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예배당 십자가 밑에 앉아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도를 아룁니다. 얼굴 하나에 고통 한 아름, 이름 하나에 눈물이 고이는 까닭은 지금이 사순절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흐려진 눈동자, 거절과 배신, 상실의 잔을 마셔야하는 그 씁쓸한 입맛 다심, 세속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자꾸 격려하며 수줍은 미소로 괜찮은 듯 돌아서는 그 뒷모습은 마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각기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사람인 이상 따라붙은 그림자가 다 비슷비슷한 것처럼, 우리는 여러모로 닮아 있습니다. 


수녀원 입회 2년 만에 얻은 중병

피터 루벤스가 그린 아빌라의 테레사 (출처 : 위키미디어 코먼스)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는 1515년 스페인 출신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신비가 중에 한 명입니다. 그녀는 여러 편의 저술을 통해 기도, 인간 의식의 변형 단계, 그리고 문학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영감을 주는 사람입니다. 

   또한 테레사는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는 성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점이 그녀를 친숙하게 느끼게 합니다. 테레사는 1562년에 쓴 글, 그녀 스스로 『천주 자비의 글』이라고 부르기 원했던 자서전에서 자기 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각주:1], 당신도 아시다시피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적잖은 고생을 겪었습니다.”(자서전40,21)                                   

   여기서 말하는 ‘고생’이란 그녀가 자서전을 쓰던 시기인 40대 후반에 겪었던 개혁수도회 창설을 둘러싼 종교·사회·정치적 핍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테레사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테레사는 이즈음 자신이 겪고 있는 거센 고통, 곧 참아 견디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는 그 고통 때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때로 나는 산다는 것에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도 고통도 없이, 통 모든 것에 대해 일종의 냉담 상태와 어둠 속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자서전 40,21)


  테레사는 평생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수녀원에 입회한 후 만 2년 만에, 즉 수도 생활 2년 만에 중병을 얻었습니다. “심장의 극심한 아픔은 몸서리 쳐지는 것”이었고, “날카로운 이로 심장을 물어뜯는 것” 같았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기운이 전혀 없었고 맥이 풀려 입맛을 온통” 잃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열”, “고열로 말미암아 심경은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끼도록 오그라들기 시작” 했다고 설명합니다. 

   육체적 고통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우리에게 쉴 틈을 허용해 주지 않는 폭군적인 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레사도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순간도 쉴 수가 없어 마침내 큰 비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고 한탄했습니다(자서전 5,7). 심지어 극심한 발작 후에 3일 동안 죽었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덤을 파고 장례준비를 하고 있던 찰라 그녀의 숨이 돌아왔습니다. 그 후 테레사는 3년 동안 “둥글게 말아놓은 실뭉치” 같이 침대에 누워서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극심한 통증에서 보냈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잠시 고통이 멈추기만 해도 살 것 같은, 다시 살아날 것 같은 기운을 느끼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수가 있을 때면 병세가 좀 나아지나보다 하고 생각”(자서전 6,1)하며 테레사는 기뻐했습니다. 오랜 투병 생활의 전환점을 이룬 날, 그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땅바닥을 기어갈 수 있기 시작했을 적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자서전 6,2) 


   투병 생활을 해 보신 분들, 혹은 육체적 고통 속에 계신 분들에게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저는 상상이 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공감이, 어떤 분들에게는 간절히 일어나길 기대하는 한줄기 희망으로 들릴 말입니다. 저도 한 30년 전쯤 쇠도 씹어서 소화할 십대 중반에, 학교 등굣길에 꼭 건너야 할 육교 아래 서서 “내가 죽지 않고 저 육교를 올라갈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 움큼씩 먹던 약이 몇 년에 걸쳐 점점 줄어들고, 어느 날 육교 계단을 한 번에 올라가고 난 뒤, 제가 걸어 올라온 계단을 돌아보고 울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영혼에 끼친 해악은 건강 때문” 

   병에 대해 테레사가 초기에 보인 관점은 그저 받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점으로 일관합니다. 당대는 인내와 오래 참음이 미덕인 시대였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때때로 억압으로 비쳐질 위험이 있지만 테레사는 병 자체를 그냥 받아들입니다. 테레사는 “이 기간 동안은 줄곧 모든 것을 완전히 단념한 채로 지냈고, 처음 고통이 시작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큰 기쁨마저 느끼면서 주님의 뜻을 달갑게 받고 있었습니다.”(자서전 6,2)고 말합니다. 

