문에 그 태산을 넘을 길이 없어서 그 태산 속에 터널을 뚫어서 고속도로를 연결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갈 때 터널이 뚫려있는 길을 신기하게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산 앞에 서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으므로 가 볼 수 없었던 것을 터널을 뚫[음으로써] 가서 보고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므로 내세가 저희들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 이제는 광주에서 서울을 간 사람이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 없이 가는 것처럼 주님이 부활하시고 천상으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사람이 금세에서 내세를 가는 길[에] 죽음이라는 태산이 있어도 아무 의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 김금남, 《동광원 사람들》, 217-8.

헨리 나우웬이 말한 “죽음과 친해지기”(befriending with death)는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얼른 떠오르는 분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이다. 프란체스코의 “태양의 찬가”(the Canticle of Brother Sun)를 보면,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죽음을 “자매”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맞이하셨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 토착 개신교 수도원인 동광원의 김금남 원장의 글을 읽다가 ‘아, 이분도 죽음을 초월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원장은 고속버스를 타고 터널을 통과하다가 부활이 죽음이라는 산을 통과하는 터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사실 김 원장의 스승인 이현필 선생, 그리고 이현필 선생의 스승인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성의 맥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이현필 선생이 돌아가시자 류영모 선생이 그 무덤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 선생, 얼마나 시원하오. 얼마나 시원하오. 이 선생 잘했소. 부럽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이 부활 신앙의 기개가 죽음의 권력 아래서 답답하고 어두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면 좋겠다. / 이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