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선조를 통한 분별 (요한 카시아누스)

한 줄 묵상 2015.06.30 13:33

그때 모세가 말했다. "참 분별은 오직 겸손할 때 얻어진다. 겸손의 그 첫 번째 증거는, 되어진 모든 일들이나 생각들이 우리의 (신앙) 선조들의 조사에 맞춰질 때이다. …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 선조들의 모델에 의해서 사는 사람(수도자)은 결코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

- 요한 카시아누스(John Cassian: 360-435), John Cassian: Conferences(New York: Paulist Press, 1985), Conference 2 no.10, p.67.

매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 따르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존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분별과, 영적 자유를 향한 여정의 순수성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럴 때 믿음의 선조들이 걸어온 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은 숙연해지고, 영적 분별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내려놓게 된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나의 분별이 얼만큼 초라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실존의 한계에 묶여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들을 죽인 청년을 아들로 삼으면서까지 복음을 철저히 삶속에서 살아내고자 했던 그 실행만큼 확실하고 강력한 영적 분별의 열매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시금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구하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올 때, 참 분별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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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름위 햇살

수치와 책망을 겸손히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한 줄 묵상 2015.06.18 00:30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충고와 책망과 꾸지람을 마치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인내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은 복됩니다…. 변명하는 데 빠르지 않고 본인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수치와 책망을 겸손되이 참아 견디는 종은 복됩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의 글(분도출판사, 2004), 영적 권고 23.

얼마 전에 지인에게 충고 한마디를 들었다. 아니, 충고라고 하기엔 동정과 호의가 가득한 조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하루 종일 마음이 평화롭지 못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이 뭔데', '뭘 안다고' 같은 단어들이 내 안에서 하루 종일 춤을 추었다. 형제 자매들에게 듣는 책망과 충고들은 신앙과 인격을 성숙시키는 좋은 거름이 된다. 그러나 그 거름은 입에 달지 않은데, 나이가 들수록 더 쓰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이 들수록 더 옹졸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 옹졸함이란 다름 아닌 교만의 결과다. 교만이 사람을 좁게 만든다. 인내심은 줄고, 화가 늘어난다. 듣는 일은 줄고, 말은 많아진다. 웃음은 줄고, 호통은 커진다. 부끄러움은 줄고, 뻔뻔함은 늘어난다. 사죄는 줄고, 변명은 늘어난다. 그래서 나이들수록 더 기도가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겸손 훈련'이 절실해진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도망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참담할까? 그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위로가 필요한 다윗에게 오히려 저주를 퍼붓는다. 다윗의 신복 아비새는 “이 죽은 개가 어찌 왕을 저주합니까? 제가 머리를 베어오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그냥 나둬, 저게 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야.”라고 답한다. 사람의 저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겸손이 얼마나 대단한지, 더 엎드려 겸손을 훈련해야겠다.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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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다 달팽이

1.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목회도 규칙이 필요하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 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일부.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1984)이라는 시는 한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경기도 안양의 한 변두리 동네에 위치한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찬송을 하여 교인들의 종교적 열광을 만족시키는 뜨거운목사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학생회 소년들과 텃밭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기도 하고, 읍내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는 목사 같지 않은사람이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설교는 집사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래서 장마통에 교인이 반으로 줄고, 그의 둘째 아이가 폐렴으로 죽자, 실망한 교인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능력도, 신유의 능력도 없는 그를 내쫒았다.


    이 시는 약 20여 년 전에 지어졌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양떼를 섬기는 목자라는 전통적인 상식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목사들이 추구하거나 교회의 지도층들이 바라는 목회자상은 교인수와 헌금액수를 높이는 데에 유능한 지도자인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목회자의 궁극적인 모델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에 가깝다. 너무나 뼈아프지만 사실이 그렇다. 신제품을 발표하는 스티브 잡스의 쇼맨십을 흉내 내어 설교단에서 복음을 물질적 욕망 충족을 위한 소비재로 변질시켜 온 것이 우리 목회자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유구한 기독교 역사에서 탁월한 목회 지침서로 사랑받아 온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I: 540-604)목회 규칙(Regula Pastoralis)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시골 목사(The Country Parson)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목회자들에게 도움 될 만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 (목회자의 자질)