   병이 주는 유일한 유익이 있다면, 가장 최소한의 것,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것만을 붙들게 하는 가난한 정신을 갖게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오롯한 일치를 하고 지냈던 관계로 언제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해도 달갑게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자서전 6,2) 테레사가 오히려 투병 생활이 끝난 후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스스로를 회고한 것에 비하면, 병상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오롯한 일치” 가운데 보냈다는 것은 아련한 소녀시절의 풋풋하고 순진한 첫사랑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것이 육체적 고통을 겪는 동안 얻어야 할 더할 나위 없는 삶의 보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여 순진하기까지 한 가난한 정신상태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얼마나 먼지요! 필요 없는 것들, 부차적인 것들, 비본질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 단 하나에만 마음을 기울이며 삶을 정돈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지요! 고통은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저 끙끙 앓게 만들뿐입니다. 그저 “주여! 주여!”를 외치거나 아니면 고통만 벌컥벌컥 들이키느라 숨이 멎을 지경이 되니 말입니다. 

   고통은 철저히 당하는 자의 몫으로만 돌려지는 외롭고 고독한 심연입니다. 도와주고 싶고 돕기도 하지만, 함께 하고 싶고 함께 있지만, 혼자 겪어 내야만 하는 그 영역이 있기에 바라보는 자의 고통도 커져 갑니다. 그러니 고통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겪은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수는 없는 일입니다. 

   혼자 묵묵히 투병 생활을 하던 테레사는 어느 날 혼자 병상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뜻의 일치”를 이루고 있으니 괜찮다던 마음에 “빨리 낫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병실에 누워 꼼작도 못하던 그녀에게 이른 새벽 기도 시간을 알리면서 서로를 깨우는 수녀들의 찬미 소리를 듣고서 자신도 그들과 함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빨리 낫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은 무엇보다도 습관대로 고요 중에 기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자서전 6,2)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다는 갈망이 병을 고쳐달라는 간절하고 적극적인 기도로 바뀌고, 마침내 테레사는 기적처럼 병상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 기적 같은 일이 몰고 온 결과에 대한 테레사의 평가는 아주 냉정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나는 당신을 더 잘 섬기고 싶었기에 건강을 원했습니다만, 내 영혼에 끼쳐진 갖은 해악은 그 건강에서 왔던 것입니다.”(자서전 6,4) 좀 더 건강하면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섬길 것이라는 것은 단지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상처투성이 그리스도’를 만나다.

   병을 털고 일어난 테레사의 이야기로 도시 아빌라가 들썩거렸습니다. 귀족들, 기사들은 기적을 몰고 온 젊고 아름다우며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테레사를 찾아 왔습니다. 모름지기 봉쇄수도원이었지만 종교가 일상인 시대에 수녀원의 응접실은 공식적인 사교 장소였습니다. 특히 180명이나 되는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은 대단한 짐입니다. 테레사를 찾는 방문객이 많을수록 희사품도 많아지고 혹여, 귀족의 초청으로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딸려나가는 수녀까지 있으니 입을 몇이나 덜게 되는 것입니다. 고요 속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소망했던 테레사도 “페스트와 같은 기분 풀이” 같다고 스스로 표현한 이런 교제에 휩쓸려 버렸습니다. 

   당시 이런 일은 크게 흠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레사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가책을 토로해 보았지만 주변에서는 다들 괜찮다고만 했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테레사는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문제에 대해 크게 한탄했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육체적 질병을 3년 만에 털고 일어난 것과 달리, 내적 고통은 “상처투성이인 그리스도의 성상” 앞에서 회심한 39세까지 계속 됩니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활은 무척 괴로웠습니다. ……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는 세속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일이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위로를 안겨 주는 반면, 세속 일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영적 생활과 거기에서 오는 위로와, 관능적 생활의 향락과 기분 전환이라는 전연 반대되는 이 두 가지를 타협시켜 보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자서전 7,17) 


