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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아슬란, 유다의 사자 (나니아 영성 이야기 4)


나니아 영성 이야기 4

아슬란, 유다의 사자


“나니아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착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운 존재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페벤시 가(家)의 아이들도 아슬란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니아의 주(主)인 아슬란을 처음 보게 되는 순간, 아이들은 그 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여러분은 떨어보셨습니까? 공포심 때문에가 아니라 경외심 때문에 말입니다. 공포(恐怖)와 경외(敬畏)가 어떻게 다르냐고요? 그게 그거 아니냐고요? 혹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나니아에 가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을 예배해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예(禮)와 배(拜)

 

예배시간에 예배당 안에 있다고 해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禮拜)란 예(禮)를 갖추어 배(拜), 즉 절한다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엎드러진다는 것입니다. 눈은 불꽃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으신 분, 그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분 발 앞에 장로 요한이 “엎드러진” 것처럼 말입니다(계 1:17; 5:5).


나니아는 예(禮)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낯선 그 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또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합당한 예를 갖춰 대합니다. 서로 무례(無禮)를 범치 않습니다. 매너와 예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나니아가 ‘예의 나라’(禮儀之國)인 것은 나니아의 삶의 중심에 예배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禮)란 본래 예배 시에 가져야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존귀(worth)하신 분으로 알고 예배(worth-ship)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동료 인간들을 예로써 대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캐스피안에게 “너는 아담 경과 이브 부인의 후손”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아슬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아담 경과 이브 부인의 후손이다. 이는 가장 비천한 거지의 신분이라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게 할 만큼 명예로운 일이며,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도 부끄러워 어깨를 숙이게 할 만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거지라도 인간인 이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며, 아무리 황제라도 인간인 이상 죄인 중의 한 사람이기에 누구를 멸시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니아 나라에서는 거지도 황제도 아슬란 앞에서 몸을 굽혀 절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함께 예배하는 자로 대합니다. 예로써 대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니아에서 배우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니아에서 알게 됩니다. 나니아는 경외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공간입니다. 나니아는 “너무도 선하면서 동시에 너무도 무서운” 아슬란을 만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겁(怯)과 신(神)

 

아슬란을 만난 아이들은 몸을 떨었습니다. 아슬란과의 만남은 늘 그렇습니다. 겁이 납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아슬란을 만나면 겁이 나면서도, 동시에 신이 납니다. 겁이 나면서 신이 나고, 신이 나면서 겁이 납니다.


왜 겁이 날까요? 무시무시한(terrible) 존재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신이 날까요? 그 존재는 또한, 무시무시하게 선한(good)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선이 무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해본 사람은 아직 진짜 선을 만나보지 못한 것입니다. 진짜 선은 그저 봄볕처럼 착하지 않습니다. 진짜 선은 무시무시합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무시무시합니다. 태양처럼 무시무시한 선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한 존재 앞에 서게 되면, 누구도 그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엎드러지게 됩니다. 떨게 됩니다. “떨며 즐거워”(시 2:11)하게 됩니다.


진짜 기쁨은 우리를 떨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겁이 납니다. 신이 나는데, 겁나도록 신이 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크기와 높이와 깊이와 무게의 기쁨이 내 작은 영혼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시난스

 

우리를 겁나게 하면서 또한 신나게 하는 무엇으로서의 ‘거룩’을 루돌프 오토라는 독일의 종교학자는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거룩이란 우리를 두렵게 만들면서 동시에 매료시키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10권 목록의 첫 번째 책으로 그 독일 학자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든 바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문학가로서 루이스의 가장 큰 업적은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시난스’를 일으키는 존재로서의 아슬란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슬란은 아이들을, 또 “어린아이 같은” 어른들을 떨게 만듭니다.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사로잡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어른들이 온갖 것들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사로잡힐’ 줄 모르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외하올 분에, 또 경이로운 것들에 사로잡힐 줄 모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 가슴이 뛰는 아이가 되어야 하고,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신” 분 앞에서 엎드릴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신나지 않는 것은 신(神)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 신은 우리를 신나게, 겁나도록 신나게 만드는 신입니다.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자의 등에 올라탔는데요! 「사자, 마녀, 옷장」에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아슬란은 무시무시한 포효를 울리고는 루시와 수잔을 등에 태우고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습니다. 그 거대한 사자의 따듯한 황금빛 등 위에서 수잔은 앞에 앉아 갈기를 꽉 붙들었고, 루시는 그 뒤에서 수지를 꼭 잡았습니다. 아이들은 겁이 났지만, 그 질주는 “아이들이 나니아에서 경험한 가장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건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기도 합니다.


이종태 <빛과 소금>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