    목회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눈에 보기에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는 목회를 하는 이들도 이 주제에 대해서라면 며칠을 밤새워서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1세도 그의 목회 규칙을 시작하며, 리더가 지고 있는 부담과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어려움은 흔히 이야기 되는 목회 스트레스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거룩한 직함이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교회에서 더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없다. …… 만약 그 죄인이 그 성직에 주어지는 존경을 받는다면, 그의 불법이 예가 되어 멀리까지 미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I.2). 오늘날 목사또는 장로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의 각종 불법으로 인해 한국 교회와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혹독한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을 그저 좋은 옛날 말로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의 위치가 이처럼 부담이 큰 자리이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요약해서 말하면, 배우고 공부한 것을 말로 가르치면서도 삶으로는 실천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에스겔 3418-19절을 인용하며, 자신은 맑은 물을 마시면서 양들에게는 자신의 발로 더럽힌 흙탕물을 마시게 하는 목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이 경우 양떼는 그들이 귀로 들은 가르침이 아닌, 그들이 목격한 목자의 오염된 행동을 모방하게 된다(I.2). 그러면 말과 행동또는 앎과 삶사이의 간극은 왜 생기게 되는 것일까?


    이 책 111장에서는 지도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의 유형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먼저,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자신이 마땅히 가야하는 바른 길을 알고, 또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고결한 삶의 습관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종종 악한 습관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습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좋은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규칙이다. 규칙은 습관과 리듬을 만들고, 습관과 리듬은 규칙을 실천하는 사람의 존재를 형성한다. 이 글에서 다루는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과 허버트의 시골 목사는 목회자가 바람직한 삶의 습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규칙들을 모은 책이다. 그런데 습관은 단순히 행위의 반복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위는 내면의 생각과 바람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는 습관을 형성하는 내면의 생각과 동기에 주목한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육체의 음탕함에 지속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 또는 탐욕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사람은 지도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정욕과 탐욕이 생각의 영역에서 진압되지 않으면, 외적인 행동에서 주도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탐욕은 다른 악들과 쉽게 결합해 그 사람 전체를 타락시키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뿌리 뽑혀야 한다. 또한 무거운 땅의 염려는 아예 사람의 등을 굽게 만들어 고개를 들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I.11).


    그런데 이 유형들보다 더 심한 경우는 아예 선과 악을 바르게 식별하는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I.11). 이것은 바둑판의 흑돌과 백돌처럼 옳고 그름의 구별이 뚜렷한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마주치는 많은 문제들은 그 본질이 미묘한 경우가 많아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특히 그것이 인간의 내면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I.1). 비슷하게 조지 허버트는 시골 목사에서 간음이나 살인과 같은 악덕은 사람들의 눈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탐욕식탐은 그 시작이 불명확하고 속이는 성격이 있어서 자세히 성찰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다고 조언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은 탐욕에 대한 설교를 듣고 탐욕을 정죄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24).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런 불명확한 악덕들에 대한 정확한 식별 기준을 익히고,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목사가 필요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집을 구입한 교인의 집에 가서, 집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좋은 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집을 축복함으로써 그 사람의 탐욕을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1세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 ho Nazianzos: 329-390)의 견해를 받아들여, 영혼을 돌보는 것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능숙함을 필요로 하는 예술 중의 예술이며, 목회자는 마음과 생각의 의사라고 높이 평가한다(I.1).


    목회가 이렇게 높은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교만에 빠질 위험도 매우 높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겸손이 반드시 요청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지혜나 진리에 대한 오만한 추측으로 눈먼 자또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언한다.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보편적 진리로 절대시 하는 이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매우 안타깝게도 실제로 이런 경직된 사고에 갇혀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신성한 관조(contemplation)의 빛에 대해서 무지하여, 곧 우리의 매일의 삶의 경험에 빛을 비춰주는 하나님 경험이 매우 얕거나 없어서, 어둠 속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자이다(I.11). 만약 지금까지 언급한 유형들 중에 자신이 속해 있고, 그러한 약점들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면, 그 사람은 목사라는 직함을 내려놓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악한 모델로 다른 사람들까지 타락시키는 것보다는 혼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형벌이 덜할 것이라고 권면한다(I.2). 그러면 이제 지금까지 드러난 자신의 약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이나, 좀 더 영성적인 목회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살펴보자.