   하나님과 세속 사이의 괴로움 속에서 테레사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기나긴 세월 동안 시간만 보냅니다. 하나님과 세속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살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해야 할 싸움의 방식이 아닙니다. 테레사는 단지, 세속을 붙들고 괴로워하는 것을 두고 자신이 싸운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세속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모욕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그런 끔직한 일에 대한 자각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부이십니다. 세속은 무(無)일 뿐입니다. 따라서 전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렇게 전부이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 자연스럽게 하나님께로 기울어지는 것이 우리 싸움의 방식입니다. 선택과 결단을 유보하는 삶을 사는 것은 참된 행복을 괴로움이 좀 먹게 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테레사는 우연히 기도소에 놓인 “상처투성이의 그리스도를 표상한 성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테레사는 “그 상처가 말해 주는 헤아릴 길 없는 사랑”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회색지대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테레사는 하나님을 향해 삶을 완전히 정향(定向) 짓는 깊은 통회를 경험합니다.(자서전 9,1)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내적으로 고생한 것에 비례하여, 테레사의 결단은 아주 확고하게 나타납니다. 그후로부터 테레사의 영적인 걸음은 눈에 띄게 보폭이 커집니다.  


고통이 성숙으로 이끈다는 공식의 문제점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삶을 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을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봉사한 테레사에게 이후로는 병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데레사는 여러 가지 병을, 그것도 상당히 중한 병을 평생에 걸쳐 앓았습니다. 그렇다고 테레사가 병에 대해 완전히 초연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좀 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병에 시달리는 육체를 돌보느라 시간을 많이 써야 할 때, 기도를 하고 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시간을 두어야 할 때, 테레사는 스스로 육체의 노예가 된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테레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과 솔직하게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약함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고, 다시 털고 일어섰다는 점입니다. 테레사는 그때마다 “주님께서 자신을 홀로 두지 않으셨고” 아주 “부드럽게 대해주셨다”고 말합니다. (자서전 40,20)

   글머리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테레사는 수도자들이 수도 생활을 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 자연스러운 갈망을 시작으로 개혁수도회를 창설합니다. 이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박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테레사의 경우 육체의 질병은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이고, 내적인 고통은 더 나은 삶으로 깨어나기 위한 선택의 과정이었다면, 사역을 위해 겪는 고통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내는 즉, 생명을 출산하는 산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통해 인간의 영적 성숙이 일어나는 방식을 정의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혹자는 ‘고통이 성숙으로 이끈다’는 공식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합니다만, 만일 그랬더라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되었을 것이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고통스럽게 기도하셨을 까닭도 없었겠지요. 분명, 고통은 항상 도전을 제기하는 위험스러운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고통을 미리 두려워할 까닭도 없겠지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문제를 염려하여 미리 보험 들 듯 안전한 환경을 위해 주문을 거는 소아적 신앙생활을 할 일도 아닙니다. 

   저는 테레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즐겨 쓰는 유비(類比)인 결혼관계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서로 사랑할 것”을 서약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항상 사랑이어야 합니다

   아픔과 고통을 통해 테레사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에 눈을 뜹니다. 테레사는 “네 소원, 님을 뵈옴이요, 네 두려움, 그를 잃을까 함이요, 네 고통, 그를 못 누림이요, 네 기쁨, 그리로 갈 수 있음이어야 하나니, 이제야 너는 크나큰 평화와 더불어 살으리라” (수녀들에게 타이르는 말, 69번)고 노래합니다. 고통과 그 고통이 몰고 오는 두려움을 넘어서 테레사는 예수님을 두 눈에 가득 담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님을 사랑할 것을 오늘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님께서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 지나고 부활절이 오면, 님의 사랑에 고통 중에 있는 온 세상이 봄눈처럼 깨어나길 청합니다. 


글쓴이  주선영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영성학을 전공했으며(Th.M), 현재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과 <모새골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영성 생활에 안내가 필요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 2016년 4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테레사의 자서전은 도밍고회의 페드로 이바네즈 신부의 분부대로 쓰여졌습니다. 자서전은 이 신부에게 고백하는 형식의 문체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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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처드 로어의 《불멸의 다이아몬드》

