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요즘 〈Pick Me〉라는 노래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정당에서는 이 노래를 선거 로고송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곧 전국 방방곡곡 거리를 이 노래가 채우게 될 것이다. 원래 〈프로듀스 101〉이라는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의 주제가인 이 노래에는 "pick me up", 곧 "나를 골라줘", "나를 (차에) 태워줘", "나를 구매해줘"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사가 반복된다. 이 오디션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신나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이 노래가 전혀 즐겁게 들리지 않는 것은 젊은 여성들을 "소녀"라는 풋풋하고 순수한 단어로 포장해 노골적으로 상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송에서 "국민 프로듀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부여된 시청자 집단은 만들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 집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해 마시라. 이것은 결코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과 시청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방송을 넘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비주의, 상업주의, 곧 인간의 존엄성을 상품성으로 변질시키는 세태의 피해자이지 않을까?


     이 노래가 많은 젊은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은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오늘날 젊은이들의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높은 경쟁을 뚫고 자신이 원하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직장에 적합한 '인재', 좀 과장해서 말하면 '상품'임을 오디션과 같은 입사 시험을 통해 증명해 보이기를 요구 받고 있다. 비단 취업준비생들만이 아니라 이미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도 승진이나 더 좋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기대하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집혀지기를(picked up)"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의 유행 속에 오늘날 젊은이들의 "나를 뽑아줘"라는 간절한 외침이 배어 있는 듯해서 노래가 매우 서글프게 들린다. 더구나 이러한 정글과 같은 사회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는 정치인들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유행을 '이용'해서 '과대 광고(공약)' 또는 '허위 광고(공약)'로 자신들을 포장해서 국회의원으로 뽑아달라고 외칠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밀려온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소명'(vocation)과 '사명(mission)'은 원래적으로 수동적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능동성은 그 부름과 사명에 대한 응답에 있다. 곧 수동성이 우선이고 그 뒤에 능동성이 따른다. 앞서 말한 "pick me up"이라 외치는 노래도 자신이 수동적으로 선택되기를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소명'과 '사명'이 갖고 있는 수동성과는 매우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pick me up"이라는 문구에는 자신이 선택받기에 적합한 매력적인 존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리스도교적 부름과 응답에는 자신이 부름을 받기에 매우 부적절한 하찮은 존재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청년 윤동주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수동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이것은 잘 알려진 윤동주의 〈십자가〉의 한 부분이다. 시인은 자신이 십자가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는 자신의 힘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어서 "허락"되어져야만 질 수 있는 것이라 이해했다. 최근에 난 이 시를 다시 읽으며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청년 시절, "십자가를 질 수 있나?"라는 찬송가에 담긴 주님의 질문에 응답하던 때에는 분명 나같은 죄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그 결심 밑에 깔려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십자가는 내가 "져 주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이 내게 "당연히" 맡기셔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슬쩍 한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말씀하시며 모든 제자들은 당연히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명령하셨지만, 이 말씀 이전에 '제자로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제자로 부름 받은 이들에게 '허락되는' 특권이다. 


     윤동주는 자신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시인'으로서의 삶으로 이해했다. 그는 그저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시인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 들였다(〈쉽게 씨여진 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고 좋은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원하지만, 윤동주는 다른 이들이 피하는 괴로운 십자가가 허락되기를 바랬다.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은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에서 세상은 상향성을 추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향성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길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 "pick up" 되기를, '캐스팅' 되기를 바라는가?