 


조화로운 삶, 전인적인 돌봄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으로 지명된 첫 번째 수도자이다. 그는 삼십 대 초반에 시의 집행관이 되었으나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 수도 생활의 이상을 좇아 정치계를 떠났다. 그러나 그의 영성과 능력을 높이 평가한 이들에 의해 그는 오십 세에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를 버리고 수도자가 된 그에게 교황의 직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적인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마음이 산만해지고, 자기 성찰을 빠뜨려서 죄에 빠질 위험이 높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목회 사역의 가장 큰 부담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관조하는 것과 외적인 활동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매우 노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지도자들은 외적 문제들에 몰두하여 내적 생활에 태만해지거나, 내적 생활에 대한 갈망으로 외적 문제들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외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내적으로 피폐해지고, 반대로 내적 자아에만 정신을 빼앗기면 이웃들에게 필요한 외적 돌봄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II.7). 구체적으로 그는 어떤 지도자들은 종종 일중독자(workaholic)가 되어 외적인 일들이 끝나면 내적 공허와 무질서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들은 자신들의 삶도 점점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돌보는 영혼들 중에 영적으로 진보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도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 반대로 지나치게 영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들의 설교에는 청중들의 현재적 삶에 필요한 것들이 결여 되어 있는 것과, 그들의 말이 듣는 이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II.7).


    조지 허버트 역시 시골 목사에서 목회자의 외적 활동에 대한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생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목사들은 특히 영적 교만과 마음의 불결함에 빠지기 쉬우므로 밤낮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9). 여기서 마음의 불결함(impurity of heart)”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5세기에 세속 도시를 떠나 마음의 청결함(purity of heart)’을 추구하며 사막으로 나아갔던 수도자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세속화되어 가자,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불모의 땅 사막으로 나아가 그들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고 그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이들이다. 그래서 허버트는, 목사는 이와 같은 초기 수도자들의 이야기를 종종 읽어서 그들이 평안할 때에 어떻게 매일매일 인내하고, 절제하며, 유혹을 이겨내고, 겸손을 훈련했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한다. 비록 허버트의 시골 목사나 그레고리우스의 목회 규칙은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없지만, 사막 수도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모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여러 출판사에서 역간되었으니, 오늘날 영성 목회를 추구하는 목회자들이라면 반드시 가까이에 두고 읽으며 마음의 청결함을 지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나 허버트가 이렇게 내적 생활을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목회자가 자신의 내면의 은밀한 악과 유혹을 분별할 수 있어야 자신이 섬기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허버트에 의하면 목사는 언덕 위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목사는 여가 시간에 활동에서 벗어나 언덕 위에 서야 한다. 그는 거기서 양떼를 생각하며 두 종류의 악[탐욕과 식탐][그 악들에 사로잡힌] 두 종류의 악한 사람들을 발견해야 한다.”(24). 허버트가 성찰과 식별을 위해 제시한 공간은 언덕 위이다. 언덕에 오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의 거리가 형성되고 익숙한 것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 낯익은 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낯익은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한다. 허버트가 말한 언덕 위는 이런 창조적인 거리 속에서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대면하며 새롭게 바라보는 공간이다. 또한, 언덕 위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구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목회자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자신이 섬기는 교인들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언덕 위에 서는 이들에게 주님은 하늘의 구름처럼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우리 내면의 생각과 움직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신다. 조지 허버트의 시골 목사에서 말하는 시골 목사17세기 영국 각 지방의 교구를 섬기는 목사들이다. 당시 영국의 지역들은 대부분 전원적인 환경 속에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도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조망을 얻을 수 있는 언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각자의 언덕을 찾아야 한다. 여가 시간을 게으르게 보내거나 일시적인 즐거움을 좇는 데에 사용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바쁜 목회 활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언덕위에 올라야 한다. 특히 한 주간의 사역이 끝나는 주일 저녁이나 월요일을 성찰을 위한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허버트는 교구민들의 내적 생활뿐만 아니라 외적 생활, 또는 일상생활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골 목사는 자신의 교구에서 필요하면 법률가와 의사의 역할도 도맡아야 하며, 교구민들의 일상생활에 일어날 법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사전에 숙지하고 대비해야 한다(23).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의사와 법률가가 드물었던 ‘17세기 영국 지방 교구라는 특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에 오늘날 일반적인 한국 목회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목회자가 세상살이에 대해서 아는 체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목회자의 역할을 교회 안으로 제한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 사역은 시간적으로는 주일’, 공간적으로는 교회에만 한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그레고리우스의 견해를 요약하면 영적인 일들은 성직자가, 세속적인 일들은 평신도들이 담당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직자가 양떼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설교가 청중들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설교의 효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레고리우스와 허버트에게 있어서 목회또는 목양은 양떼들에 대한 전인적인 돌봄을 의미했다. 이런 맥락에서 목회자는 교인들의 물질적인 삶, 일상적인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평신도들이 많은 오늘날, 목회자가 모든 일들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주변에 그 일을 감당할 전문가들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레고리우스가 목회 규칙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을 일흔두 가지 종류의 다양한 청중들에게 각각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할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인간 삶의 모든 측면들을 목회적 돌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허버트는 목회자는 자신의 교인들의 질병뿐만 아니라 시대의 질병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목회 활동의 영역이 필요한 경우에는 교구(교회)의 범위를 넘어서야 함을 시사한다(32).