불멸의 다이아몬드 

우리의 진짜 자기를 찾아서 

Immortal Diamond: The Search for Our True Self 

리처드 로어 지음 ·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15년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에 갇혀 끙끙거리다가 어느 순간 하고 벗어날 때, 그 사람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마치 무덤 같은 고치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태어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자기를 하고 벗어나게 해 주는 방법이 있다. 스승이신 장신대 유해룡 교수께서 신학생들에게 늘 이르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자기 초월로 이끄는 세 가지가 있다. 인격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기도, 독서, 이웃 사랑이다.” 이 셋은 자기를 온전히 개방하지 않고서는 그 본질을 수행하기 불가능한 일이다. 낯선 세계, 낯선 생각, 낯선 이에게 자기를 '탁' 개방하고 내어주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그 낯섬과 하나가 되는 것. 사람이 아름다워지는 때, 이를 두고 영적 수련이라고 하며, 이 셋은 기본이다.  그리고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근에 좋은 책을 한 권 추천받았다. 이 책이 얼마나 맘에 드는지! 추천해주신 분, 이 책을 선별하여 번역한 번역자와 출판사, 출판비를 후원하신 분까지 책을 만지고 읽을 때마다 마음에 담고 기도를 드릴지경이다. 리처드 로어(Richard Rohr)의 《불멸의 다이아몬드》, 요즘 푹 빠져있는 참 좋은 벗이다.

    이 책은 인간의 궁극적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답을 진짜 자기로 정의한다. 저자는 진짜 자기를 불멸의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데, 마태복음 13장의 밭에 감추인 보물에 대한 유비(analogy)이다. , 16세기의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가 영적 생활에 관해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하던 어느날, 기도 중에 문득 떠올랐던 맑디맑은 수정궁의 상징과도 유사하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진짜와, 이 진짜를 대체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자기와, 가짜 자기가 구축한 세상, 그리고 이 둘의 체제(system)를 놀랍게 통찰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친 개인적 수행과 폭넓은 영적 지도의 경험 없이는, 쓸데없이 사서 고생하고 있는 신자들과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 가는 종교에 대한 깊은 애정 없이는, 결코 쓸 수 없는 말들이 수놓아져 있다.

    문장 사이를 서둘러 걸어가 마지막 끝에 빨리 도달할 수 없다. 머물고 맴돌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게 한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쁘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기도하다. 무엇보다 이런 책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나와 주길 기다려왔다. 내 스스로도 너무 사서 고생을 많이 했다. 다른 이들에겐 시간을 단축시켜 주고 싶다.


기도하며 읽는 책

    이 책은 기도하며 읽어 가면 좋겠다. ‘센터링 침묵기도’(향심기도)로 시작한다.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잠시 머물며 글을 음미하기도 한다. 책 내용 중에 기도하기 좋은 말씀과 상징들은 좀 오랜 시간 묵상으로 기도한다. 예를 들어,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을 읽고 나면, 내 마음 밭을 바라보고 그 밭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찾아 주목해 보는 기도를 각자 하고 싶은 방법으로 기도한다. 기도 자료가 더 필요하면 부록을 사용하면 된다.

    나는 지금 교회 기도 모임에서 이 책을 사용하고 있다. 자매님들과 함께 천천히 읽어가면서, 어려운 부분은 보충 설명을 해 주고, 함께 기도한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한국 개신교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런 책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회가 몇이나 되겠는가. 아빌라의 테레사가 살던 시절, 1559년 교회에서 금서목록이 발표되었을 때, 테레사는 자신이 즐겨 읽던 대다수의 책이 이 목록에 들어 있는 것을 알고는 깊은 실의에 빠졌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때 테레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살아 있는 책을 주리라.”는 주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천주자비의 글》, 26.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좋은 책들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혹시 아는가, 어쩌다가 진실로 "살아 있는 책" 자체이신 주님을 힐긋이라도 읽게 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 될런지! / 해'맑은우리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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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을 참는 힘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5.25 21:00

