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스타고지(mystagogy): 신비에 눈뜨기

미스타고지(mystagogy): 

신비에 눈뜨기






영혼의 눈에 끼었던 /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어지며 /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 새삼 놀라웁고 // 창밖 울타리 한구석 /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 부활의 시범을 보듯 / 사뭇 황홀합니다. // 창창한 우주, 허막(虛莫)의 바다에 /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 상상도 아니요, 상징도 아닌 /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 - 구상, <말씀의 실상>.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고 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믿음은 '눈'(目)이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는 눈이다. 귀 기울여 말씀을 들으면 '믿음의 눈'이 열린다. 그런데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말한다, 믿음의 눈이 열리면 우리는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보게 된다.

    "영혼의 눈"이 밝아지면 만유일체가 우리에게 '보이는 말씀'이 된다. 어거스틴과 칼빈은 세례와 성찬, 즉 성사(sacrament)를 일컬어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이라고 했다. 시인은 만유일체가 '보이는 말씀'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의 노래에 따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은 성사(聖事)다. 거룩한 표징(sacrum signum)이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이기에 세상은 말씀 천지다. 믿음의 눈에는 그렇다. 믿음의 눈은 "손가락이 열 개인 것"에서 "이적"을 보며, "새로 피는 개나리꽃"에서 "부활의 시범"을 본다. 보며 놀라고, 보며 황홀해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연신 ‘할렐루야!'를, '아멘!'을 터뜨린다. 예배당 안에서 말씀을 들을 때 뿐 아니라, 예배당 밖에서 '보이는 말씀'을 보면서도 그는 그렇게 은혜를 받는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은혜를 받는 방편'(means of grace), 곧 성사이기 때문이다.

    성사를 행하는 교회의 전례(liturgy) 시간은 바로 이런 눈이 길러지는 시간이다.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세례의 물을 보면서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들어가셨다가 나오신 요단강 그 죽음의 강 물을 볼 줄 아는 사람,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보면서 거기서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예배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들꽃 한 송이에서 부활의 영광을, 십자가의 성흔(聖痕: stigmata)을, 창조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성사와 성찬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그런데 그 성사들에서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그 성사들이 표현하는 바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무 느낌도 없다면 "은혜 받았다"는 말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성사들이 표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말씀 말이다.

    예배 전례가 내가 느끼는 바를 잘 표현해주지 못한다며, 그래서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신도에게 랍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예배 전례가 내가 느끼는 바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전례가 표현하는 바를 내가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성사가 표현하는 바를 여실히 느낄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는 그 성사를 행하는 전례의 예절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한다. 초기 교회에는 그렇게 세례와 성찬례의 예절 하나하나의 의미를 밝혀 말해주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 있었다. 바로 '미스타고지'(mystagogy)가 그것이다. '미스타고지'는 그대로 옮기면 '신비 입문 교육'이라는 말인데, 초기 (헬라) 교회는 '성사'를 '미스테리온'(mysterion), 즉 '신비'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는 성사를 신비를 가리켜주는 거룩한 표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성사 전례의 영적 의미를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밝혀 말해주는 교육 활동(pedagogy)을 '신비 입문 교육'이라고 불렀다.


시릴의 「미스타고지 강론」


    초기 교회 미스타고지 현장을 엿보게 해주는 귀한 자료가 있다. 주후 4세기 예루살렘 교회의 주교였던 시릴(Cyril of Jerusalem)의 「미스타고지 강론」(Mystaogogic Catecheses)[각주:1]이 그것이다. 시릴은 23장으로 구성된 「교리 강론」(Catechetical Lectures)을 남겼는데, 1장부터 18장까지는 세례지원자(catechumen)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강론한 내용이고, 19장부터 23장까지는 부활절을 맞아 세례를 받은 새신자들에게 세례와 성찬례 예절의 의미를 강론한 내용으로서, 이 마지막 다섯 장을 따로「미스타고지 강론」이라고 부른다. 