 




나의 목회 규칙


목회자의 소명은 종교적 기업가들의 전략에 의해 사업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 내가 속해 있는 문화적 조건들은 예수의 방식 그대로 그분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나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매우 유해한 문화적 오염원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한다고.”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그의 회고록 목회자(The Pastor)에서 오늘날 급변하는 미국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는 목회자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이 의미를 잃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목회자의 소명 자체도 물질주의, 소비주의 문화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많은 면에서 미국 교회를 닮은 한국 교회의 사정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시리즈의 첫 번째를 목회자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글로 시작한 이유는 영성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영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삶으로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 먼저이다. 그래야 교인들도 일상 속에서 깊이 있고 풍요로운 영성 생활을 살도록 도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가 각자 자신 만의 목회 규칙을 만들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목회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결심문들을 읽다 보면, 그가 자신의 삶에 규칙을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지 허버트는 자신의 규칙이 완결된 것이 아니며, 독자들의 첨삭을 통해서 보다 완성된 목회 지침서가 되기를 희망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목회 규칙이 필요한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동역자들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 나의 목회 규칙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필자 소개 : 권혁일은 장로교 목사이며,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의 팀블로그(spirituality.or.kr) 편집자이다. 현재 미국 버클리 소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Ph.D. Candidate).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잡지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원고가 축약되어 인쇄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전문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첫 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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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연필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백투더클래식 2014.03.04 03:52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생의 절정의 순간이 있다.” 테이블 위에 얹힌 진분홍 장미꽃의 도드라진 자태는 마치 이런 말을 건네 오는 듯하다. 도시의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숨 가쁜 발자국 소리들은 아마도 그런 절정을 꿈꾸며 모이고 또 모였으리라. 많은 도시인들의 가슴에는 더 많은 소유와 축적은 생을 빛나게 해준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듯하다. 이 글귀의 끝자락에 도종환의 시 한 구절은 의문부호를 하나 붙여 놓는다.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도종환, ‘단풍 드는 날일부.

 



떠나온 사람들


        버림과 떠남으로 생의 절정을 향해간 사람들이 있었다. 주후 3-6세기경,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비옥한 생활 터전을 버리고 훌쩍 떠나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구현하고픈 열망으로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와 이야기들을 모아서 담아 놓은 책이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The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이다.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숭앙했던 스승들의 금언들과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보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의 모태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각 금언들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와 상황 가운데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주어진 교훈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교훈들이 약 천오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사막의 남녀 수도자들은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사막 수도자의 원조 격인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ca251-356)는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1)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듣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토니우스의 뒤를 이어 사막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다른 사람들의 귓가에도 울렸다.