     우리는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고, 이제 이틀 후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성금요일이다. 일 년 중에서도 십자가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커지는 때이다. 그런데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예수님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마26:39).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십자가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겠다. 내가 결단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고마워하시며 얼른 십자가를 주시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리스도교적 십자가는 은혜를 입은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부담스러워하며 억지로 받거나, 생색내며 받을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한 줌의 재에 불과한 나에게 그리스도의 귀한 십자가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겸손히 두 손으로 받아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귀히 여기는 이들은 사실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고 계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68:19)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 줍니다. (주기철)[각주:1]


/ 바람연필 권혁일


  1. 주기철, "오종목의 나의 기원," 《주기철》,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 설교(서울: 홍성사, 2008), 1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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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수 없는 십자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6.02.13 14:33

그러므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다. 모든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 우리가 짊어지기 때문에 십자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십자가는 우리와 함께 한다. 어디로 향하든지, 위든, 아래이든, 안에서든, 밖에서든, 당신은 십자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12장. 십자가의 왕도.


어김없이 사순절이 돌아왔다. 
종교적 절기로 지나치기엔
삶의 주변에 흩어져있는 고통들이 다시금 
십자가를 가리킨다. 

 

신학공부 입문을 함께 한 동료 목사님의 사모님이,  
아직 험한 세상을 경험하지도 못한 세 아들을
남겨두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난 3여 년의 투병 생활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시간이었으리라.
그 과정을 먼발치에서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서 바라보기엔 두려웠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십자가를 바라보기가 부담스럽다. 
내 삶이 편안해졌다는 신호일 터,
편안한 순간 또한 잠시라는 사실을
영성가는 다시 확인시켜준다. 

십자가를 직시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두려움으로 남게 된다.
십자가를 직면하여 끌어안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진실한 면들을
받아들이게 될 지 모른다. 

편안과 안락이 축복이라 여기는
영적인 탐닉으로부터 벗어나
삶에 이미 충만한 십자가를 
인지하고 끌어 안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는 어디에서든 발견된다. / 구름 위 햇살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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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의 고백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4.09 22:05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를 못 믿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더 큰 법입니다. 받는 은혜가 크고 보면 자기 자신의 가엾은 모습이 돋보이고, 자기의 지은 죄가 더욱 커 보이는 것, 그러기에 저 세리와 같이(누가복음 18장 13절) 감히 눈을 쳐들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일곱 번째 성채, 3장. 14절.


부활절의 노래는 너무나 부르기 쉽고 그날의 축제는 이내 '나'의 것이 되고 말때가 많다. 사순절의 기나긴 어둔 밤은 지루했고 참기 힘들었으며, 남의 것 아니면 저 예수의 것으로 생각해버리고 싶은 유혹은 매해마다 되풀이 된다. 

그러나 십자가와 그 길에서 멀어질수록 부활의 기쁨은 밋밋해지고 부활절도 그저 연례행사로 그쳐버리기 쉽다. 참된 부활은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 이후에 오는 것이며, 받은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죄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는 세리는 주님을 만나고야 만다.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 이제 부활하셔서 "평화"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 만남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 이제 의인으로 거듭난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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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그 분을 닮다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5.02.17 10:06

우리 안에서 형상을 취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이고, 그리스도 자신의 형상이다(갈 4:19). 그것은 우리 안에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 자신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기까지 우리 안에서 일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된 자,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변모된 자의 온전한 형상이다. 우리는 그를 닮아야 한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지음, 이신건 옮김《나를 따르라》(서울: 신앙과 지성사), 372.


"인간이 된 자,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변모된 자의 온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변화되어 내 삶에서 그분을 나타내기 원한다면,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하고, 나를 게워내고 나를 죽여야 한다. 


그런데 어찌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기 원하다고 하면서, 

어찌 그분을 닮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더 살려하고, 더 크게 목소리를 내려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하고, 더 많이 박수받으려하면서 

비루하게 살아가는가. 


재의 수요일, 

이제 그 비루한 냄새 걷어내고 

그분을 내 그릇에 담아 

그 형상을 닮자.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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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 약혼하다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4.11.09 07:08

여기(6궁방)의 영혼은 다른 신랑은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으려는 굳은 결심이 벌써 딱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랑은 약혼을 서두르는 그 영혼의 열렬한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약혼을 더더욱 갈망하게 하시고, 이 최대의 행복을 얻기 위해 약간의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 아, 이 영혼이 제 칠 궁방(하나님과의 연합)에 들기에 앞서 안팎으로 치러야 할 시련은 얼마나 쓰라린 것이겠습니가?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6궁방, 1장. 1절.