이런 성과[모욕을 참을 결심과 모욕을 모욕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랑을 얻는 것]를 거두지 못하고 굳세게 참는 힘을 기도로써 얻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악마가 선사하는 착각인 것으로, 우리는 그에게 넘어가서 스스로 가장 존경을 받아야할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완덕의 길》에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모욕을 참기 힘든 데 있습니다. "나에게 먼저 알리지 않았다. 나만 배제당했다. 내가 모욕당했다. 나를 무시했다. 나는 존재감이 없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모욕당한다는 느낌입니다. 모욕당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주어집니다. 굳세게 모욕을 참아넘길 수 있는 힘이 기도로 주어진다는 것은 큰 위로입니다. 그런데 그냥 굳세게 참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일치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됩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아들이 받아낸 모욕에 비하면 내가 당하는 것은 어떤 것도 모욕으로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그 사랑 안에 머무는 힘을 잃어버리면 내가 존경받을 구석이 있는 사람인 양 생각됩니다. 내가 가진 직분, 내가 가진 사역의 역할, 내가 가진 나이와 경륜이 나의 존경의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예수의 데레사는 그것이 은혜의 선물이 아닌 사단의 유혹임을 분명히 경고합니다. 허겁지겁 기도해가며 지내고 있는 요즘, 가끔씩 주변사람에게 날이 선 목소리가 되어가는 것을 자각하는 요즘, 굳세게 참는 힘을 얻을 때까지 한 자락의 기도라도 마음을 다해 올려드려야겠습니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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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정한 열망

세리의 고백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4.09 22:05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를 못 믿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더 큰 법입니다. 받는 은혜가 크고 보면 자기 자신의 가엾은 모습이 돋보이고, 자기의 지은 죄가 더욱 커 보이는 것, 그러기에 저 세리와 같이(누가복음 18장 13절) 감히 눈을 쳐들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일곱 번째 성채, 3장. 14절.


부활절의 노래는 너무나 부르기 쉽고 그날의 축제는 이내 '나'의 것이 되고 말때가 많다. 사순절의 기나긴 어둔 밤은 지루했고 참기 힘들었으며, 남의 것 아니면 저 예수의 것으로 생각해버리고 싶은 유혹은 매해마다 되풀이 된다. 

그러나 십자가와 그 길에서 멀어질수록 부활의 기쁨은 밋밋해지고 부활절도 그저 연례행사로 그쳐버리기 쉽다. 참된 부활은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 이후에 오는 것이며, 받은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죄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세리는 주님을 만나고야 만다.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 이제 부활하셔서 "평화"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 만남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 이제 의인으로 거듭난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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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소리찾기

영적 결혼 안에서 평안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3.11 17:10

영적 약혼은 이와[영적 결혼과] 달리 흔히 서로 갈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 하지만 영적 결혼의 은혜에 있어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항상 그 중심에 하나님과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서 강이나 우물로 떨어지는 물과 같이 똑같은 물이 되어버려서, 강물과 떨어진 물을 나눌 수도 따로 갈라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일곱 번째 성채, 2장. 4절.


아빌라의 테레사는 한 영혼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 자세히 그려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내면의 성 안에서 영혼은 하나님의 신부로 발견된다.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 상태인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게 된다.

테레사는 이 연합이 하늘의 물이나 땅의 물이 하나와 같은 것처럼 분리될 수 없는 온전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고 말씀하신 대로 평안한 상태이다.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능력, 감각, 감정은 이 평화 속에 있지 못할 때라도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신랑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며 평화이다. 나의 생각이나 행위로 깨뜨려질리 만무한 연합이며 결혼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평화로 발견된다. 우리 영혼은 결혼 안에서야 사랑이 완성되리라 생각하며 연예와 약혼 그리고 그 결혼까지 나아가려 하지만 주님은 이미 우리와 결혼하기로 하셨다. 그 온전함 안에서 평안이며, 영원한 평화다. 주님, 오늘도 그 사랑과 평화 안에서 발견되게 하옵소서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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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신비를 여는 문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1.10 03:29

우리가 아무리 애써보아도 쓸데없는 노릇입니다. …… 이 물[은혜]은 다만 주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나마도 흔히 그 사람이 전혀 모르고 있는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이끄시도록 맡겨드립시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네 번째 성채, 2장. 9절.


2015년 새해, 우리는 계획과 목표를 세워간다. 더 구체적이고 세세한 계획을 세울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는 주도적으로 계산하고, 또 준비한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계획은 반대로 하나님의 신비와 은혜의 자리를 막아버릴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모른다. 10년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 내일 일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런 무지와 무력의 고백 안에서 하나님은 일하실 수 있다. 아니 그런 고백을 가진 영혼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게 된다. 무지의 고백은 신비를 여는 문이 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은 신비일 수 없다. 파헤쳐지고 예상되는 것은 신비가 아니다.