        이들의 떠남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의 자리는 정상적이지 않고 현재의 삶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이 그들을 움직였다. 그들 당시 기독교회는 사막화 과정 가운데 있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고 황제까지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권력과 재물의 위력 앞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전에 만연했던 혹독한 핍박과 순교는 사람들에게 한 주인을 섬기도록 신앙의 절대성을 요구하였지만, 신앙생활이 자유로워진 이후에는 오히려 신앙이 삶의 한 조각으로 전락하면서 영적 긴장감과 절박함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지만 이처럼 교회가 사막같이 메말라져만 갔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워 올린 사람들이 바로 사막의 수도자들이었다이들이 삶의 터전을 떠난 것은 그들 나름의 보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보화는 세상 가치관을 확실히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압바 히페레키오스가 말했다. “수도자의 보물은 자발적인 가난이다. 형제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자. 안식의 시간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120.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살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영적인 절박함이 이처럼 포기와 가난의 삶으로 떠나게 했다. 떠남은 말 그대로 문제점들의 나열이나 예리한 분석이 아니라, 실제로 발걸음을 옮기는 결기 있는 행동이다. 간절한 염원이 스며있어야만 일어나는 삶의 양태인 것이다. 간절한 염원은 수도자적 삶을 낳았고, 수도자적 삶은 사막의 꽃, 즉 하나님의 향기 나는 사람들을 잉태했다.

 


사막에 핀 꽃


        사막은 메마르지만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강같이 흐르는 곳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불꽃 속에서 또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과 강렬한 대면을 가졌던 곳이 광야였다. 세례 요한이 외친 곳도 광야였고,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사탄의 시험을 받은 곳도 광야였으며, 바울 역시 회심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는데 그것도 광야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 체험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여정(고전 10:11)의 한 형태라고 가르친다. 이들 모두가 사막에서 하나님을 만나 부대끼며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었고, 때로는 사탄과 처절한 싸움을 하면서 형성되고 꽃을 피웠다. 사막의 수도자들 역시 그와 같은 전통을 이은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막에서의 하루하루는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기 위한 열망으로 채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적 필요를 줄여나가는 고행과 침묵, 규칙적인 기도와 자신을 성찰하는 삶에 투신하였다. 이 모든 훈련에는 절제와 분별이 밑받침 되었다.

 

한 원로가 오이가 좀 먹고 싶었다. 그는 오이를 가져다가 그걸 눈앞에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욕망에 지진 않았으나, 스스로 벌주면서 그 욕망을 뉘우쳤던 것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79.

  

      수도자들은 세상을 떠나옴으로써 상대적으로 외부의 유혹에서 자유로웠지만,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절제하며, 깨어 분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제는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그 유혹에 흔들리는 내면의 욕망이었다. 그들은 항상 속사람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 앞에서 생활한다는 경각심을 지닌 채, 삶의 모든 조각들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기를 원했다사막은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기가 어렵고, 생명이 있는 존재는 항상 존립 자체를 위협받으며 살아야 하는 곳이다. 생명보다는 죽음이 더 친근한 곳이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안팎의 연약함 때문에 거룩한 삶을 단 하루라도 지탱해 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했던 곳이 바로 사막이었다. 수도자들은 물과 빵이 아닌 겸손으로 살아야 함을 체득해야만 했다.

 

복된 신클레티케가 말했다. “쐐기가 없으면 배의 나사를 조이는 것이 불가능하듯, 겸손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302.

 

        유혹을 이기기 위해 수도자들은 사막에서 겸손과 자비와 인내라는 꽃들을 피워나갔다. 사막은 아프지만 치료를 제공해 주었고, 고통스러웠지만 행복을 던져다 주었다.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그들이 평생 걸쳐왔던 옷가지들을 벗기기에 충분하였다. 감정과 지식에 치우친 껍데기와도 같은 하나님과의 피상적인 만남은 이글거리는 햇볕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져 내렸다. 뜨거운 숨결을 지니신 하나님과의 대면은 영혼의 가식적인 껍데기를 완전히 벗겨 버렸다. 땅속에 깊이 박힌 단단한 바윗돌처럼 확고하게 안다고 믿어왔던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했다밤하늘이 쏟아놓은 뭇 별들보다 많은 분심들과 유혹들이 자신들의 호흡 속에 깃들어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고, 또 이것들을 부추기는 사탄의 위협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자신이 얼마나 목이 뻣뻣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현존과 천상의 은혜를 향한 갈망과 회개의 삶은 더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원로가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를 어디든 달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눈물과 애통이 뒤따라야 한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61.