16세기 스페인의 신비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여정을 7단계의 궁방(mansion)으로 묘사한다. 그녀에 의하면 마지막 단계인 '하나님과의 연합' 앞에 깊은 정화의 시련이 놓여져 있다.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 이전에 영혼이[우리가] 신부됨에 적합치 않은 모든 부분들이 정화를 위한 사랑의 불에 타게 된다. 그것은 어떤 죄악된 행위나 습관의 차원을 넘어서 죄된 자아 자체, 자기 중심적 삶 자체에 대한 정화의 과정이다. 테레사 뿐 아니라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이 말했던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이다. 거기에는 세상의 어떤 위로도 만족도 없으며, 하나님도 자신을 완전히 숨겨버리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테레사는 이 영혼의 밤이 주님과의 영적 결혼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영혼을 낭만적 사랑 놀이가 아닌, 첫사랑의 타오름이 아닌, '사랑의 어두운 밤'으로 인도하셔서 그 어떤 위로나 기쁨 없이도 주님의 뜻에 온전히 하나되도록 이끄신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절규에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의 고백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두렵고 무서운 혼란과 어둠의 밤, 차원이 다른 고통의 밤 한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다. 주님과의 영적 약혼식은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치러진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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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한 오늘의 고난 (디트리히 본회퍼)

한 줄 묵상 2014.04.17 03:56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찾았는지 확인하는 길은,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찾아온 모든 고난들을 거부하며 투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를 미워할 뿐 아니라,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난으로부터 빠져다갈 시도(궁리)를 한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Discipleship and the Cross," The Cost of Discipleship, part 1, ch.4.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란, 오늘보다 더 성공하여, 내 자유를 극대화하는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풍요로운 내일이란, 더 많은 돈을 벌어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할 수 있게 된 내일이라고, 

오늘보다 더 행복한 내일이란, 내 능력과 세력을 확장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내일이라고, 


세상은 그렇게 현혹하고 강요한다.  

내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보상받아야 한다고. 

현재의 고난이 무의미하지 않기 위해서, 생산적이기 위해서, 행복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라면,  

내일은 오늘보다 덜 고통스러워하며, 덜 불행해야 하며, 덜 불명예스러워야 한다고. 


오늘은 성목요일(Maundy Thursday)이다. 

내일(Good Friday),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에 직면하신다. 

현재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만큼, 

다가올 고난을 기다리는 시간, 또한 고통스러우리라. 


히틀러의 암살을 계획하며, 장차 올 고난과 운명을 감내하려는 본회퍼의 여정은, 

내일의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오늘의 고난이었으리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하얼빈 땅을 밟은 안중근의 발걸음은, 

내일 주어질 자신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감수하는 영적 순례이었으리라. 

본회퍼는 단호하다. 고통받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제자도이다.   


주님, 저는 제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혹, 십자가의 고통에 참예함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주님을 위한 십자가인가요, 저를 위한 건가요? 아니면, 제 이웃을 위한 십자가인가요?

저는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오늘 주어진 고난의 열매가 장차 올 영광이 아니라, 내일의 십자가라 할찌라도, 

당신의 십자가 옆에, 그 고통 곁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소서. 


당신의 길을 철저하게 따르다, 

십자가에까지 이르렀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당신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따르다, 

만나게 되는 그 십자가를, 

그 고통을 오늘이라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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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조선을 위한 십자가

김기창의 <십자가를 지고>


운보 김기창 화백은 조선의 예수님을 그려냈다. 십자가의 피가 이 촌박한 땅에 뿌려지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 땅(한국)의 예수님을 그려낸 듯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 나라의 사회 문화적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십자가를 지고>에서는 예수님이 화폭 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신 화폭의 중앙과 오른쪽은 이 땅의 민초들에게, 그것도 여성들에게 할애되어 있다. (서양의 십자가 그림과 비교하면 이러한 차이가 분명히 나타난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땅의 약자를 위한 복음(복된 소식)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주님, 이 땅, 조선을 굽어 살피소서!