갓난 아기에게는 매 순간이 신비와 경이로 가득하다. 그러나 신비롭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유아기 동안에, 사람은 평생 가운데 가장 많이 성장한다.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영혼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전부가 되실 수 있다.  

2015년을 테레사의 요청과 함께 시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의 고백으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의 고백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맡겨드릴 수 있기를…….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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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 약혼하다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4.11.09 07:08

여기(6궁방)의 영혼은 다른 신랑은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으려는 굳은 결심이 벌써 딱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랑은 약혼을 서두르는 그 영혼의 열렬한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약혼을 더더욱 갈망하게 하시고, 이 최대의 행복을 얻기 위해 약간의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 아, 이 영혼이 제 칠 궁방(하나님과의 연합)에 들기에 앞서 안팎으로 치러야 할 시련은 얼마나 쓰라린 것이겠습니가?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6궁방, 1장. 1절.


16세기 스페인의 신비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여정을 7단계의 궁방(mansion)으로 묘사한다. 그녀에 의하면 마지막 단계인 '하나님과의 연합' 앞에 깊은 정화의 시련이 놓여져 있다.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 이전에 영혼이[우리가] 신부됨에 적합치 않은 모든 부분들이 정화를 위한 사랑의 불에 타게 된다. 그것은 어떤 죄악된 행위나 습관의 차원을 넘어서 죄된 자아 자체, 자기 중심적 삶 자체에 대한 정화의 과정이다. 테레사 뿐 아니라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이 말했던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이다. 거기에는 세상의 어떤 위로도 만족도 없으며, 하나님도 자신을 완전히 숨겨버리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테레사는 이 영혼의 밤이 주님과의 영적 결혼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영혼을 낭만적 사랑 놀이가 아닌, 첫사랑의 타오름이 아닌, '사랑의 어두운 밤'으로 인도하셔서 그 어떤 위로나 기쁨 없이도 주님의 뜻에 온전히 하나되도록 이끄신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절규에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의 고백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두렵고 무서운 혼란과 어둠의 밤, 차원이 다른 고통의 밤 한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다. 주님과의 영적 약혼식은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치러진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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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사랑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4.10.16 09:06

아직도 누에[자기 자신]는 살아 있는 게 아닙니까? 마치 요나의 칡넝쿨을 갉아먹던 벌레와 같이 우리의 자애심, 자존심, 그리고 하찮은 일을 가지고 남을 판단한다든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아낄 줄 모르는 사랑의 결핍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덕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껏 한다는 노릇이 죄짓지 않으려는 것뿐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에 필요한 그 마음가짐에는 너무나 먼 것입니다. …… 사랑이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인 것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5궁방, 3장. 6절., 4장,10절.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여정을 묘사하면서 하나님과 연합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다섯 번째 궁방(mansion)을 소개한다. 그녀는 누에가 고치를 틀고 죽어 마침내 나비가 되는 변화의 순간이 바로 이 연합과 같다고 밝힌다. 그러나 슬프게도 여기까지 이른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도 이야기한다.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외적 신앙 활동에만 관심을 둔 영혼은, 테레사의 말대로 칡넝쿨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을지 모른다. 기껏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방어적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저 기독교적 색채를 띤 자기 수련일 수 있다. 자기 자신인 누에의 행실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누에를 죽여야 하는 것이 영적 여정의 숙명이다. 자애심과 자존심을 먹으며 한가롭게 사는 삶 대신 차라리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불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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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다'

    추석 연휴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태풍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다. 약간 멍하고, 졸음 때문에 무거운 눈꺼풀을 껌벅이면서 책상 앞에 앉아있다. 흐트러진 감각을 옷매무새 정리하듯 가다듬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