 

애통함과 눈물 속에 그들은 다듬어져 갔다. 사막은 이처럼 표면적인 나가 아닌 근원적인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궁극의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겸손과 환대, 자비와 인내가 싹터 나오면서 사막 곳곳에 꽃이 만발하였다. 이 같은 생생한 체험들이 깊어져 사막에 영적인 스승(Abba, Amma)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의 말 한 마디는 타들어가는 제자들의 목을 시원하게 적셔 주었다. 그리고 도시에 있는 사람들, 왕과 법관들도 그 지혜를 듣기 위해 사막으로 찾아 왔다. 결국 나일강의 넘쳐나는 물이 사람들의 타는 가슴을 해갈시켜 준 것이 아니라, 건조한 바람이 가득한 사막이 사람들과 도시에 생명수를 공급해주었다.



 

절정에 서는 떠남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개신교에 대한 진단과 비판이 어느 때보다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면면이 살펴보면 한결같이 교회 토양이 점점 불모지가 되어간다는 내용이다. 생명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증상이 만연하다는 암울한 진단이다. 사막화가 먼 나라 몽골에서만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막화되어가는 한국 교회에 생명수가 절실하다. 생명수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신앙을 무너뜨리는 세력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 저항은 과거 교회의 사막화에 저항하여 사막으로 떠났던 수도자들처럼 우리의 사막을 찾아 떠나는 결기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권력과 성공과 명예와 부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한국 교회는 지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는 새 땅을 밟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남으로써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한국 교회의 황폐화는 완연하다. 하지만 만약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그리고 공동체의 사막을 찾아 떠난다면, 그래서 그들이 과거 이집트 사막이 수도자들로 도시를 이루었던것처럼 많아진다면, 한국 교회는 떠남을 통해 피어나는 새로운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의 지금 이 자리는 어떤 곳인가? 지금 이 자리를 저항하며 사막을 향한 떠남이 있었던가? 나의 사막은 어디이고 무엇일까? 일상에서 나는 무슨 꽃들을 피워내고 있나? 우리야 말로 바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사막의 독방(cell)에 거하며 이런 질문들과 씨름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수도자들이 스승에게 찾아와서 절박한 심정으로 외쳤던 말,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그러면 우리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건져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한 원로가 말했다. “말만 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말이 많다. 행동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닌 까닭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200.

 

임택동은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과정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신앙과 영성이 발휘되고 또 표현되어지는 것(lived religion)에 성경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4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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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새로움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4.01.09 16:45
우리가 주께 바라는 모든 것을 당연히 들어주시는 것은 이 겸손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겸손을 지니고 있는가를 대뜸 알아보는 방법은, 자신들이 주님의 그러한 은혜, 그러한 맛을 마땅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죽는 날까지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4궁방, 2장. 9절.


Teresa of Ávila by Peter Paul Rubens

2014년의 새로움이 각 사람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시간 안에서 각 사람은 새 일을 준비하고 계획합니다. 그리고 소망과 염원을 담아 바라는 것을, 스스로를 향해서는 다짐하고 하나님께는 간구합니다.

이 소망과 간구는 소중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라는 덕목이지요. 아빌라의 테레사는 우리가 주께 바라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은 겸손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때론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험과 그것들을 이룬 능력들을 기본 전제로 삼고, 그 다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난 해의 작고 소소한 것에서부터 위대한 성취까지. 그것을 새해의 출발점이자 바탕으로 당연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기대하지요.

그러나 겸손함이란 주님의 은혜를, 그리고 지금까지(지난 해까지, 어제까지, 조금 전까지) 누린 맛들을 실상 죽는 날까지 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고백에 담겨있습니다. 새해는 지난 해의 성취를 바탕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나의 존재가 시작된 신비를 기억하며, 그리고 그 시작을 열어주신 하나님과 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겸손이 올 한해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는 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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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또 땅을 향해 (조지 허버트)

한 줄 묵상 2013.12.26 11:49

"한 인생은 육체를 입은 채 땅을 바라보고, 

다른 인생은 그 분을 향해 있다." 


-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 The Works of George Herbert in Prose and Verse (New York: John Wurtele Lovell, 1881), 172.