가장 미련한 자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 되게하소서

비탈길 따라 하늘로 올라간 예수님처럼 

이 땅도 스올에서 일어나 주님따라 올라가게 하소서!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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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왕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4.04.07 06:30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 생명이 있으며

십자가에 보호가 있고

십자가에 위로가 있으며

십자가에 마음의 힘이 있고

십자가에 영혼의 즐거움이 있으며

십자가에 덕의 극치가 있고

십자가에 거룩의 완성이 있다.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 2, ch. 12 

("거룩한 십자가의 왕도(王道)에 대하여").


토마스 수사는 믿음의 삶에 '왕도'(royal road)가 있다고 말한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in cruce salus (/sub cruce salus)

"십자가 안에/아래 구원이 있다."


우리는 다른 데서 구원을, 생명을, 보호를, 위로를, 힘을, 즐거움을, 덕을, 거룩을 찾으려 하고,

그래서 찾지 못해 우울과 절망에 빠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는 노래한다--

여덟 줄 짜리 기쁨의 찬가(paean)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팔복을.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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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귀함 (마카리우스)

한 줄 묵상 2013.07.28 12:27

당신의 고귀함과 존엄함을 깨달아 아십시오. 그리스도의 동생이요, 온 천하를 다스리시는 왕의 친구요, 천상(天上) 신랑의 배필인 당신은 참으로 영화로운 존재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이렇게 존귀한 것임을 절감하게 될 때,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의 권능과 신비를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야 당신은 진실로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만이 그대가 영락(零落)의 존재임을 깨우쳐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십자가를 지나 영화롭게 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오르셨듯이, 십자가의 고난과 겸비를 그분과 함께 겪고, 그리스도의 몸에 합류하게 되고, 나아가 그분과 함께 영원히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John Wesley, ed. An Extract from the Homilies of Macarius, no. 15.1, (first printed in 1750).

 

자신의 본분이 고귀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현실이 그에 비하면 얼마나 누추한 것인지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애석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주저 앉아 있지는 않을 것다. 자신의 잠재력을 또한 깨달았으므로, 그 영락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귀함을  다시금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그 영혼에 차고 넘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밭에 감추어져 있던 보화를 발견한 사람과 같다 (13:44). 그들은 세상의 통념과 사상으로 짜여진 가치 체계와는 다른그것을 넘어서는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진행시키려고 한다. 바로 이런 사람이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들에게 그 길이 바로 자신의 존귀함을 다시 발휘하게 되는 경지로 가는 길이다. 자신의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찬송을 부르며 길을 간다 (458). 새결새김 /남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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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3.26 09:37

기쁜 표정을 지으시며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상처난 옆구리 안을 들여다보셨습니다. …… 선하신 주님께서 더 없이 기쁨 가득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Lo, how I loved thee.)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ca.1342 – ca.1416),

《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24.


고난주간은 봄에 있다. 


이 땅에 봄이 온 건 '고난'이 있었기 때문임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거룩한 고난. 


이를 알아본 한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다. 


"봄"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 할 수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온 사람아  (이성부, '봄' 중에서 )


이 봄, 

먼데서 이기고 온 그 분을, 

그 분의 몸을 

두 팔 벌려 안아보자. 


창에 허리 찔리고

손에 못이 박힌

그 상처난 몸을. 


그러면 알게 되리라, 

이 봄은 

'자연히' 오지 않고, 

'은혜로' 왔다는 것을.  


눈물이 솟으리라. 


왜 기쁘면, 

참된 기쁨을 만나면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일까? 


그 순간 우리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Lo, how I loved thee


보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십자가 위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 산처럼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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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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