    시릴은 세례와 성찬례를 '영적, 천상적 신비(Mysteries)'라고 부른다.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기 위함이다. 시릴은 세례는 단순히 죄 사함을 받는 것 훨씬 이상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롬 6:3) 것이요 "그리스도로 옷 입는"(갈 3:27) 것이다. 세례 때 옷을 벗는 건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린다"(골 3:9)는 뜻이다.

    세례 받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들은 이제 성찬에 참여한다. 성찬에 대한 강론을 시작하면서 시릴은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것은 내 몸이다" 말씀해주셨건만 어떻게 감히 성찬의 떡이 그리스도의 몸임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것은 내 피다" 말씀해주셨건만 어떻게 성찬의 포도주가 그분의 피라고 말하길 주저할 수 있습니까?


당시도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건 분명 '믿기 어려운' 일이었을 터다. 그러나 시릴은 묻는다, "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던 분께서 포도주가 피가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시릴은 말한다, 성찬은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은 혼인 잔치이며, "감각"(sense)은 성찬의 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볼 뿐이지만 "믿음"은 거기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본다.   

    시릴은 성찬 전례의 예절 하나하나의 뜻을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밝혀준다. "손을 씻는" 건 "죄된 행실을 씼는다"는 뜻이다. "서로를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서로 입맞춤 합시다" 하는 부름에 성도 간에 입맞춤을 나누는 것은 "서로의 죄를 용서"해주며, 함께 "영적으로 어우러지며", 서로 간에 행한 "모든 잘못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추방시킨다"는 의미이며,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하셨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다. 이 키스는 화해의 키스이며, 따라서 "거룩한 입맞춤"(고전 16:20)이며, 성도 간에 문안하는 "사랑의 입맞춤"(벧전 5:14)이다. 

    이 키스례(禮) 후, 집례자는 큰 소리로 "여러분의 마음을 드높이십시오" 하고 외치는데, 이는 이 "경외로운(awful) 시간"에 예배자는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골 3:2)해야 한다는 부름이며, 그러면 회중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높입니다"라고 응답하며 "이 세상 모든 염려를 다 내려놓고" 주님이 계신 하늘을 향해 영혼의 눈을 든다. 그러면 집례자가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하고 말하고, 회중은 "(감사드림이)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응답한다. 

    성찬은 '감사'(eucharist)의 예를 행하는 것이며, "주님을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시 34:3)는 일이다. 시릴은 지상의 교회가 드리는 찬양은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2-3) 외치는, 하나님의 보좌 주위의 스랍들의 찬양에 동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감사와 찬양의 기도 후, 교회는 하나님께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시어(에피클레시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드리고, "교회의 평화와 세상의 안녕을 위해" 기도드리고, "앞서 잠든 이들을 추도"하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다함께 드린다. 

    이제 집례자는 "거룩한 것을 거룩한 이들에게"라고 말하는데, 시릴은 그리스도는 "본질상"(by nature) 거룩하신 분이지만,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함으로"(by participation) 거룩한 사람들, 즉 성도(聖徒)가 된다고 말한다. 성령을 통해 "거룩한 것"이 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라는 초대의 말은 노래로 불렸다. 노래하는 이(chanter)가 "성스런 멜로디"에 맞추어 노래했다, "(너희는)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시 34:8).

    시릴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올 때 "왼 손으로 오른 손을 받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마치 "보좌"로 왕을 받치는 듯 한 이런 손모양은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는 건 "왕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시릴은 성도들에게 성찬의 떡을 받을 때 "아멘!"하고 받은 다음, 떡을 눈에 갖다 대어 "눈을 성화시킨"(hallowed your eyes) 다음 떡을 들라고 말한다. 


초대교회 성찬 모습. 로마의 칼릭투스 카타콤 벽화 (주후 3세기. A Eucharistic fresco, Catacomb of Callixtus).