이것은 조지 허버트의 <골로새서 3:3>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그는 이 시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육체를 입은 채 땅을 바라보며 동시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래,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동시에 땅에서 사는 존재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예수님은 가장 높은 자였지만 가장 낮은 자로 이 땅에 오셨다. 가장 높은 자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로서 삶을 사셨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렇게 성탄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가장 높으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가장 높지만 가장 낮은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문과 초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잘 누리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높은 것도 지극히 낮은 것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낮음에 처한 자로서의 겸손과 순종함도 없이, 또 높음에 대한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성탄은 예수와 더불어 높은 곳에--"하늘에"(엡2:6)--올려진 우리에게, 너희도 가서 낮은 이들의 발을 씻겨 그들도 왕의 자녀가 되게 하라는 주님의 초대이다. 내가 너희를 높여주었으니 이제 낮은 곳을 찾아가라는 초대이다. 땅에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초월하며 살라는 초대이다. /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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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겸손을 훈련할 때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한 줄 묵상 2013.11.05 18:06

겸손의 네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이 [상급자]에게 순종할 때에 그것이 어렵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일이라 할지라도, 또는 심지어 어떤 종류의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마음으로 잠잠히 고통을 품고, 약해지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480-ca.547), 《베네딕트의 규칙서》 

권혁일, 김재현 옮김, 제7장. 35-36. (서울: KIATS, 2011), 43.


베네딕트의 규칙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겸손의 열두 단계를 설명하고 있는 제7장이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수도자가 높으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녀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리고 그 겸손을 훈련하는 방법이 바로 공동체 안에서의 상급자와 동료 수도자들에 대한 '상호 순종'이다. 특히 겸손의 네 번째 단계는 비록 상급자가 자신에게 맡긴 일이 어렵고, 자신의 소원과 반대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일을 통해서 어떤 피해를 입게 된다고 할지라도 도망치지 않고 잠잠히 그 고통을 품고 감내하는 것이다.


베네딕트의 이러한 가르침은 윗사람의 명령이 부조리하고 불법적이어도 무조건 복종하고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기본적으로 수도 공동체(monastic community)를 배경으로 한다. 수도 공동체에서는 '아버지(abba)' 또는 '어머니(amma)'라고 불리는 수도원장이 수도자들의 영혼을 책임진다. 그(그녀)는 수도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구성원들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간다. 그래서 베네딕트는 수도원장의 자질과 역할에 대해서 여러 번 그리고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간의 신뢰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훌륭한 지도자가 '무조건적인 순종과 인내'의 이상적인 환경이다.


하지만 이 규칙이 수도원 밖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전혀 관계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나 가정, 직장, 삶의 환경 등에서 상급자(연장자)에게 또는 서로에게 순종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겸손을 훈련하기를 원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어려운 일,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일, 또 (스스로의 눈에는) 자신에게 별 이익이 되지 않는 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방법을 찾는 데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혹시 주님께서 지금 내가 겸손을 훈련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라. 겸손하며 인내해야 할 때인지, 아니면 요나처럼 자신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방향 전환을 해야 할 때인지 주님께 여쭈어 보고 깊이 생각하라. 혼자서 기도만 하기보다는 신뢰하는 영적 지도자와 상의하는 것이 '기도의 행위'로 자신의 욕망과 뜻을 합리화하는 것을 피하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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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 안에 계신 주님 (하나님 임재 연습)

한 줄 묵상 2013.04.09 14:58

모든 순간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분의 도움을 간구하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다는 것을 (깊이)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  c. 1614-1691), 《하나님 임재 연습》,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Fourth Conversation)


로렌스 형제는 주님이 이미 자신 안에 계시다는 인식 속에서 살아갔다. 그것이 그의 영적 삶의 전체이자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현존이 그가 만지고 관계맺고 경험하는 모든 일상을 거룩하게 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경험했다.  미미 있는 일상이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던 것은 주님의 현존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는 예수님의 임재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은 완전한 복종과 자아의 포기라고 알려준. 생전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불리셨던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들의 마음에 임하시기를 즐겨하신다. 로렌스 형제에게 있어서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집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은 스스로를 세리와 죄인과 같다고 고백하는 자아의 포기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주님으로만 더불어 먹고 마시기를 기뻐하는 마음에 주님은 임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성육신하셔서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오시고  가장 가난한 마음의 자리를 찾으셨던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는 이들에게 즐겨오신다. 원래 그러셨던 분이셨고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그분에게까지 올라오라고 명하시기보다 스스로 우리의 자리까지 내려오시길 선택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일상을 살아가는 지금의 내 마음에라도 충분히 내려오실 있는 분이시다. 그렇게 하셔서 기도의 자리와 일상의 자리 사이의 경계를 파괴하시고 오늘도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고자 하신다.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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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심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한 줄 묵상 2013.03.06 00:16
  • 아주 오래 전 부산의 한 시립도서관 서가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들을 모아 놓은 책을 발견하고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아직까지 기억나는 내용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과식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어요. 과식을 하면 소화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려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영적인' 결심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관련된 결심들을 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요.