    일상의 삶에서 침묵기도를 뿌리내리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고군분투한다. 잠을 근간으로 하는 몸 상태, 결혼과 육아의 살림살이, 교회의 일반사역과 영적지도 사역, 개인 공부, 기타 사회활동 등의 요소 속에 하루 1시간 이상의 침묵기도와 성찰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기가 쉽지 않았다. 도반들의 경우를 살펴봐도 9-10개월짜리 일상에서의 영신수련이라고 일컫는 ‘19번 피정을 어떻게 해냈을까 싶을 만큼, 매일매일 침묵기도를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교회의 영성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역자들의 고민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 중에만 잠깐하고 일상에서 흐려지고 멈춰지는 것. 이 좋은 것을 왜 지속하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도 좌충우돌이지만 더 흔들렸던 어제의 날들을 돌이켜보면, 명백해지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란 명언에 잘 나타난다. 침묵기도는 해야 한다는 당위의식과는 상극인 것 같다. ‘해야 한다는 가치관에 이끌린 노예의식은 침묵기도가 펼쳐주는 세상과는 충돌한다. 침묵기도는 철저히 자발적 사랑과 관련된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곳은 하고 싶다는 내적인 갈망에 충실한 자발적인 선택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이다. 그만치 긴장과는 거리가 멀다. 유연하고 자유롭다. 오직 사랑의 논리에 관해서만 철저하다.  

    따라서 침묵기도를 일상의 삶에 잘 녹여내려면, 하나님을 향해 해야만 하는행위를 넘어서 하고 싶은마음에 아주 깊은 진솔함으로 주목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매일의 기도 실천과 관련하여, 저녁과 아침을 이렇게 보내면 어떨까 싶다.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잠자리에 든 후 자고자할 때 바로 성모송 한 번 할 사이에, 몇 시에 일어나야 하며 무엇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그 수련을 요약한다.”(73번)고 조언한다. 이 말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 잠자기 전에 내일 기도할 성경, 기도할 주제, 이 기도를 통해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 등을 미리 읽고, 혹은 생각해 놓고 잔다. 두세 번 읽고 줄거리나 구절, 영적인 갈망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식이 잠에서 깨어나는 그 사이에, 자신의 영적인 갈망을 기억한다. 머리 속에 불어 넣는 매일의 첫 생각이 이것이면 참 좋겠다. 아마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살고 싶은 그 비슷한 갈망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 갈망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 갈망이 구현되는 첫 자리이기도 한 침묵기도의 자리로 구체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좋겠다. ‘하고 싶은마음에 주목하면서, 가장 최적의 시간과 공간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아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꽉 들어차 있고 매일의 기도 시간도 자기 주도적으로 배정되어 있어서, 주님께 뭔가를 떼어 드려야 하는 느낌이 드는 삶을 벗어나보자. 우리 중에 한가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들 너무 바쁘다. 이렇게 삶이 바빠 시간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에 어떻게 기도 시간을 따로 내겠는가? 이기심 많은 인간에겐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예, 시·공간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확 바꿔보는 것이다. 우리보다 우리와의 사귐을 더욱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께 주도권을 아예 내 드리는 것이다. 전부를 다 드리고 우리는 단지, ‘하고 싶은마음을 더욱 깊게 확인하고, 그 마음 앞에 정직해 지는 것이다하여, ‘하고 싶다는 끌림 그 자체도, 하지 않으면 찝찝해서 못 견디는 양치질처럼 완전한 일상이 되는 그런 날이 될 때까지, 언제나 다시 시작하면 될 터이다. 아직까진하고 싶음이 분명하니까. 자,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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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수정 궁전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4.03.08 16:28
나는 오늘 주께 빌면서 내 대신 말씀해주소서 하고 있노라니,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 우리 영혼을 금강석이나 아니면 맑디 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궁성으로 보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마치 하늘에 자리가 많듯이 여러 궁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 모든 궁실 맨 한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왕실로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그윽한 비밀이 거기에서 이루어집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1궁방, 1장. 1,3절.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여정을 내면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움직임으로 묘사합니다. 영혼을 여러 연결된 방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궁전으로 그리면서 그 중심이 사랑하는 임이신 하나님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영적 여정의 이미지와 달리 그녀는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 영혼의 중심에서 발견합니다. 영혼이 맑디 맑은 수정으로 된 궁전으로 깨달아지는 까닭은 '이미'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넘실대는 파도처럼 그분께로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내 안에서 완전한 연합으로 함께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소소한 기도를 완전하다고 봐 주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나의 영혼의 중심에 들어오셔서 이제와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로 작정해주신 은혜 때문에, 이제 나의 영혼은 맑디 맑은 수정으로 된 궁전입니다. 중심에서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빛이 조금이라도 내 삶에 닿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현존 때문입니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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