신비 앞에서 


    예배는 우리의 "눈이 성화되는" 시간이어야 한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어"지고 이 세상 만사와 만물을 둘러싸고 있는 거룩한 신비에 눈 뜨게 되는 시간 말이다. 성사가, 전례가 궁극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은 결국 '신비'다. 구속의 신비, 창조의 신비 말이다. 세상은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 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면 눈이 열린다. 만유일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보는 눈이, 말이다. 

    신비에 눈 뜨면 사람은 노래하고 춤추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은 예배한다. 예배는 노래하는 일이고 춤추는 일이다. 예배의 말은 실은 다 노래/시고, 예배의 동작은 실은 다 춤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보게 되면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다. 대신 노래가 터져 나온다. 찬양의 시가 터져 나온다. 몸으로 부르는 노래가 춤이다. 예배하며 일어서고 앉고 두 팔을 들고 무릎을 꿇고 하는 모든 동작이 실은 다 춤 동작이다. 내 안에 샘솟는 노래가 시켜서 하는 동작이다. 왜 일어서는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그리스도께서 내게 "일어나라!"(마 17:7)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왜 앉는가? 제 정신을 잃고 무덤 사이를 배회하던 내가 이제 "주의 발치에 앉아"(눅 8:35) 말씀을 들으려는 것이다. 

    예배자는 일어서고 앉고 하는 예배 동작이 표현해주는 바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주일 아침 예배당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이미 은혜를 받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이리 저리 방황하던 저, 이제 주님 앞에  가만히 앉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느라 여러 갈래로 흩어졌던 마음을 그는 '두 손을 모아' 다시 하나로 모은다. 그러다가 "이제, 우리 다함께 일어나 영광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하는 인도자의 부름이 들리면 그는 힘차게 '일어선다'. 그렇게 부활을 연습한다. 몸의 부활을. 

    예배 때 행하는 모든 예(禮) 하나하나의 뜻을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밝혀주고, 성도들로 하여금 성사를 '보이는 말씀'으로 체험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 필요하다. '미스타고지'가 필요하다. 예배를 성서적으로 영적으로 주해(exegesis)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자신이 먼저 신비에 사로잡혀 노래하듯 말하고 춤추듯 집례하는 예배 인도자다.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집회의 사회를 보는 것과 다르다. 예배 인도자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어야 한다. 그 떨림은 신비 앞에서의 경이의 떨림이요, 거룩을 대면하는 이의 경외의 “두렵고 떨림”이다. 그 떨림이 ‘영성’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

예배의 영성을 배울 수 있는 책이 있다. 정교회 전례학자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 1921-1983)이 저술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복있는사람)인데 현대 미스타고지 저작의 고전이다. 슈메만은 묻는다, "그리스도께 이 세상에 가져오셨다고 우리가 믿는 그 새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슈메만은 말한다, 아니, 노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 "성만찬적인 삶"(eucharistic life)을 가져오셨다! 내 손에 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로 알아보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 곧 감사(eucharist)의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들을 "떼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 말이다(눅9:16).  자기 몸을 바쳐 사랑의 식탁을 차리는 삶 말이다. 그런 삶의 원형이신 분의 음성을 우리는 예배 때 듣는다,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받아서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다." 이 음성에 믿음으로 '아멘'하고서 예배당 밖을 나서면 세상은 이미 다른 세상이다. 하늘과 땅이, 천사들과 예언자들이, 역사와 양심이 우리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 외치고 있는 세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만이 아는 세계다. 



글쓴이 : 이종태. 장로교 목사. 장로회신학대학원(M.Div.). GTU (Ph.D. Candidate, 기독교영성학).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co.kr) 연구원. 역서로 《순전한 기독교》,《가르침과 배움의 영성》,《메시지 성경》등이 있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3월 호에 실린 세 번째 글입니다.


  1. St. Cyril of Jerusalem's Lectures on the Christian Sacraments: The Procatechesis and the Five Mystagogical Catecheses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7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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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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