    그리고 지금까지 종종 에드워즈의 결심을 생각하며 과식을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저도 필요할 때마다 몇 가지 결심을 하고 실천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심은 어렵지 않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네요. ^^;;

    BlogIcon 바람연필 2013.03.06 01:12 신고

결심한다. 말함과 행함, 곧 모든 면에서 마치 어느 누구도 나처럼 혐오스럽지 않고, 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죄를 짓는 것과 같이 행동한다. 또는 내가 그들과 동일한 약점이나 잘못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결점을 아는 것을 오로지 나 자신에게 수치심을 일으키게 하고, 단지 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기회로 삼는다.[1]


-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c. 1703-1758)  [결심문]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대각성운동 시기에 많은 사람들을 각성시켜 하나님께 회개하게 한 뛰어난 설교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의 저술 중에 진노하시는 하나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유명한 설교가 있는데, 그 제목만 보더라도 그가 사람들에게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려 얼마나노력하였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에드워즈는 젊은 시절 회심을 경험하고 앞으로의 신앙 생활을 위해 수칙을 정해놓고 실천에 옮기기 위해 애썼다. 구체적으로 70가지의 결심을 적어놓고 이를 반복해서 읽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 나의 눈을 사로잡은 중 하나가 위의 여덟 번째 수칙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외치고 대각성을 부르짖는 부흥사로서의 에드워즈를 떠올린다면 무서운 심판관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겠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모든 면에서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보지 않고 자기 눈의 티를 먼저 보려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각성운동과 같은 부흥이 한순간에 임하는 감정의 격분이 주를 이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물론 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에드워즈의 경우를 보면 젊은 시절부터 결심한 것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삶, 그리고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고백하는 것을 우선시 하는 태도가 대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참으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서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빛으로질주



[1] Resolved, To act, in all respects, both speaking and doing, as if nobody had been so vile as I, and as if I had committed the same sins, or had the same infirmities or failings, as others; and that I will let the knowledge of their failings promote nothing but shame in myself, and prove only an occasion of my confessing my own sins and misery to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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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빛으로질주

담대한 간구 (하나님 임재 연습)

한 줄 묵상 2012.11.28 08:03
  •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는 분위기 살핀 후에 비위를 맞추거나 어려워하며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간구하라는 말이네요.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므로.

    BlogIcon 바람연필 2012.11.28 14:51 신고
  • 담대하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라는 생각 해봅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11.29 06:54 신고
 우리는 온전히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들에는 관심을 버리고, 주님의 끝없는 공로만을 의뢰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분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 로렌스 형제 (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  c. 1614-1691), 

《하나님 임재 연습》,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Fourth Conversation)


그리스도인도 담대히 은혜를 구하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지향하면서도, 환난과 시험 가운데에서는 스스로 해결해나가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들에 대해 도덕적으로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듯, 스스로 깨우치고 해결한 뒤에야 주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은 솔직함으로 민낯의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로렌스 형제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었으며, 그분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피조물로서 자기를 보고, 그 겸손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자기 고백적 행위였다.  그가 더 많은 일상의 영역에서 그분의 은혜에 의존했을 때, 그분의 임재를 놓치지 않았고, 놓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잊어버리면 그도 하나님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은혜를 주신다는 진리를 잊어 버렸다.  


하나님께 진실로 도움을 구하고 있는 이는 그분을 놓칠 수 없다. 은혜를 구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이는 그분의 손을 놓을 수 없다. 주님이 먼저 자신의 손을 붙잡고 계셨다는 것을 온전히 알게 될 때까지.  / 작은소리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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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소리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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